인용구에서 예견되듯이 이 소설은 피그말리온 신화를 큰 뼈대로 한다. 고대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조각상을 사랑하고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아프로디테여신이 조각상에 생명을 주어 진짜 사람이 되게 해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남자의 절절한 로맨스로 윤색되기도 하고 학식있는 남자가 철모르는 소녀를 숙녀로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로 각색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는데 현대에 와선 AI와 접목되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안 느껴질 수가 없다.
[ 당신은 다시 그 꿈을 꾼다 (p. 9) ]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어쩌면 누군가의 '꿈' 같은 이야기이다. 다만 그 꿈을 꾼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도 할수 있거나( 이 경우는 현실이 아닌 어떤 세계에서 인간 아닌 존재로 계속 꿈을 꾸는 판타지적인 경우이고) 영원히 반복 부활된다고도 볼 수 있는 (이 경우는 현실에서 같은 내용의 꿈을 계속 꾸는 실존적 존재가 있지만 그 존재가 계속 바뀐다는 현실적인 경우이다), 꿈일수도 있고 기억일수도 있는 묘한 문장이라는 것을, 첫페이지의 인용구 못지 않게 책을 다 읽고나서 더 진하게 남는 첫 문장이었다.
꿈에서 여자가 깨어나는 것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여보, 내가 설명할 게 있어 (p. 12)' 까지만 보면 니콜 키드먼 주연의 '내가 잠들기 전에'라는 스릴러 영화가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소설은 현실 스릴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당신이 꾼 건 꿈이 아니야. 업로드였어 (p. 12)' 업로드! 최근 SF 소설에서 각광받는 뇌업로드라는 소재를 기본설정으로 한 것이다. SF소설에서 업로드는 굉장히 미래적 실존문제를 건드린다. 예를들면 당신은 죽기전 기억을 업로드 하고 싶은가? 내지는 신체가 없는 업로드된 데이터적 존재는 실존인가 아닌가 하는 식의 문제... 하지만 이 소설에서 업로드는 이미 벌어진 현실에서 다른 각도에서의 실존문제를 건드린다. 예를들면 뇌를 업로드한 인간의 관점이 아닌 기억을 업로드 당한 AI의 관점에서 '나'라는 정체성에 대해 아이러니에 빠진달까. 하지만 이 소설은 SF판타지가 아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심리스릴러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