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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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미술 안내자 양정무의 미술관에는 없는 미술 이야기

몇년전에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던 에트루리아전을 보러 가기위해 사전준비 차원에서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너무 재밌게 잘 읽혀서 책을 읽는 내내 언젠가 6권인 이 시리즈를 완독하고 말리라 생각했었더랬다. 비록 그 시리즈는 여전히 읽고싶은 책 목록에 남아있는 상태이지만 저자의 쉬운 설명과 풍부한 자료는 여전히 흡족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벌거벗은 미술관>의 저자인 양정무 님이었다. 그러고보니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왜 우리나라엔 이런 책이 없나 아쉬워했던 것이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로 미술사를 읽었으면 됐을 것을 이렇게 뒤늦게 생각나다니;;;

여하튼 저자는 국내 미술사 분야에서 대표적인 학자라고 볼 수 있다. 미술의 역사를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중서 집필과 강연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존경스러운 분이다. 무엇보다 잰체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미술과 미술사 이야기를 풀어내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책은 늘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코로나시대에 생각해봤음직한 역사속 주제들을 흥미로운 미술사이야기로 엮어낸 책이다. 이렇게 장기화될 줄 몰랐던 코로나시대에 살면서 고전이나 르네상스 그리고 박물관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하여 예상치 못했던 시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시도하게 해준달까.

클래식, 또는 고전이라는 용어 속에는 그리스·로마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보는 인식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로마의 것은 최고'이며, 이것을 뒤집어 '최고의 것은 그리스·로마에서 왔다'라는 인식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p. 20) 고전미술을 추종했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18,19세기까지만해도 이것들이 로마시대의 복제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20세기부터 미술사학이 고도화되면서 실증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략) 다시 말해 고전미술의 실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전미술을 향한 신화와 예찬이 더 극적으로 이뤄졌을지도 모릅니다. (p. 23) 고전기 조각의 정수로 알려진 작품들은 원래는 상당부분 색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p. 24) 그리스 조각에 대한 관심이 샘솟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이 원래 채색되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이런 이유로 르네상스 이후 '조각 하면 순백색 대리석 조각'이라는 공식이 생겼던 겁니다. 그러다 18세기에 이르면 순백색 대리석 조각을 이상적인 피부의 재현으로 미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나오게 됩니다. (p. 25) 18세기 당시 고전미술에 대한 예찬은 대단했습니다. (중략) 어떤 집단이 성공하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우리의 조상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을까?' 유럽인들의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빙켈만 같은 이는 그들의 뿌리가 그리스에 있다고 말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8)

서양미술에서 고전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시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시대를 유럽의 뿌리로 인식하고 고전이라 부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좀더 파고들어가보면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상태에서 자리잡은 개념이었다. 그 착각과 허술함은 이미 밝혀진게 상당히 많지만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서양의 예찬은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는 2천년 전에 쌓아놓은 명성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 문명의 종주국으로 큰소리치고 있고, 그것이 유럽의 현실 정치에서 어느정도 힘을 발휘(p. 38)' 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문명의 기원을 쫓아올라가면 그리스·로마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터키(수메르) 등 유럽인들이 동방의 문명이라 부르는 문명으로 가야하는데 자신들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기 싫어서 유럽의 뿌리는 그저 그리스·로마 시대다 라고 더이상 캐지 않고 덮어놓고 있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렇게 그냥 덮어놓음으로써 18세기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미술사와 미학이라는 학문과 동시에 생겨난 인종(p. 43)이라는 개념에 대한 편견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게 아닐까. 가장 고리타분할 수 있는 '기원'이라는 문제가 시대를 거듭하며 점점더 첨예해진다는 것또한 인간문명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학의 문제는 미학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곧 뛰어난 것, 우수한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까지 자라나게 된 겁니다. (p. 48)'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미술사의 미적 변화는 역사에 던지는 시사점이 의외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유럽의 고전시대인 고대그리스사회를 '육체의 파시즘 사회(p. 63)' 라고 한 저자의 표현은 신선하고도 울림이 컸다.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누드 미술은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신의 옷'인 셈(p. 66)' 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미에 관해서 열린 생각을 존중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미술도 열린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p. 75)' 라는 저자의 의견은 고전미술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해준다. 고전미술이 왠지 고급지고 멋지고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생각해왔다면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다! (책의 띠지 문구 中)' 라는 발칙한 문장에 함께 미소지어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ㅎㅎㅎ

유럽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로마 시대엔 희비극 공연이 유명했다. 배우들이 쓰는 가면엔 인간의 감정이 크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곤 했다. 하지만 플라톤 이후 조각상들은 무표정해지고 중세의 초상화들에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미술사에서 '문명의 표정'을 읽어내려 한다.

특정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초상을 굉장히 견제하던 시기였기에 이 시기의 무표정은 누구도 아니고, 누구도 될 수 없는 극도로 이상화된 얼굴을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p. 90)

유명세를 따지자면 <모나리자>를 이길 수 없겠지만, 15~16세기 유럽 전역에 등장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사업가였던 크렐의 표정도 르네상스를 대표할 자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p. 111)

볼테르는 회화, 조각, 판화 등 어떤 매체에서도 항상 웃고 있습니다. 볼테르만큼 회화나 조각으로 많이 만들어진 철학자는 드물 것입니다. (p. 134)

무표정하고 근엄했던 표정들 사이에 상인 계층의 개성적인 얼굴이 등장하더니 철학자의 미소까지 미술은 늘 시대의 인물을 그려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초상화는 어떤 표정일까? 이시대의 표정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일단 책의 표지 먼저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책은 겉표지를 벗겨내면 앞뒤 페이지를 초상화로 채우고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4가지 주제 중에서 표정에 관련된 두 그림을 표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많은 초상화들 중 이 두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책의 띠지에 쓰여있는 표현을 빌려말하자면, 저자는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고 초상화에 웃는 얼굴이 드문 이유를 설명한 다음의 반전의 서사는 박물관에서 풀어낸다.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박물관이 사실은 얼마나 잔혹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인지.

누가 고전을 중심으로 세기의 명작을 차지하는가는 곧 누가 유럽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하는가의 문제, 즉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발휘할 정통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벌인 이같은 약탈극은 고전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자유라는 혁명의 이념이 약탈의 정당한 근거로 둔갑한 걸 보면 조금 무시무시한 반전이라는 느낌도 들죠. (p. 155) 루브르 이전에 세워진 유럽의 초기 미술관들도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어느정도 예견했지만, 지배층이 베푸는 시혜까 아니라 시민들의 주조하에 확실하고 극적인 변화로 이끌어낸 곳이 바로 루브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p. 161) 유럽 각지에 박물관과 미술관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p. 164)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관 박물관은 나폴레옹의 약탈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제국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 그것이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영국박물관은 나폴레옹과 같은 리더의 대대적 약탈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소소하게 모여지는 재미가 있었다. 영국박물관은 슬론의 기증으로 시작되어 처음엔 자연사박물관 같았으나 윌리엄 해밀턴이 이탈리아에서 모은 소장품을 기증하면서 업그레이드 되었다가 엘긴백작이라 불리는 토머스 브루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엘긴 마블로 채워진 영국박물관도 결국은 약탈품 전시관인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사이어티 오브 딜레탕티' 라는 클럽의 에피소드가 재미있었다. 18세기 영국은 그야말로 클럽의 시대였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에드워드 기번도 사무엘 존슨의 클럽 멤버였는데 이 클럽의 창립멤버인 조슈아 레이놀즈의 '소사이어티 오브 딜레탕티'라는 그림(p. 170)을 보고있자니 그들의 사치와 지적 여흥이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역사적으로 내내 충돌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박물관에서도 서로를 경쟁하듯 의식하는데 '프랑스가 굉장히 대담한 방식을 통해 박물관의 변혁을 건축적으로 추구해다면, 영국은 원래 있던 것들을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00)' 에서 확인되듯이 영국의 귀족문화가 여전한 것이 또한번 엿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나 있는지 아시나요? 놀라지 마세요. 영화관보다 훨씬 많답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위치한 영화관은 483개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총 1124개가 있습니다. 이중 박물관이 873개, 미술관이 251개고요. 어마어마하죠? (p. 203)

정말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광복이후 시작된 미술관 박물관이 저렇게나 많다니. 빠르게 세워진 만큼 부실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일단 초석은 잘 깔아놓은게 아닐까 싶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을 위한 발전의 장소'인 박물관으로서 국내의 박물관들이 잘 성장하길 응원해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카 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온 날인데,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는 제가 경구처럼 되뇌는 소중한 문장입니다. (중략) 과거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시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역사학자의 관심사 중 절반은 항상 현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p. 209)

E.H.카 의 저 문장은 정말 유명한 문장이고 나도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다.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읽는 것이지만 현재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자꾸 과거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이유중엔 이러한 역사적 의미도 숨어 있는게 아닐까.

우리가 말하는 르네상스는 흑사병의 병마가 가장 맹위를 떨치던 대역병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르네상스란 흑사병이라는 가공할 공포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낸 도전의 역사였던 거죠. 흑사병은 서양미술의 흐름을 크게 뒤바꿔놓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p. 226) 흑사병은 미술의 대중화에 상당부분 공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 234) 역사적으로 흑사병은 르네상스로 이어진 반면 스페인독감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두 갈림길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에 투영해본다면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장밋빛 세계의 가능성과,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대재앙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좌표 속에서 어떤 길로 들어서게 될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문명은 또다시 역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p. 258)

코로나19 시대가 길어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들 이야기한다. 지금은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몇년 후 우리는 코로나19 시대가 바꿔놓은 것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니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남기는 여운이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예술에 대해 '예술은 크게 보면 완벽과는 거리가 먼 오류의 세계(p. 261)' 라고 저자는 예술에 대한 벽을 낮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보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완벽함과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민과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온다.(p. 264)' 라며 저자는 미술에서 인간성을 찾는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미술의 관점에서 풀어보려(p. 270)' 했다며 미술을 통해 본 인간의 모습은 '인간은 방황하지만 그것에 도전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자(p. 271)' 라고 답하며 미술을 더욱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미술의 역사는 도리어 실패와 미완성으로 이루어진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기 때문(p. 271)' 이라고 그렇게 '이 책은 미술과 인간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문제로 나아가려 했다.(p. 274)' 고 저자는 책을 마무리한다. '이같은 저의 도전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p. 274)' 라는 저자의 겸손에 미소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무거운 주제일수도 있지만 가볍고 신선하게 읽히는 책이었기에 저자의 도전이 앞으로도 계속되어 또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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