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트리플 4
임국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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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너머 다른 시공간에서 반짝이고 있을,

지난 시절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보내는 시그널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가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도록 한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4권이다. 따라서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앞선 시리즈가 그러했듯이 책은 작고 얇아서 단숨에 읽히는 단편소설집이다. 그리고 임국영 이라는 새로운 젊은 작가를 알게 해준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세상 돌아가는 실정을 알 수 없었던 아이들로서는 어수선한 시대상은 관심사 밖이었다. IMF보다는 세일러 문으로 기억되는 바야흐로 대만화영화의 시대였다. 공중파3사에서 황금 시간대 직전인 대략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경쟁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 (p. 11) 아이들은 열광하며 미디어의 시혜를 기꺼이 만끽했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어제저녁에 본 만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오프닝 송을 합창했다. (p. 12) 만경과 수진은 함께 TV를 시청했다. 불만은 없었다. 컴퓨터는 만경과 수진에게 허락된 몫이 아니었다. 만경과 수진도 동갑이었고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p. 13)

투니버스 채널이 생겼을 무렵 나는 이미 티비만화채널을 졸업한 나이였던지라 작가가 말하는 만화들과 내가 아는 만화들은 너무나 달랐다. 이렇게 소설에서 격세지감을 강하게 느낀 것도 처음이지 싶다. 여하튼, 만경에게는 형이 있었고 수진에게는 오빠가 있었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지라 그 동생들도 한 집에서 놀게 될 때가 많았다. 아니 놀았다라기 보다는 그저 같은 공간에 있었다. 티비 만화채널을 보면서.

만경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며 친구 하나 없는 왜소한 소년이었고 수진은 훤칠한 체구에 활발했고 거친 소녀였다. '만경에게 수진은 '주인공'이었다. 만화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다른 인물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프레임과 작화로 생동하는 캐릭터처럼 보였다. (p. 16)' 그러다 만경이 만화책을 빌려주게 되고 대화의 물꼬가 트이며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둘 사이엔 지수라는 친구도 늘 함께였다. 세 사람은 언제나 붙어다녔고 만화동아리도 함께 했으며 수시로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날 만경은 봐서는 안될 장면을 보고 말았다.

네가? 어떻게 내게? (p. 37)

"용서 안 할 거야. 절대 못해" (p. 39)

자신이 수진을 좋아했던가, 아니다. 수진은? 그럴리 없다. 왜 사람들은 나와 수진이 붙어다니면 사귀는 거냐고 물었을까. 수진이란 아니는 도대체 누구였고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만경은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들에 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만하면 됐어. 사랑과 정의는 이제 지긋지긋해. (p. 43)

수진은 여전히 만화를 즐겨 봤다. (p. 44) 눈동자가 크고 만지면 깨질 것처럼 여리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아이였다. 수진의 과거와 추억은 대체로 만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략) 수진은 어린 시절 늘 붙어 다니던 그 이상한 친구가 앞으로도 떠오를 것 같다고 예감했다. (p. 46)

만경에게 수진은 만화속 '주인공' 같은 아이였고, 수진에게 만경은 '만화에나 나올 법한 아이' 였다. 둘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 시절 함께 본 만화가 그들을 키운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당장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 같았던 그 이상한 시대에 왜들 그렇게 만화를 많이 보여줬을까. 혹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p. 45)'

<코인 노래방에서>

코인노래방을 나서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학창 시절에 즐겨 듣던 음악에 관해 기억을 되짚었다. 연인의 음악 취향은 대중적인 편이었다. 그 시절 그 나이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고 불렀을 법한 뮤지션과 노래를 주로 입에 올렸다. (중략) 노래를 얘기하다 진즉 흥미를 잃은 내 얼굴을 포착했다. "그러니까 록발라드가 좋단 거지? 야다나 플라워 아니면 더 크로스?" 연인의 장난기가 다시 발동할 기세였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는 문화사대주의자였어" "무슨 소리야?" "팝을 좋아했거든" "아, 허세남" (p. 53)

평범한 하루였다. 연인과 말장난을 치고 투닥거리며 서로의 취향을 우스워하고 코인노래방에서 실컷 춤추며 노래불렀던 그냥 여느날과 비슷했던 평범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기 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무엇이 다를까,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발설 자체가 목적인 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이 아니면 평생 털어놓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던 비밀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근데 내가 걜 좋아했어" (p. 55)

동성애가 문학에서도 금지된 소재였던 시절이 있었다. 봇물터지듯 터진 동성애 작품들이 유행처럼 넘쳐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새 지금은 굳이 동성애 소설이라고 구분짓지 않고 구분할수도 없는 사랑이야기가 소설 들에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그시절 동성 친구를 사랑한 이야기는 어떤 코드로 읽어야 할까...

' 그날 이후로 그 믿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 이상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번외의 카테고리에 속한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내 꿈은 '정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남들과 비슷한 자세로 걷고 적당한 템포로 말하고 똑바르게 발음하고 무리 없이 타인과 눈을 맞춘 채 소통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나는 이미 심리적인 소수자였고 약자였다. 그 이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p. 67)'

<추억은 보글보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락실은 간판도 없었고 허름했지만 단층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할 만큼 공간이 넓었다. 까만색 필름이 붙은 유리문 앞에 서면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복잡한 소음이 들렸다. 그 문을 당겨 열고 문턱을 넘는 순간 내가 살던 공간과 전혀 다른 세계에 진입한 듯한 감각이 훅 끼쳤다. 비좁고 어두운 그 공간에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담배 향이 감돌았다. 빈틈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빼곡한 전자기기와 사람이 내는 열기가 몸을 둘러싸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p. 86)

작가와 내가 세대차이가 많이 나는 줄 알았는데 오락실 분위기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락실은 정말 딱 저랬다. 까만색 필름이 붙은 유리문 텁텁하고 퀴퀴한 공기 빼곡한 전자기기의 소음... 그런 분위기 때문에 오락실은 내게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었고 그래서 혼자 가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도진과 원경은 오락실에서 만난 절친 이었다. 그 둘은 '서로에게 마지막 남은 유년 시절 친구였다. (p. 83)' 특히 도진에게 그냥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은 원경 뿐이었다.

게임기는 어째서 두 플레이어가 나란히 앉아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맞수와 어깨를 붙이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은 두 사람의 복서가 링 위에 올라서 서로를 마주하는 이유와 같았다. 나는 지는 걸 참지 못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누가 날 게임으로 무시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그랬기 때문에 도진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p. 123)

도진은 원경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나이를 먹고 환경과 여건이 바뀌면 가깝게 교류하는 인물과 집단이 대체되기 마련이라고 여긴 원경과 달리 도진에겐 오직 원경 뿐이었다. 원경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도진에게 원경은 기어이 화를 내고 말았다.

'어떤 기억은 내가 받은 상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준 모욕으로 이루어져 평생 따라다닌다. 삶의 변곡점에서,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처지가 비루해지는 모든 순간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인생이 그때부터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비약이 자꾸 돋아났다. 그래서 원경이 앞에 있으면 옛날 얘길 꺼냈다. (p. 119)'

트리플 시리즈는 책의 말미에 작가의 후기 처럼 읽히는 작가의 에세이 한 편을 실어놓았다.

이 소설집은 나의 첫 책이다. 이곳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오롯이 단 하나의 책을 위해 쓰인, 말하자면 당신에게 보내는 열렬한 신호다. 감사함을 담아 별을 향해 노래를 쏘아 보내는 심정으로 내가 정한 사람에게, 바라는 때와 방식으로 내보이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적어보았다. 그뿐이다. 정말이지 그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주 너머 다른 시공간에서 반짝이고 있을 당신에게 미약한 나의 시그널이 닿았다면 반갑게 맞아주길 부탁드린다. (p. 137~138)

티비가 세상에 등장하고 만화라는 것이 방영되기 시작한 이후로 유년시절에 강한 애착을 품었던 애니메이션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저마다의 만화속 세상을 꿈꾸었고 만화속에서 자라났으나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세상은 우주 저 멀고 먼 별보다 더 아득히 멀어져 있곤 한다. 그 시절의 시그널을 다시 보내준 작가에게 박수를, 그리고 그 신호를 감지한 사람들은 이 '투니버스'에 탑승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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