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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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대, 두 인종, 두 가족

한 발의 총성으로 깨어나는 도시의 암울한 역사

증오에 의해 잿더미로 변한 아메리칸 드림

폭력의 근저에 흐르는 인종적 딜레마의 본질을 꿰뚫는 책

세상이 살만해졌다고 느끼게 하는 책들이 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시간들이 내가 겪지 않은 시간들이라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는 책들이 있다.

누군가는 옛날이 좋았다고 그리워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이 더 살기 좋다고 그리고 앞으로 더 살기 좋아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작품들이 과거에 비해 자주 눈에 띈다. 각종 차별에 대한 글들이 예전에 비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무시당하지 않고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인종구성이 다양하지 않은 나라에 살면서 잘 몰랐던 인종차별에 대해 미국사회에서 한인사회와 흑인사회의 갈등을 체감하게 해줌으로써 문제적 시야를 넓혀주는 이 소설은 그런 '발전'에 분명 큰 보탬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가 취소댔대"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무서우냐, 흑인이 열 명만 모이면 갱단인 줄 아느냐고"

"우린 표가 잇어요. 돈도 다 냈다니까요"

"그래 봤자야"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p. 20)

1991년 3월 이었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을 뿐인데 상영이 갑자기 취소됐다. 로드니 킹 구타 사건으로 흑인사회에서 백인경찰에 대한 소문이 흉흉하던 때였다. 그 뒤로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크게 변한건 없었다. 2019년6월 그레이스는 알폰소 쿠리얼 추모 집회에서 언니 미리엄을 만났다. 알폰소는 백인 경찰의 총에 죽은 십대 흑인 소년이었다.

레이는 고등학생 시절 이후로 제대로 된 일을 한 적 없었다. 숀도 매니가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배링 크로스 일원들과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말썽을 부리며 돈이 필요하면 마약을 나르고 불법을 저질렀다. 올바로 살고 싶어져도 일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마지막에 레이는 대릴에게 사준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은행을 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p. 68)

레이는 십년만에 감옥에서 나왔다. 사촌인 숀에게 그는 친형이나 다름없었다. 숀은 이삿짐센터 일을 하며 적게 벌더라도 합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레이의 가족을 보살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친누나 에이바는 1991년 열여섯의 나이에 누군가의 총으로 살해당했다.

미리엄이 이본과 말을 안 한 이후로, 아마 잘은 모르지만 그한참 전부터도 흑인, 인종, 인종차별을 조금이라도 암시하면 그레이스의 집은 긴장했다. 다른 가족들도 그러는지 궁금했다. 친구들과 그 부모도 섹스 이야기를 피하듯이 이 화제를 피하는지. (p. 87)

미리엄이 부모와 인연을 끊고 집을 나간 이유를 그레이스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 폴은 무뚝뚝했지만 성실했고 어머니 이본은 딸들에게 희생적이었다. 각별한 자매사이였지만 그레이스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일하는 약국문을 닫고 여느날처럼 퇴근하려던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쏜 총에 어머니가 쓰러지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가족들이 그동안 감춰왔던 비밀에 직면하게 된다.

"에이바 매슈스는 사우스센트럴에 사는 열여섯 살 흑인 여자애였어. 폭도들이 한국인을 공격한 건 그 애 때문이기도 했어" 미리엄은 끊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어느 날, 그 애가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그 애가 우유를 한 병 훔쳤다고 했어. 싸움이 벌어졌고, 주인이 그 애 뒤통수에 총을 쐈어. 경찰이 와선 그 애가 2달러를 쥐고 있는 걸 발견했고" (중략) "주인이 한국인 아저씨였어?" 미리엄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동생을 봤다. "한국인 여자였어" (p. 124)

이본 박이 갑작스런 총격사건으로 사경을 헤맬때 28년 전의 흑인소녀피살 사건이 수면위에 떠올랐다. 누가 한국인 중년 여성을 저격했는가? 왜?

출소한지 얼마 안된 레이와 사촌 숀은 소식을 듣고 술잔을 부딪혔다. 하지만 숀은 기쁘지 않았다.

에이바는 성인도 천사도 아니었다. 나쁜 일들을 겪었고, 그런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좋은 일들도 겪었지만, 에이바는 당연히 받아들였다. 욕도 하고 말대꾸도 했다. 맞서 싸우기도 했다. 사람들 말과 달리, 에이바는 물건도 훔쳤다. (p. 169)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았는데 누가 못마땅히 여긴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그건 예전, 교회에 다니고, 가게를 운영하고, 가족을 양육하며, 잘 가꾼 정원 같은 삶을 사는 조용하고 근면한 한국인 부부의 2세대 딸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녀는 모든 걸 알아 버렸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고, 비가 내리고 물이 불어나자 세상의 냉혹한 홍수에 휩쓸려 버린 것을. (p. 193)

숀은 가족과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흑인사회는 술렁거렸다. 그레이스는 가족의 화목과 평안을 원했지만 비밀이었던 진실은 가족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구부러지다 보면, 넌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더 나쁜 사람 (p. 200)' 이라고 말하는 미리엄도 '법정을 가득 채운 한국인들 (p. 222)' '사람들에겐 항상 배상할 수가 없거든. 신께 사죄하는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p. 226)' 라는 아버지 폴도 그레이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레이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경찰에게 구속되었다. 그레이스는 숀을 찾아가기로 한다.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속이 좁고 결점을 가진 사람들, 죄를 지으면서 남을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이니 한 몸이 되어 서로를 껴안았다. 부모가 여기 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인자한 표정을 보니 이 힘든 한 주를 겪은 그레이스에게는 그들의 선의가 힘이 됐고 가슴이 뭉클했다. 용서받은 느낌이었다. (p. 286)

어렸을때 다니다 말던 교회에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갔을때 그레이스는 부모님이 왜그토록 교회에 열심히 나갔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한인사회에도 교회가 있고 흑인사회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신은 하나임에도 같아 보이지 않았다.

"LA경찰이 우리 이야기를 고른 거다. 큰 기자회견을 소집했지. 정의니 뭐니 연설을 하고. 네 엄마를 일급 살인죄로 기소하겠다고 약속했어. 흑인 애가 죽을 때마다 그랬을 거 같아?" (p. 308)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이 있은 지 2주도 안 되어서 항상 뉴스에서 얻어터지고 있었으니까. 날마다 경찰 넷이 무기도 없는 흑인을 때리는 영상이 나왔거든. 2주 동안 매일. 그때 네 엄마가 그앨 쏜 거야" (중략) "영웅이 되려고 네 엄마를 악당으로 만든 거다" (p. 309)

이용당했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될 순 없다. 하지만 겉모습에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배후적 의미는 다가가지지 않았다. 그레이스와 숀은 각자의 위치에서 점점 더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죽었다. 흑인사회에서 레이를 석방시키기 위한 집회규모를 키우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범이 누군지 숀은 알아버렸고 그레이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폭동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건 아뭣도 아니에요. 당신들이 아무 노력도 없이 위로받으려고 하는 행동이죠. 뭔가 바꾸고 싶다면, 우린 놔두고 정말로 '뭔가' 해 봐요" (p. 394)

1991년 3월 15세의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주스를 사러 엠파이어 주류마켓 엔드델리에 가서 주스값을 내려고 했을 때, 두순자라는 이름의 가게 주인이 주스를 훔쳐 간다고 하더니 시비가 붙었고 두순자는 총을 꺼내 소녀를 쏘았다. 소녀는 왼손에 2달러를 쥔 채 사망했고 당시 차별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팽배했던 흑인사회는 LA폭동을 일으켰을때 한인마켓을 집중 타격했다. 이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생생하게 읽히는 동시에 인물들의 내면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두 시대, 두 인종, 두 가족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시작됐지만 그들이 서로 멱살잡고 싸울때 뒤에서 팔짱끼고 웃는 이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분노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밀도높은 공감으로 적시하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제대로 향해가지 못할때 누가 대가를 치루게 될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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