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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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이래로 가장 탁월한 업적

인간이 환경을 생각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만큼 출간된지 60여년 밖에 안된 <침묵의 봄>은 (환경학의) 최고의 고전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침묵의 봄>은 여전히 읽히면서 그 어떤 환경학 책보다 큰 영향력을 지금도 발휘하고 있다. 나도 이 오래전 환경에 대한 책을 몇년전에서야 읽으면서 여전한 무지에 놀라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마냥 옳다고만 여겨지던 '환경주의가 지구를 망친다' 니 '지구를 위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니 이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두툼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침묵의 봄>이래로 가장 탁월한 업적'이라는 문구에 동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난 30여 년을 환경 운동가로서 살아왔다. 그중 20여 년은 기후 변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글을 쓰는 데 바쳤다. 내 목표는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편적 풍요를 누리게끔 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 (중략) 환경과 기후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중 상당수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야 한다. 환경 문제를 과장하고, 잘못된 경고를 남발하고,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조장하는 이들은 긍정적이고 휴머니즘적이며, 이성적인 환경주의의 적이다. 그런 주장에 신물이 났기에 나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실, 주장, 논증은 현재 이용 가능한 최고의 과학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p. 28)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윤리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혹자는 그것을 주류 윤리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적 형태건 종교적 형태건 휴머니즘을 옹호한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이 곧잘 취하는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p. 29)

저자는 환경운동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기에 환경문제에 관한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류를 반박한다. 아주 용감하게. 읽는 내내 저자의 직설에 감복했고 저자가 제시하는 증거들에 감탄하며 왜 그동안 이런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웠다. 환경문제는 정치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환경이 파괴되었다는 식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그 반대입장을 취한다. 산업이 발달해야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관계를 감추고 싶어하는 자들에 의해 우리의 눈에는 가리개가 덧씌져 있었음을 책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기후변화로 멸망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가 사실이며 인간이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호헨카머 선언'에 실명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동의한 내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연재해 자체가 심각해져서가 아니라, 인력과 자원이 유익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용되어서 자연재해로 인한 비용이 증가한다는 데도 동의한 것이다. (p. 55)

기후 변화가 수십억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의 어떤 보고서에도 그와 같은 종말론적인 이야기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p. 58)

'기후 양치기'들이 있다. 환경 문제를 떠들며 관심이 쏠리는 것을 즐기는 양치기 소년 같은 이들이다. (p. 69)

상식처럼 여겨지는 기후나 환경관련 뉴스들의 이면은 따지고 들어갈수록 과학적 토대가 부족했음을 오히려 왜곡해왔음을 저자는 꼼꼼하게 지적한다. '기후 양치기'들이 주로 하는 주장들을 살펴보자.

'지구의 허파가 불타고 있다' 라고 하지만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가 아닐 뿐더러 아마존 열대우림은 위기에 처해 있지 않고 건재했다. 저자는 아마존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에 분노를 터뜨린다. '삼림 파괴와 화재 증가는 근본적으로 경제 성장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에 정치인이 부응한 결과다.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 부족 탓이 아니다. (p. 97)' 라며 '브라질은 인구 중 4분의 1이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다. (p. 98)' 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역사를 돌아볼 것을 주장한다. '21세기 환경주의자들은 '야생'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과거에는 야생이란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략)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숲을 없애는 일을 악이 아니라 선으로 여겼다. (중략) 숲은 야생의 땅과 죄악이 꿈틀대는 곳이었다. 농장과 목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개간하는 것은 신의 과업을 이행하는 일이었다. (p. 101)' 그리고 이렇게 농장과 목장을 만들어 부를 쌓은 유럽은 산업의 발달로 지금의 현대문명을 이루었다. 후발주자인 저개발국가들이 뒤를 이어가는 발달의 과정을 이제 환경문제로 바꿔서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정말 반개발주의, 그러니까 반자본주의에요. 농업 비즈니스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죠. 최소한 브라질 농업만큼은 증오하는 게 확실합니다. 같은 기준을 프랑스나 독일에 적용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p. 105)' 자신들이 잘먹고 잘살게 된 상태에서 여전히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생존의 문제를 환경때문에 막아서는 것, 그것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억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린피스의 환경 운동은 값싼 브라질산 농산물을 유럽 시장에서 몰아내고픈 유럽 농부들의 목적의식과 잘 맞아떨어졌다. (p. 107)' 저자가 제기하는 의문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존 화재 연기를 연막탄 삼아 보호무역주의를 휘두르려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p. 109)' 이러한 내용이 놀라운가?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언론의 관심이 플라스틱에만 쏠리는 것은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기후 변화도 마찬가지다. 플라스틱이 쓰레기나 기후 변화보다 훨씬 더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요인들이 해양 생물의 생명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남획은 '기후 변화를 제외한 영역에서 어류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는 지적하고 있다. (p. 139)

저자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 '어떤 이들은 쓰레기 문제보다 더 속상한 일이 훨씬 많다. (p. 145)' 고 말한다. 역시 가난이 문제다. '가난한 나라는 우선순위기 다르다. (p. 149)'

'호모사피엔스는 여섯 번째 멸종의 원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p. 153)' 라는 말은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멸종동물 보다 '환경난민' 이 아닐까? 동물과 사람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따지자는 게 아니다. 상생의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왜 자꾸 한쪽만 선택하냐는 것이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내쫒고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에너지 생산을 집중화, 고도화하는 것은 지구 행성의 더 많은 부분을 야생 동물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수력 발전 댐과 모든 화석 연료 발전소 그리고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합쳐도 얼어붙은 땅을 제외한 전체 면적의 0.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에너지 생산을 위한 토지 사용 면적은 식량 생산을 위한 토지 사용 면적의 고작 200분의 1에 불과하다. (p. 216) 그린피스나 멸종저항의 주장은 틀렸다. 가난한 나라에 에너지 밀도 높은 공장이 들어서는 것은 숲을 위협하지 않는다. 공장이 떠나 버릴 때 숲은 진짜 위기에 빠진다. (p. 220)

환경문제를 세계적으로 보는 단체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보호하고자 하는 곳은 자국이 아니다.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의 자연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환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고래멸종을 막았다며 가난한 사람들과 무관한 환경운동의 성과들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명쾌하게 말한다. '고래를 구한 것은 국제조약이 아니라 식물성 기름이었다. 국제포경위원회가 1982년 포경 행위를 금지했을 때 이미 포경 산업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p. 240)' 라고 '석유가 고래를 춤추게 한다' 고.

탄수화물 섭취를 옹호하고 지방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은 환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했다. 돼지를 더 살찌우는 대신 덜 살찌우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기르도록 분위기를 몰아갔기 때문이다. 가축을 기르는 이들은 곡물 먹이를 더 많이 먹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더 많은 땅이 필요해진다는 말과 같았다. 사람들이 저지방 식단을 택해 비효율적으로 가축을 기르면 결국 필요한 땅은 더 넓어진다. 고기에 대해 사람들이 걱정하는 내용 중 상당수는 틀렸다. (p. 291)

저자는 채식주의자였지만 지금은 고기를 먹는 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라면 사람들이 고기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가축을 길러 제공하는 일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p. 293)' 고 말한다. 가축의 농장식 사육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소리다. 하지만 가축과 야생동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사람이 해야할 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은 분명해 보였다. 가축사육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놀라웠지만 더 큰 충격은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찬성근거들에서 왔다. 너무도... 옳았다. 저자는 원자력 에너지가 지구를 지킬 수 있다며 반핵운동뒤에 숨어있던 것들을 드러낸다. 결국 자본가들의 이권다툼이었다.

태양광 또는 풍력 시설이 대대적으로 들어선다면 그 불안정성을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가스 발전소가 세워져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가스 발전소는 상대적으로 쉽게 켜고 끌 수 있어 날씨 변화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366) 독일만큼 신재생 에너지에 전폭적인 투자를 한 나라도 없다. 지난 20년간 독일은 이른바 '에너지 전환'에 총력을 기울렸다. (p. 371) 그러나 2019년 세계 최대 컨설팅 그룹 매킨지는 독일의 에너지 전환이 경제와 에너지 수급에 심대한 위협을 가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기후 변화 대응, 공급 안정, 경제적 효율 이라는 에너지 산업의 세 꼭짓점 모두에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p. 372)

'도시는 응축된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늘날 인류는 건물, 공장, 도시에 공급하는 전력보다 에너지 밀도가 1000배 높은 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너지 밀도가 낮은 신재생 에너지의 사용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 보호에만 해로운 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p. 383)' 라며 저자는 신재생 에너지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저자의 말마따다 신재생 에너지가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다. 신재생에너지 또는 친환경 에너지 라는 것은 일종의 유토피아 같은 거였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늘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적으로 신재생 에너지와 친환경 에너지에 집착하고 있는가? 역시 또 결국 자본가들의 이익 문제였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그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환경주의자들과 환경운동 단체들의 민낯이었다.

진실은 훨씬 복잡하고 추잡하다. (p. 422)

녹색 경기 부양책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은 억만장자들이었다. (p. 436)

늘 그랬듯이 '힘 있는 자들이 가장 좋은 해결책에 반대'했다. '부유한 나라의 환경주의자들이 콩고 같은 나라의 가난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책임은 있다.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 사람들이 산업화와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p. 449)' 라는 저자의 말에 쉽게 공감이 안 갈수도 있다. 서양사람들이 아프리카나 빈민국들에 이런저런 기부를 엄청나게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뉴스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일부러 헛돈을 쓰고 있는 셈이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안 해주고 필요없는 것만 퍼붇고는 생색만 엄청 낸다고나 할까. 맬서스의 인구이론도 틀렸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기근은 식량 생산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인 것이다. (p. 477)' 기근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 때문이 아니었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대부분 멜서스주의자들이었다.

세계 인구 증가율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맬서스주의자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구 과잉과 자원 고갈 대신 기후 변화를 빌미로 종말론 공포 몰이를 벌여 나간 것이다. (p. 481) 얼마나 많은 NGO들이 개발도상국의 관개 시설 확충 프로젝트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물밑에서 압력을 넣었습니까. 농업 현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되려 할 때마다 '그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고 환경 을 파괴한다'라며 반대했던 게 누구인가요. (p. 484) 하지만 경제 성장이야말로 환경 보호다. (p. 489) 나는 되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상대로 에너지 실험을 하는 현실에 대한 말씀이신 거죠?" (p. 493)

극빈국에 대한 자본국들의 에너지 실험도 문제였지만 환경종말론의 종교화도 문제였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에는 바로 그런 종교적 성격이 짙게 깔려 있다. (p. 513)' '오늘날 환경주의는 일종의 세속 종교다 (p. 520)' 종말론은 묘한 매력이 있다. 2000년이 될때 종교가 있건 없건 세상의 종말에 대해 한번쯤은 심장이 떨려본적 있지 않은가?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사람들이 왜 환경종말론에 빠져드는지 설명한다. 만약 이렇게 종말론에 대한 회의감으로 책이 마무리되었다면 정말 우울한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직설적 용기만큼 따듯한 희망도 넘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많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현재의 긍정적인 흐름을 더욱 키워 나가야 한다. 저에너지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움직임으로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을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 (p. 538)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주의를 넘어서 휴머니즘을 다시 포용해야 한다. 인간의 특수성을 긍정하고 인류 문명과 인류 자체를 증오하는 맬서스주의와 환경종말론에 맞서야 한다. (p. 540) 우리는 환경종말론자들의 주장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대하고, 인류가 도달한 풍요의 과실을 여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공감과 연대의식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p. 541)

이 책은 환경주의에 대한 책이지만 환경주의자들을 무조건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의 숨겨진 비리들을 파헤쳤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환경주의자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 호도하는 것도 아니다. 팩트를 체크하고 팩트만 믿자는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제대로 알고 향해 가자는 말이다. '환경 휴머니즘의 핵심 가치를 밝힐 때가 됐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을 부정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야 한다. 특히 부유한 나라들은 지금 당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 채운 개발과 에너지생산의 제약이라는 족쇄를 풀어야 한다. (p. 541)' 라는 저자의 주장에 귀기울여주는 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대량 멸종을 메멘토 모리로 받아들이고 환경진보가 '불멸 프로젝트'가 되도록 이 책이 알려주는 진실이 널리 회자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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