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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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대신 지옥을 선택한 살인자와

세속의 정의를 믿는 아마추어 탐정

범죄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누아르

'악의 본성을 탐구한 걸작 미스터리' 라는 문구를 박은 띠지를 걸친 이 소설책은 꽤 두꺼운 편이다. 하지만 '미국추리작가협회선정 추리소설100선' 이나 '영국추리작가협회선정 추리소설 100선' 이라는 등의 문구에서 확인되는 '추리소설' 이라는 장르가 두께를 괘념치 않게 했다. 1938년작인 이 소설은 아마도 시간이 좀더 흐르면 추리소설고전100선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헤일은 브라이턴에 온 지 세 시간도 안 되어서 그들이 자기를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p. 9)

소설에서 첫문장이 아주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 첫문장 외엔 그닥 인상적인 첫문장을 느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첫문장의 의미를 잘 몰랐었다. 그러다 최근 읽은 고전읽는법에 대한 책을 통해 첫문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리고나서 읽은 첫 소설이 이 작품이었고, 따라서 이 소설의 첫문장은 지금까지 무심코 흘려보낸 첫문장들과 달리 세심하게 살펴보게 됐다.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안다는 것, 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에 모두 공통되는 사항이었다. 역시 첫문장은 중요한 거였구나!

인생의 행로에서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은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p. 53)

첫문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눈치챘던 한 남자는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 스치듯 만났던 한 여자가 그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캐내게 된다. 그리고 완벽한 살인을 했다고 여겼던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시작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난 옳고 그름을 믿어요" 그런 다음 만족과 여유가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던 얘기를 꺼냈다. "흥미진진할 거예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리고 인생의 일부가 될 거예요" (p. 90)

브라이턴 이라는 도시에서 신문사의 직원으로 일했던 헤일이라는 남자가 살해당했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인 아이다는 그의 죽음이 자연사라고 알리는 신문기사에서 이상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 이상함을 캐내기로 마음먹는다.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자신의 눈으로 봤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행동에 나선다.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그저 옳고 그름을 믿기 때문이고 그보다는 사실 '재미있을'것 같아서였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리라, 그는 생각했다. 내가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서 놈들이 나를... 그는 자기 부하를 죽인 기억을 떠올리며 좁은 어깨를 으쓱 뒤로 젖혔다. 이 형사 놈들은 자기들이 정말 똑똑한 줄 알지만 실은 그것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종자들이지. 그는 자신의 영광과 구름을 직접 끌며 나아가고 있었다. 미성년인 그의 주위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p. 138)

브라이턴 이라는 도시는 바닷가 휴양도시이지만 경마장이 있어서 갱단들이 활개치는 곳이기도 했다. 두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의 우두머리를 죽였고 그 우두머리는 자신의 자리를 열일곱살 소년에게 넘겼다. 소년의 무리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하들이 흔들릴수록 소년은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핑키라는 소년이자 갱단두목은 지옥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열여섯살 (소녀천사) 로즈를 만나게 된다.

선과 악은 같은 나라에서 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오랜 친구처럼 서로 붙어 다닉, 서로가 보완 관계라고 느끼며, 철제 침대 옆에서 서로 손을 어루만진다. (p. 261)

세상은 언제나 천당과 지옥이라는 두 개의 영원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피폐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와 로즈는 대조적인 두 영역에서 온 사람처럼 서로 맞서다가 크리스마스 때의 군대처럼 서로 친밀해졌다. (p. 288)

로즈는 자신에게 다가온 첫번째 남자인 핑키를 사랑한다. 핑키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핑키와 로즈는 서로에게서 같은 뿌리를 느꼈다. 그것은 가난한 동네일수도 있고 카톨릭 종교일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보자면 선과 악이다. 처음엔 그러한 대조가 뚜렷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선과 악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붙어다니는 오랜 친구같은 두 존재는 서로 어루만지면서 하나의 악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다에 의해서 선과 악은 다시 구분되려 했다.

경마장에서 도망칠 때 그는 두려웠었다. 고통이 두려웠으며,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는것-이었다. 그는 이미 지옥에 떨어졌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p. 376)

핑키가 기억하고 있는 카톨릭은 지옥과 고해성사와 구원이 뒤섞인 이미지였지만 유일하게 아는 카톨릭 라틴어로 '크레도 인 우눔 사타눔('나는 유일한 사탄을 믿노라'라는 뜻의 라틴어' 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핑키가 믿고 있는 것은 그저 '지옥'이었던 것 같다. 열일곱 인생이 사는 내내 지옥이었으므로 사실 핑키에게 지옥은 그닥 두렵지 않은 곳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변해요" 로즈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를 봐. 이제껏 조금도 변한 적이 없잖아? 그건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 같은 거야.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막대사탕 말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인 거야" 그녀가 로즈의 얼굴에 대고 구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에서 달콤한 와인 냄새가 났다.

"고해성사... 회개." 로즈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종교적인 것일 뿐이야" 여자가 말했다. "내 말 들어.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이야" (p. 409)

"나는 적어도 네가 모르는 것 하나를 알고 있어. '옳고 그름' 을 분간할 줄 알지. 그건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p. 411)

아이다는 로즈를 구하고 싶다. 로즈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싶다. 재미로 캐기 시작한 살해사건이 갱단과 얽혀 있음을 알았음에도 두렵지 않다. 아이다. 아이다는 로즈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에서 왜 이렇게 웃기면서 슬픈건지;;; 아마도 백여년 가까이 학교는 변한 것이 없어서인걸까... 이런;;;

"아마 계속해야 할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 어쩌면 늘 그런 식이지 않을까. 일단 시작을 하면, 하고 또 하고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거지" (p. 418)

핑키는 사건을 수습해갈수록 더 큰 사건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보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은 결국 핑키 뿐이었다.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코럽시오 옵티미 에스트 페시마('가장 좋은 것이 타락하면(부패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는 뜻의 라틴어)"

"네, 신부님?"

"무슨 말이냐면... 가톨릭 신자는 누구보다도 더 사악할 수 있다는 뜻이야. 아마 우린...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악마와 더 많이 접촉하는 것 같아. 하지만 우린 희망을 가져야 해" 신부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해"

"전 희망을 갖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건 분명 어떤 선한 것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사랑이었는데도요?"

"그래" (p. 508)

그레이엄 그린 (1904~1991) 은 소설가이자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영화비평가로도 활동했으며 그의 소설중 영화화한 작품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소설 <브라이턴 록>은 영화와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작품뒤에 실린 해제에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 <브라이턴 록>의 결말은 소설과 다르다고 한다. 1948년 영국영화검열위원회가 그린에게 뇌리에 잊히지 않을 만큼 잔인한 소설의 결말을 완화시켜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는데 그렇게 바뀐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라는 핑키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판을 보여주는 영화는 스릴러가 아닌 로맨스영화가 되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국 최고의 필름누아르의 하나로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이 소설이 보여주는 최고의 악은 핑키가 로즈에게 남긴 녹음판이다.

1938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갱단의 살인은 지금의 조폭영화속 살인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태어나면서부터 악인인것 같은 소년의 변화과정은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지만 지옥과 구원을 잊지 않는 핑키는 그래도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전개되는 스토리는 미스터리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궁금할게 없다. 하지만 오래된 막대사탕이 껍질에 눌러붙어 끈끈해졌어도 막상 빨아먹어보면 달콤하듯이 걸작이라고 불리게 된 이 작품만의 매력은 분명히 있었다. 그 매력덕분에 과한 수식어를 뛰어넘는 가볍고 재기발랄한 소설로 호로록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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