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불의 딸들
야 지야시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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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3백년,

가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시간과 세대 앞에 마주 선 14인의 이야기

소설의 첫문장이라고 하면 아마도 가장 유명할 '안나카레리나'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라는 문장 이후 가장 인상깊은 문장을 만났다.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첫 페이지에 인용된 이 속담은, 가족이라는 숲과 제각각의 구성원 나무들에 대한 이 아칸족 속담은 왠지모르게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빽빽한 숲도 들어가보면 성긴 나무들사이라는 것이 왠지 슬픈 서사를 예감하게 한다. 그리고 흔한 유행가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다...

가족은 숲과 같다. 숲 밖에서 보면 빽빽하고, 숲 안에 있으면 나무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를 가진 것이 보인다. - 아칸족 속담

그리고 다음장에 등장하는 간략한 가계도는 소설을 읽는 종종 다시 들춰보게 돼는 페이지 였다. 그렇게라도 그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그들의 관계를 눈으로라도 읽어줌으로써 그들의 헛헛함을 메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싶어지는 마음이 되어서...

마메-에피아-퀘이-제임스-아비나-아쿠아-야우-마조리

마메-에시 -네스 -코조 -H -윌리 -소니-마커스

한명한명의 인생이 가나출신 미국인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흑인노예시기부터 현재까지의 300여년을 통해 사라진듯 사라지지않은 그들의 '집'을 그려내고 있었다. 마메의 불 에서 시작되어 해변의 물로 돌아오는 이 책의 원제는 'HOMEGOING 귀환' 이다.

코비는 얌 일곱 그루를 잃었는데, 한 그루 한 그루의 손실이 가족을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맹렬히 타오르다가 달아난 불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자식들을 그리고 가문의 혈통이 이어지는 한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영원히 따라다니며 괴롭히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p. 15)

에피아 가 태어나던 날 집안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을 얌 일곱 그루를 사라지게 한 '불' 은 이후 7세대의 앞날을 예언하는 듯 소설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다.

에피아가 그 불에 저주받은 거예요. 영원히 여자가 되지 못하는 악마가 붙었다고요. 생각해 봐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여자의 징표들은 다 나타났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잖아요. 그래도 백인은 에피아와 결혼할 거에요. 그 사람은 에피아의 정체를 모르니까. (p. 33)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존재 자체로 어머니 바바에게 미움을 받고 자랐으나 '아름다운 에피아'라고 불리던 소녀는 케이프스코트 해변에 성을 짓고 노예무역을 하던 영국인에게 현지처로 팔려갔다.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며, 이것은 <희고> 저것은 <검다>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욕구를 에피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의 무게를 견뎠다.(p. 45)' 에피아는 자랄때도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속하지 못했는데 제임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케이프스코트의 성에서의 삶또한 에피아를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속하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낯선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여기도 저기도 그녀의 집이 아닌 것만 같은... '불안이 그를 살아 있게 만들었고 이제 그 불안은 에피아의 몫이 되었다. 그 불안은 그녀의 삶, 그녀가 낳은 자식의 삶에 양식이 될 터였다. (p. 51)'

에시는 널빤지 한 장도 머리에 이고 나르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완벽하게 둥근 코코넛을 절대 떨어뜨리지 않고 마치 제2의 머리처럼 흔들림 없이 이고 가는 것을 보아 왔다. '그렇게 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에시가 마메에게 물었을 때 마메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이든 꼭 배워야 할 처지가 되면 다 배울 수 있단다. 목숨을 하루 더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하늘을 나는 법도 배울 수 있어' (p. 65)

마메는 딸 에시를 귀하고 귀하게 길렀다. 에시는 부족의 관습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고 마메는 그것이 탐탁치 않았다. 부족들끼리의 전쟁이 잦았던 시절이라 마을엔 늘 타부족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노예가 있곤 했다. 에시가 하녀로 끌려온 노예를 함부로 하는 말을 했을 때 마메는 처음으로 에시에게 화를 냈다. '약한게 뭔지 알고 싶니? 약한 건 사람을 자기 소유물처럼 다루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 게 강한 거고. (p. 66)' 라며 '노예'로서의 삶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에시를 혼냈던 마메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딸이 노예의 삶을 살게 될 줄은.... 그것도 멀고먼 아메리카땅까지 끌려가서...

무역이 너무 많이 증가하고 노예를 모으는 방법들이 너무 무모해져서 많은 부족이 아이들 얼굴에 표식을 해 식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노예로 가장 많이 잡히는 북쪽 사람들은 팔아넘길 수 없을 정도로 흉한 몰골을 만들기 위해 얼굴에 흉터가 스무개 이상씩 되기도 했다. 퀘이의 마을 전초 기지에 들어오는 노예들은 대부분 부족 전쟁의 포로들이었고, 가족들이 팔아넘긴 경우도 소수 있었다. (p. 104) 그들은 거기서, 숲 지대에서 그렇게 살았다. 먹거나 먹히면서, 포획하거나 포획되면서, 보호받기 위해 결혼하면서, 퀘이는 영원히 쿠조의 마을에 가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약해지지 않을 터였다. 그는 노예 사업에 몸담았고 희생이 필요했다. (p. 112)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보니 자신의 동족들이 노예로 잡히고 팔려가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희생이 필요했다. 노예들이 팔려나가는 가나의 해변이 황금해안으로 불리는 것은 지극히 슬픈 아이러니였다. 에피아가 태어난 판티족과 에시가 태어난 아샨티족은 같은 아칸족이었다. '같은 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가지였다. (p. 77)' 하지만 그들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아프리카 땅에서 뻗어나간 가지도 아메리카 땅에서 뻗어나간 가지도 그들의 뿌리를 알게되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영국인들은 더 이상 미국에 노예들을 팔지 않았지만 노예 제도는 끝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손목과 발목에 채우는 물리적인 족쇄가 정신에 채우는 보이지 않는 족쇄로 바뀌기만 할 터였다. (중략) 영국인들은 노예 무역이 끝난 뒤에도 아프리카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성을 차지했고, 아직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하지만 아프리카 땅도 차지할 작정이었다. (p. 147)

영국인들이 뒤를 이어 다른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땅에 상륙해서 흑인노예들을 무역의 상품으로 다뤘던 시절이 끝났다고 해서 노예제도가 끝났다고 할수는 없었다. 그 노예들이 실질적으로 노동하고 있던 아메리카 땅에서 노예제도는 여전한 현실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지역부터 자유를 얻은 흑인노예들이 새삶을 일구길 꿈꿨지만 '배가 털릴 때마다 흑은 부두 노동자들이 모두 불려 가서 조사를 받았다. 조는 그것이 지긋지긋했다. 경찰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 근처에 있으면 늘 조마조마했다. (p. 172)' 새로운 땅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삶이라는 것을 자유를 얻었던 그때 그당시엔 몰랐다. 하지만 대를 거듭하는 후손들은 좀더 분명하게 그 삶을 체험하게 된다. '자네는 어렸어. 노예제가 자네 눈에는 그냥 점 하나에 불과하지, 응? 자네한테 아무도 말을 안 해준다면 내가 해주지. 전쟁은 끝낫을지 몰라도 노예제는 안 끝났어. (p. 237)'

불이 판틀랜드 해안에서부터 아샨티까지 내달리며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꿈. 그녀의 꿈속에서 불은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불의 여인이 어린 두 달을 안고 내륙의 숲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은 사라졌고, 불의 여인이 느끼는 슬픔은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와 덤불에 오렌지색과 붉은색, 푸르스름한 색이 들끓게 만들었다. (p. 263)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던 제임스의 딸 아쿠아는 꿈속에서 환영에 시달린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전쟁의 대륙이었고 남편은 다리를 잃었다. 더해가는 악몽속에서 한숨도 잠을 못자고 '불의 여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던 아쿠아는 결국 자신의 두 딸을 잃게 된다. 마치 제물로 바쳐지듯이... 그리고 살아난 단 한명의 아이는 '사람들 말로는 선생님이 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똑똑한 거라고요, 불에 밝혀져서요. (p. 335)' 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교사로 살고 있지만 여섯살 이후로 자신의 어머니 아쿠아를 만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힘주어 역사를 가르치면서 아프리카에서의 삶에 대해 고뇌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문제점이다. 우리는 몸소 보고 듣고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존해야 한다. 옛날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식들이 알도록, 그래서 그 자식들에게 다시 이야기해줄 수 있도록. 그 자식들은 그 자식들에게 또 그 자식들은 그 자식들에게. 하지만 우리는 상충되는 이야기들이라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p. 336)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믿는다. 바로 그 사람이 이야기를 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역사 공부를 할 때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을까? 이 목소리가 나오게 하기 위해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렸을까? 그 답을 알게 된다면 그 이야기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더 분명한-그래도 여전히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림을 볼 수 있다. (p. 337)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우리는 수시로 잊고 산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교차검증과 고고학적 연구가 보태지긴 하지만 남은 기록들로 재구성되는 역사는 애초에 한계가 있는 학문이다. 그렇다고 무의미하다고 폄하하거나 소용없다고 포기해선 안된다.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알려지지 않는 것을 알고자 하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프리카에서의 정체성찾기도 어려웠지만 아메리카에서의 정체성은 더욱 요원했다.

나는 경찰에게 얼마나 많은 멍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시장, 주지사, 대통령에게 얼마나 많은 편지들을 보낼 수 있을까? 무언가를 바꾸려면 얼마나 많은 날들이 걸릴까? 바꾸면 진짜로 바뀔까? 미국은 달라질까, 아니면 거의 그대로일까? 소니에게 미국의 문제는 분리가 아니라 실상 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니는 늘 백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렇게 땅덩어리가 큰데도 갈 곳이 없었다. (p. 362)

학교를 빠지고 할렘가를 떠돌고 마약에 빠지는 흑인들의 현실에 대해 알려주는 책들은 생각보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그런 책들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네가 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지만 백인들은 더 이상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업다. 너를 노예로 팔 필요도 없고, 너를 소유하기 위해 탄광에 집어 넣을 필요도 없지. 백인들은 그래도 너를 소유할 것이고 그런 짓을 한 건 너라고 말하겠지. 그건 네 잘못이라고 말하겠지. (p. 390)' 사회적 시스템을 가리기 위해 개인의 유책으로 돌리는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 우리는 '숲'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마조리 아버지가 쓴 책 [국가의 멸망은 국민들의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 책은 아버지의 필생의 역작이었다. (p. 400)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은 마조리는 어느 날 오후 내내 아버지 책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두 쪽밖에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아버지는 마조리가 지금보다 훨씬 나이를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분명하게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p. 401)

'나이를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이 있고 '무엇을 분명하게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을 나도 나이들어가면서 조금씩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인 프레임도 그렇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할때가 되어서가 아닐까... '환영을 보는 재주 (p. 430)'를 가진 마커스는 운명처럼 마조리를 만난다. '고향에 온 걸 환영해 (p. 444)'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라는 소설과 <세일럼의 검은 마녀 나 , 티투바> 라는 소설을 통해 핍박받는 삶속에서 지켜지는 아프리카 토속적인 '이어짐'을 느꼈다면 <워터댄서>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지는 흑인노예로서의 참혹한 현실이 <프라이데이 블랙> 과 <롱 웨이 다운> 이라는 소설속 현실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밤불의 딸들> 은 그 모든 것을 다 풀어내고 있었다. 한명한명의 삶의 몇장면을 읽는 것만으로 300년 흑인노예 역사책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 소설은 쉽고도 몰입감 높게 읽히는 소설의 장점과 구체적 현실감이 느껴지는 역사로서의 장점을 모두 갖춘 책이었다.

흑인의 삶을 다룬 소설이 자꾸 나오고 호평을 받는 다는 것은 지금 우리시대가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그 작품들 속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읽기를 권하는 책은 더 잘 캐치해서 읽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또 많은 나라에서 읽혀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의 미국사회에 특히 백인들에게 널리 읽히고 공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고 많이 평등해진 것 같지만 삶엔 여전히 투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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