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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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동시대적인 윤리를 서성이며 구축하는 질문들

이름이 낯선 신예작가의 소설집이었다.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책이다. 두번째 작품을 다 읽기전 작가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취재로 표현했다기엔 너무나 전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글을 쓴 이가 의사가 아닐까 싶었다. 역시나 의사였다. 의사가 쓴 글은 종종 읽어보았다. 하지만 본업이 의사인 작가가 쓴 소설은 처음이었다. 책날개에 쓰여진 저자의 약력은 소설가로서의 약력만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소설가로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의사와 소설가...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은 저로부터 멀어지고 타인으로 이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장르인데, 저는 아직까지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계속 멀어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 라고 말했는데, 나는 꼭 멀어져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러니 첫작품부터 인정받고 바로 등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작가가 앞으로도 '자신의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싶다.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으면 좋겠다. 책전반에 퍼져있는 의사로서의 윤리의식에 대한 번민이 느껴질수록 더더 의사로서 쓰는 소설을 기대하고 싶어졌다.

'삼십대 초반의 일개 봉직의임에도 의사 중에는 희귀한 등단작가 (p. 10)'인 '나'는 최근 쓰고 있는 소설이 한 장면에서 막혀서 쓰고지우고쓰고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이 소설에 영감을 준 환자는 이시진 씨라는 남성으로 그의 딸 유나씨는 최근 아버지의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날카로운 절단면이 모두 마모된 해변의 유리알처럼, 둥글게 빛났으나 더는 깨지지 않기로 작정한 듯 단단한 느낌(p. 13)'의 스물여섯살 유나씨와 종종 산책을 하던 '나'는 유나씨로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일년전의 사건에 대해 자신의 실수를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아빠는 어떻게 살았을까.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웠을까, 아니면 반대였을까. 아저씨와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p. 21)' 말하다가도 '사랑, 그거 안 하면 안되나? 그냥 안 하면 되잖아! 나는, 나는 안 사랑해?(p. 23)' 라며 소리치는 유나씨에게 '나'는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에 대해 고백한다. 두 노인의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산부인과 전공의 4년차인 '나'는 같은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온 동생인 소아청소년과 해수 와 대학생활 내내 따랐던 산부인과 전문의 의자 시민단체 활동가인 선배 희진언니 사이에서 '낙태법'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대해 번민에 빠진다. 낙태법은 위헌이고 사라져야 할 법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희진언니는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p. 57)' 라 말하며 '나'의 의견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동의하나 상황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해수는 갑작스런 임신을 하게 되고...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p. 70)' 이라는 크리스마스고백을 '그 다른 세계'에서의 생명은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다면... 『다른 세계에서도』

'라이파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 눈으로 봤어!(p. 75)' 라고 말하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간 영우는 '루이소체 치매'라는 생소한 병명을 진단받는다. 환시를 보고 환영에 정신을 뺏긴다는 그 병의 초기증세에서 아버지는 왜 하필 자신이 열한살이던 1961년에 봤던 만화책 속 영웅을 떠올리게 됐을까... 만화속 배경이었던 초원을 보고싶어 하는 아버지와 함께 간 몽골여행에서 일행이었던 장사장의 폭행을 보고 아버지는 라이파이가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 번의 돌려차기' 를 한다. 열한살때 창문 너머로 봤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그 시절 난무했던 폭행에 대해 숨었던 마음이 '단 한 번'쯤은 되어보고 싶었던 것이려나... 한번만이라도 나타나줬으면 싶었던 존재... 『라이파이』

'진단은 귀납적 추론이다. 개별 증상을 통해 가능성 낮은 질병부터 소거하여 단시간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편견을 수반하며, 축적된 임상 경험으로 구분과 배제에 능할수록 유능한 의사가 된다. 나는 여전히 부태복을 신뢰할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능한 내과 의사였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p. 105)' 진단이 귀납적 추론이었나? 서구의 논리들이 연역적인 경우가 많아서 나는 은연중에 서양에서 온 대부분의 논리는 연역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진단이 귀납적 추론, 하나하나 소거하다가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여하튼 중요한건 '부태복' 이라는 인물이다. 부태복은 귀순자 였다. '그는 기계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불신했다. 낙후된 병원에서 맨손으로 환자를 돌본 기억을 훈장처럼 말하는 그에게 최소한의 검사는 신념이자 자랑이었다.(p. 112)' 기울어가는 지방의료원이었기에 부태복이 채용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부침이 있긴 했어도 실력있는 의사였다. 하지만 바이러스성 폐렴 소견의 아이가 입원하면서 부태복과 진단에 대한 의견마찰이 일어난다. '나만 살았슴다...나머진 다 뒈졋소.(p. 126)' 라는 그의 말을 '나'는 무시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옳았다. 『부태복』

'1959년, 동독의 젊은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p. 160) 당대의 평자들은 리히터의 흐릿한 사진 회화에 주목했다. 훗날 '리히터스 블러'라 불리게 될 그 기법은 반사투영기로 실제 사진을 캔버스에 비춰 본을 뜬 다음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스펀지나 찰필로 눌러 뭉개버리는 것으로, 홀로코스트 이후 예술의 가능성을 회의하던 평자들에게 직관적인 통찰을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p. 161)' 지재권을 중심으로 모인 변호사들의 스터디에서 만난 한서와 '나'는 리히터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가까워졌다. '컨프론테이젼. 한서가 아이패드로 보여주었던 구드룬 엔슬린의 초상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p. 163) 브로슈어에는 그 단어가 심리학에서 '직면'으로 번역된다고 적혀 있었으나 내게는 '대질'이 더 익숙한 번역이었다. (p. 164)' 한서와 연인이 되었으나 지금까지의 연애가 그랬듯 이번 연애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서로가 그 끝을 느꼈을 즈음, '너 좀 이상해! 알아? (p. 176)' 라는 한서의 말에 '나'는 '한서라고 달랐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p. 177)'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 사랑은 끝나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사랑이라는 떠난 감정과 '대질'하게 되는 것을까... 리히터의 그림처럼 흐릿하게... 『컨프론테이션』

작은 소도시의 전문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로 한 희곤은 바닷가가 보이는 집을 원했다. ''자연'외에는 덧붙일 말이 없는 풍경 속에서 단 한 가지 이질적인 광경이 있다면 오른쪽 능선 너머로 나란히 솟아오른 일곱 개의 굴뚝이었다.(p. 185)' 한때 그 굴뚝 아래에서 일했던 우재의 집으로 이사하게 된 희곤은 우재의 숨죽인 일상에 대해 처음엔 그닥 신경쓰지 않았었다. 젊은 직원들이 북적였다던 발전소는 이제 하나둘 연기나는 굴뚝이 줄어들고 있었고 몇달을 지내는 동안 우재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잔이 닳도록 그것을 매만지는 동안 화장실에서 우재가 목을 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한참 전부터 벽을 넘어 식탁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의 울음을 듣고만 있던 준모가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저 친구 눈빛이 없었어.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디 저 친구뿐이었겠나' (p. 212)' 컨베이어벨트... 신입... 하지못한 신고... 사고처리반... 그날 그사건 이후.... 『눈빛이 없어』

'너희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부담되면 오지 마라. 간호 과장님의 전언이라며 병원에서 비상 연락망을 돌린 것은 출근 30분 전인 20일 오후 2시반경이었다. (중략) 곤봉으로 모자라 이젠 대검까지 쓰는 거지. (p. 220)'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숭고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중략) 그 순간 그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p. 234)' '시민 동지 여러분, 병원에 피가 부족합닏. 가능하신 분은 병원으로 가서 헌혈에 동참해주십시오.(p. 250)' '구 본관 건물의 측면을 지나, 주차장 가운데 줄지어 심긴 주목나무를 따라 행렬은 이어졌다. 더디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는 줄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굳은 얼굴로 나란히 선 노부부가, 손 그늘을 하고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p. 251)' '왜 안 돼요, 왜? 아까 그 아이들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이 보조 침대에 리넨을 덮은 임시 채혈대 앞에서 울먹였다. 제 피라도 써주세요, 제발요, 그래주시면 안 되요?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간호원이 열여섯 살 밑으로는 헌혈이 안 된다며 아이를 달랬다. (p. 252)'

그 날은 그랬다.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정혜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그 날은 그랬다. '1980년 5월 22일의 오후(p. 254)' 『너를 따라가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의학자문을 촉탁받은 진영은 교도소에서 있었던 누군가의 사망에 대한 진정서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된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는 한편에 남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p. 268)' 이런 진영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최교수는 진영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진영도 그런 최교수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 못하겠나? 증명이 중요한 게 아니야. 최교수님께서도 늘 말씀하셨지만, 이런 종류의 연구에선 과학이니 중립이니 따지는 게 아니라고. 그건 오히려 연구자가 가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거란 말이지' 증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진영이 이해한 건 그 연구가 종료될 무렵이나 되어서였다. (p. 276)' 김선배가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차례로 오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조사가 더욱 신경을 쓰였다. 확인하고 싶었고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교도소 의무 과장은 진영의 마음을 눈치채며 노련하게 말했다. '순간 진영은 의무 과장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숱한 짐승을 도륙해왔다는 당당한 고백이었다. (p. 283)' 철창과 철창 사이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진영은 어느 쪽으로 문이 열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p. 284)' 교도소의 문은 한번에 양쪽이 열리지 않는다. 그 철창과 철창 사이의 공간... ·참站』

다양한 현실문제들을 건드리면서도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체는 그 거리감이 갖고 있는 고민에 저절로 이입되게 만들었다. 직접적인 내문제로 여겨진다면 감정이 앞서서 고민하기가 더 어렵다. 한걸음 떨어져서야 문제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 거리감이 때론 냉정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그 거리감이 있기에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동성애, 낙태, 폭력, 섣부른 진단, 산업재해, 5.18, 교도소 의료사고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주제들이었다. <컨프론테이션>이라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애소설로만 읽어도 무방할 '컨프론테이션' 조차 연애보다 리히터의 작품주제가 더 중요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이 품고 있는 질문들은 질문자체로서의 의미가 깊은 것들이었다. 리얼리즘이긴 하되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 리얼리즘, 작가가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독자도 (비교적) 부담없이 거리를 두고 읽게되는 이 책의 작품들은 앞으로 작가가 던질 또다른 묵직한 질문들을 기대하게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세계'를 '의사이면서 소설가'로서 꾸준히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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