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건너뛰기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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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소개말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책 <호르몬이 그랬어> 에 이어 두번째 책 <오프닝 건너뛰기>를 읽게 됐다. 박서련 작가에 이어 은모든 작가 도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 알게된 작가들이었다. 젊은 작가들의 매력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소개말처럼 이 작고 얇은 책속엔 세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이 세편을 어떻게 이어붙일 지는 독자의 몫이다.

『 오프닝 건너뛰기 』

경호와 수미는 신혼 부부다. 하지만 신혼부부의 풋풋함을 기대하기엔 코로나 현실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들은 아직 '오프닝' 중이다.

경호가 품고 있는 따스함과 단순함. 그 두가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은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도려내듯 필요 없는 부분은 제거하고 원하는 부분만 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누군가와 한집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p. 26)

생판 남이었던 사람 둘이 만나 한집에서 먹고자고산다는 것은 시대가 변해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백세시대라는 장수시대에 오래오래 보고 살아야할 사람이니 나에게 맞춤옷같은 사람이라면 참 좋겠지만 껍질 빼고 씨앗빼고 알맹이만 담아놓은 통조림 같은 사람이라도 아마 원하는 부분만 취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고 한집에서 산다는 건 그런 단순한 맞춤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경호가 영상을 재생시켰다. 타이틀 시퀀스가 나왔으므로 수미는 어떤 내용이냐고 되물으며 화면 한구석에 있는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클릭했다. "자기 전에 이 드라마 본 적 있어?" " 아니" 수미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본 건데도 오프닝을 안 본다고?" "건너뛰는 게 습관이 돼서" "와, 나는 이런 기능은 누가 쓰나 했어. 알고 봤더니 우리 집에 있을 줄이야" 경호가 신기해했다. "자기야, 타이틀 시퀀스는 작품이랑 세트야. 레스토랑 가서 식전빵 안 먹을 거야? 그러는 거랑 똑같다고" (p. 43)

그런가? 나도 영화나 드라마 볼때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곤 하는데... 그렇지만 식전빵은 꼭 챙겨먹곤 하는데;;; 오프닝을 건너뛴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사람이 사람이 서로에게 적응시간이 필요하듯이 '오프닝'도 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상에서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듯이 '관계'에서도 자꾸 건너뛰어 온 것은 아닐지...

수미는 경호에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부란 서로가 만나기 전에 겪은 아픔마저 끝없이 달래주어야 하는 사이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새삼 자신이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는 법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p. 45)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통해 내모습을 보게 되곤 한다. 그 어떤 사이보다 '부부'란 더더욱 내밀하고 세심하게 자주 서로에게 그런 거울이 되곤 한다. 오프닝부터 차근차근 보다보면 좀 덜 싸우게 될지도 ㅎㅎ

『 쾌적한 한 잔 』

은우는 특성화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혼자사는데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껏 어머니는 한 번도 선을 보라고 종용한 적이 없었지만 자기 선에서 거절했다는 얘기는 꼬박꼬박 전했다. 은우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나는 말도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은우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부담 대신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이라고는 하지만 존재감은 미미한 크기의 감정이었다. 거실장 위에 으레 하나쯤 올려두고 방치하는 장식품처럼. 한 번씩 눈에 띄면 치워야겠다고, 하다못해 먼지라도 떨어내야겠다고 인식한 후에 대체로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다. (p. 64~65)

직업도 안정적이고 나이도 꽤 들어가는 아들에게 부모로서는 중매라도 보라고 은근이 압박을 가하는게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성정체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냥 기다리는 부모의 희망이 아들에게는 고문이 될 수도 있었을 터... 그래서 죄책감은 미미한 크기의 존재감으로 쉽게 잊혀질 수 있었다.

소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너는 겁 안나?" 하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요새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 말했다. 연애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도, 일밖에는 모르는 것 같던 선배도, 심지 굳은 비혼주의라던 친구도 하나씩 짝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에는 자기만 혼자 남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래서 정작 만나면 별달리 즐거울 것도 없는 동창 모임도 소중하다고 했다. (p. 75)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갈수록 '소속감' 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가족이라는 일차적 소속감이라면 좋겠지만 점점 어려워지고 가족이 아니어도 어딘가에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정말 점점 그런것도 같다. 그 이유가 성정체성이 되었건 일중독이나 비혼주의가 되었건 여하튼 '혼자' 이고 싶으면서도 너무 '혼자'인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온도와 머물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가늠해보면서 은우는 기다란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p. 84)

'쾌적한 맛 (중략)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맛이었다. 크고 단단한 얼음이 뿜어내는 냉기에 중심을 내주어야만 성립하는 맛이기도 했다.(p. 84)' 나도 이런 맛 칵테일을 파는 바가 집근처에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분위기 있게 '쾌적한 한잔'을 즐기고 싶은데... 이런 맛이라면 은우처럼 '혼자' 즐길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ㅎㅎ

『 앙코르 』

세영은 추석연휴에 늘 가던 가족모임에 가지 않고 혼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언니의 입에서 여지없이 이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p. 88) 수화기 저편에서 씩씩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영이 떠올린 것은 언니네가 괌에서 자리 잡기까지 이어졌던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이었다. 언니에게 돌아간 몫의 절반을 자신이 칼같이 요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언니네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활수준도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터였다. (p. 89)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러다 자신을 위해 한번쯤 한 선택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면서 신경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캄보디아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낯선 가람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둘이 함께 하게 된 여행...

이토록 분명한 것을 어째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133)

10여년 전에 그녀가 세영에게 해준 말은 오늘 가람이 한 말과 꼭 닮아 있었다. "나는 그런 말 언니한테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는데? 날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세상에 언니밖에 없어" (p. 134)

아무도 몰라주던 매력을 알아봐준 단 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과 나는 어떤 인연일까? 어떤 의미일까...

세편의 단편 뒤에는 [공명을 위한 온도와 속도] 라는 저자의 에세이 한편이 작가후기 처럼 덧붙여져 있다. '나의 길, 나혜석' 이라는 전시를 수원에서 본 이야기를 하며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대한 작가로서의 소회를 밝히고 있었다. 나혜석 작품 전시회를 본 기억이 나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저마다 감상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만일 이 책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을 즐기는 동안 살면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지 되뇌어보실 수 있다면, 자신을 지키고 삶의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의 관계를 맺을지 조율해보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p. 146)' 라는 작가의 말을 보며 작품내내 흐르는 '온기'를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선 동성애가 자주 보인다.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만 해도 피투성이였던 사랑은 이제 가볍고 산뜻한 분위기로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무거웠던 가족이라는 가까움이 내삶에서 거리를 두고 멀어져간 사이 다른 관계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관계'도 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변화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장 '쾌적한 온도'를 찾아내는 과정을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 쉽게 읽혀서 더욱 좋았던 책이었다.

ps. 세 편의 작품 제목들로 뭔가 연결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유치하지만) 한번 생각해 봤다.

'오프닝을 건너뛰지 않고 차근차근 보다보면 늘 마시던 미지근한 술도 어느날 쾌적한 한잔으로 느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 아마 외치게 되지 않을까, 한잔 더! 앙코르! 하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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