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조지 포크'의 조선 탐사 일기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엮음, 조법종 외 옮김 /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인 최초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가했던 외교관 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전하는 1880년대 조선인의 생생한 삶과 역사를 전한다.

900마일(1448km)을 가마 타고 44일간 기록한 조선의 생생한 기록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다 보니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인기드라마도 안 봤지만 그 드라마에 '유진 초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는 건 안다. 드라마 설정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그 실제 모델로는 실존인물 미국장교 '조지 포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말의 역사에 대해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의 이런저런 기록들이 있다. 복잡다단했던 시대였던만큼 그 기록들에서도 빛보다는 어둠이 더 많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좀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시절이기도 하기에 미국장교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이 책은 조선말 미국장교 포크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사무엘 홀리'라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캐나다인 교수가 펴낸 책을 한국인 역사학자가 번역 및 편집한 책이다. 따라서 저자는 '포크' 이고 편집은 '사무엘 홀리'이며 번역자는 '조법종, 조현미' 라는 3중 저자를 보유한?! 책이다.

포크가 남긴 자료와 일기장처럼 기록한 두권의 수첩 내용은 이 책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본 내용을 읽기에 앞서 100페이지는 포크의 기록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의 서문이 먼저있고 편자의 서문이 뒤를 잇는다. 이 서문들이 있었기에 뒤의 본문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본문보다 사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 두 편의 서문에 다 있다고 볼수도 있다.

전체 내용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포크의 계획과는 별개로 기록된 내용에 의거해 관련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여과되지 않은 생생한 현장의 기록

2) 시간대별 조사 기록

3) 지방 최초의 온도와 기압 기록

4) 현존하는 최고 여행비자

5) <대동여지도>, <여지도>를 이용한 외국인 최초의 조선 여행 기록

6) 주막과 역원을 활용한 여행 기록

7) 한국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사례집 제작

8) 거북선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외국인 (p. 23~27 발췌)

책의 제목에서 '화륜선'은 '불바퀴로 가는 배'를 의미한다. 당시 '양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조선인에게 '화륜선을 타고 온 사람'이었고 서양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수도인 서울과 외국인들의 배가 수시로 오가는 부산을 제외하고는 '양인'들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조선반도의 남쪽을 포크는 '탐사' 한다. 이 기록은 '관광'이 아니라 '탐사'였고 그 '탐사'를 전후한 배경을 알려주는 '서문'의 내용들은 매우 유익했다.

서울에서 서양식 증기선 제조를 어떻게 시도했었고, 미국전함 가운데 최신식 화륜선인 트랜튼호를 타고 어떻게 포크가 오게된건지, 포크가 누구와 밀접했는지 등의 사전 정보는 포크의 탐사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필수적 정보들이었다. 무엇보다 포크가 남긴 다른 기록들에 대한 안내도 의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역자는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무관으로 처음 부임한 포크의 1884년 조선 남부 지역 조사 기록을 번역, 정리하는 과정에서 포크가 서구 세계에 거북선을 철갑함으로 소개하였고, 이 보고서 내용이 서구 언론에 소개되면서 '거북선=세계 최초의 철갑함'으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p. 45)

1890년대는 제국주의의 전성기로 세계가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진하며 해군력을 증가시켰다. 거북선에 대한 포크의 보고서 내용이 미국 신문에 보도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해군력을 앞세운 식민지 쟁탈과 군함외교가 맹위를 떨친 1890년대였기 때문에, 각광을 받고 있던 철갑함의 원조가 조선이라는 포크의 보고서는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많은 신문들이 다투어 거북선을 보고하고 후속 보도까지 한 것으로 보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p. 60)

본문인 탐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포크가 미국으로 보낸 보고서와 편지들을 바탕으로 당대 조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역으로 알수 있었다. 특히나 역자가 정리한 '거북선'의 미국언론기사들에 대한 정리 및 분석은 이 책에서 단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조선말까지도 조선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었다. 거북선이 없었다면 미국사회에 조선이 알려질 일이 뭐가 있었을까...

여기까지의 '역자 서문'은 포크의 탐사기를 정리하고 포크가 가진 자료들 중 '거북선' 관련 자료분석에 집중했다면 뒤이은 '편자 서문'은 또다른 분석방향을 보여준다.

1884년 11월1일 미국 해군 소속 조지 포크 소위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조선의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900마일(약1448km)의 고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길 위에서 보낸 44일 동안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두 권의 노트에 380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여행기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반크로프트 도서관에 조지 클레이튼 포크 관련 수집품 중 일부로 소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여행기가 지닌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자들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p. 61) 무엇보다 이 여행기는 포크가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서양인도 경함한 적이 없었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조선 왕조의 고위 관리나 정부관리가 하는 방식대로 가마를 타고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냈다. (중략) 또한 이 여행기는 서양인의 눈에 비쳐진 1880년대의 조선을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p. 62)

이 책의 가장 앞쪽에는 포크의 여행 경로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서울-수원-천안-공주-전주-나주-진주-부산-대구-상주-충주-이천-광주-서울로 연결된 여정은 한반도의 남쪽을 삼각형 형태로 넓게 둘러보고 오게 되어 있었고, 포크는 그가 본 환경들을 꼼꼼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대동여지도>가 정말 정확했다는 점이고, 지방의 관리들은 조선의 지리를 정말 잘 몰랐다는 점이다.

1883년 서구를 향한 첫 번째 조선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통역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미국 정부 내에서 포크가 유일했다. (p. 64) 민영익은 포크가 조선의 사절단과 동행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중략) 포크는 해군 무관의 임무를 맡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그는 국무부와 해군으로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가능한 한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포크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날마다 조선인과 대화하면서 언어 능력을 키웠고 중요 관리와 유대 관계를 맺었다. (p. 65) 조선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포크는 조선을 여행할 일련의 계획을 세운다. 처음에 그는 세번의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첫번째는 경기도 중심부, 두번째는 조선의 남부를 가로지르는 계획, 마지막 세번째는 북부 지방을 가로지르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번째는 떠나지 못했다. (p. 66)

포크가 미국에서 통역을 맡았다고 해서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포크는 일본어를 할줄 알았고 조선사람들은 일본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한국어가 익숙해지기 전엔 조선인통역관과 일본어로 소통했다. 이것은 여행말기에 '갑신정변'으로 인한 위험에 처해지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조선에서 밀려났을때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포크 이전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조선을 경험한 사람은 포크가 유일했다.

포크는 지금 우리가 문화충격이라고 정의하는 증상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는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 우울해 했고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p. 86) 그는 그 당시 설립된 세관과 관련된 서양인들을 '세관 깡패들'이라고 썼으며, 게다가 수다스럽고, 막돼먹고, 불경하며, '내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중략) 포크가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동료인 서양인들에게까지 통렬한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비판의 기준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그가 지닌 내면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해군에서 경력을 쌓으며 구축한 원기왕성하고 쾌할한 겉모습 아래에 (중략) 마음속으로 수줍어하고 쉽게 기분이 상하는 여린 심성이 숨어 있었다. (p. 88) 그의 여행일기를 읽어보면 특히 그의 사생활을 조선인이 침해할 때의 반응은, 이런 그의 여린 성격을 가슴에 잘 새겨야만 이해할 수 있다. (p. 89) 포크는 자신이 보낸 편지와 사진을 조심해서 보존해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했다. 그 자료들이 '조선에 관한 책이나 보고서를 쓸 때 매우 소중하게 쓰일 것'이라고 전했다. (중략) 그러나 불행히도 포크는 그 책을 쓰지 못했다. (p. 96)

28세의 혈기왕성한 미국인 청년이 부푼 꿈을 안고 낯선 동양땅에 왔다. 해군으로서의 의무와 개인적은 탐구욕으로 인해 조선여행에 나선 그가 맞닦드린 현실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언어도 완벽히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추워지는 날씨에 당시 양반남성들이 타고 다니던 열린 가마(의자만 있는 형태의 가마)를 타고 여기저기 갈때마다 몰려드는 구경꾼들로 인해 힘들어했다. 당시의 관리들의 접대문화나 관리들이 백성들을 대하는 폭압적인 태도도 버거웠지만 가장 힘든 것은 화장실 볼일을 볼때조차 구경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딜가든 그는 동물안 원숭이보다 더한 따가운 눈총을 버텨야 했고 그런 날들이 쌓여감에 따라 신경도 점점 예민해져갔는데 심지어 귀환길에 '갑신정변'소식을 들어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기록에서 이런 전후사정을 알고 읽는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여행 일기'라고 하지만 그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 '탐사'였기에 포크의 수첩을 번역한 본문의 주된 내용은 지형 파악에 대한 것들이었다. 포크는 가능한 하루에 먼 거리를 이동하려 했고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지도와 지형지물을 비교하고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가 한 주된 경험은 관리들의 접대였고 그의 시선은 늘 지리와 작물과 주택분포 와 인구수 같은 외적 파악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가 만난 백성들의 모습은 대개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남겼다.

나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넘어져 감을 떨어뜨렸고 순식간에 등을 밟히며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혔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2피트(60cm)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내게 적개심을 보인다거나 쏘아보는 기색은 없었지만 무례한 호기심은 놀라웠다. (p. 116)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군중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무례한 탓에 전혀 시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일꾼들이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사람들에게 몽둥이질을 하는 것을 막느라 힘들었다. (p. 117)

이러한 상황은 어딜 가든 반복되고 점점더 악화되었다. 깨끗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는 숙소를 만나면 그나마 괜찮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때면 이런 '호기심'스트레스는 말할수 없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는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나라 전체적으로는 크게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그 누구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다거나 알고 있지 않았다. 혹은 오랜 세월 서울을 다녀오지도 않았다. 조선의 중심부 지역 국민의 생활이 취약하다는 내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국가는 종족이라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부분이다. 이 정부의 통치 행위를 통해 판단해 보면, 무력으로 백성을 장악하고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 145)

포크가 만난 관리들도 천차만별이었다. 예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위풍당당하기도 하고 무지렁이같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공통적으로 관리들은 정세판단에 미숙해 보였다.

대화는 익숙한 동양적 안부 인사와 예절을 갖춘 답변으로 시작됐다. (중략) 대화는 당연하게도 서양 문명에 관한 질문으로 바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감사는 곧바로 조선은 수백년 동안 쌀을 자족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을 바꿔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무역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자 감사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지금까지 조선은 그런 일들이 가능한지 몰랐고 아주 서서히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p. 183)

그는 곧 중국과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내게 그 전쟁의 모든 내력을 물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p. 193)

감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었다. (p. 201)

포크는 민영익이 구해준 지도와 발급해준 통행권 덕에 어딜 가든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지방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의 감영관리가 곧 그 작은 왕국의 통치자였다. 그들은 중앙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더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너무나 혼란스런 시국이었다.

'통영의 영웅'은 나라를 위해 수많은 일본인을 죽인 후 (백성들의 영웅), 결국 자신의 힘을 보여 준 행위로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일본 함댇가 빤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뱃머리에 서서 일본인의 총을 맞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범죄자처럼 처형당하는 것을 피했다. (p. 287)

아마도 믿기 힘든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거칠어지려고 스스로를 내몰고 있다. (p. 291)

5명의 길나장이가 앞서 가다가 지나가는 남자 두 명을 논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두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을 폭력적으로 밀어제쳤다. 아! 여행하는 방법이 이렇다니. (p. 314)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욕설을 내뱉고 마구 밀어제치고!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 합천에서 피신하는 내 모습은 정말 웃음거리였다. 비록 내 여행이 국가 기밀이긴 했지만, 전체 장터에 내가 읍내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당연히 알려졌을 것이다. (p. 315)

내가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미 해군의 장교로서, 바로 이곳 조선 관료의 집 안에서 무례한 사람들의 눈길에 노출되고 전시되는 것은 굴욕이었다. 아마도 정신을 놓는다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p. 328)

나는 묵을 보내 목사에게 동래로 바로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는 내게는 결정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통영은 아마도 조선에서 내가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수리 모자를 쓰고 있는 동안(미군 장교 복장을 한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간다면 내가 다시 겪어야만 할 굴욕과 불명예를 감내할 수는 없었다. (p. 331)

포크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가 머문 각 지방의 현지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곤 했다.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다. 해군으로서 '거북선'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통영에 꼭 가보고 싶었으나 이즈음 포크는 '무례한 호기심'에 너무 지친 나머지 통영을 지나치기로 결정한다. 포크는 당대 고위급 관리들의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었고 짐도 거느리는 수행원도 많았다. 그 수행원들이 하는 행동또한 관리들을 모시는 방식이었기에 '양인'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을 대하는 태도는 폭력적이었다. 그것이 여행 내내 포크를 괴롭게 했다. 그런 길잡이들의 길을 트는 폭력도 힘들었지만 어딜가든 안팎 구분없이 따라다니는 눈길이 그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어갔다. 어쩌다 장날이 된 읍내를 통과할라치면 그 인산인해 속에서 그는 더욱 더 고통에 빠졌다.

일본인들이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안달복달했다. 부산에서 나는 끊임없이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세관 무리와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염탐의 대상이었다. (p. 364)

나는 전반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무례와 나를 일종의 진기한 수집품처럼 대하는 반 야만적인 행동응로 인해 그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배려가 무색해졌다. (p. 382)

포크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었다. 그는 사진기와 탐사도구를 가지고 출발했고 산과 계곡과 길과 논밭과 집들의 분포와 새로운 풍속을 나타내는 조형물들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빠르게 관찰하고 지나치려는 그의 여행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상주길에서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공포에 빠진다.

외국인을 싫어하는 악마 같은 인간-선비-들이 나의 갈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조선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낯선 존재이다. 나는 혼자이며 이 땅은 무정부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p. 408)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략) 그들은 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의 친절과 도움은 언제나 칭송을 받을만했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조국이 그들에게 보답을 하기를 바랐다. (p. 420)

'조선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낯선 존재' 임을 스스로 알고 있던 포크는 여행 내내 수행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그 수행원들은 모두 포크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행히도 서울에서 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포크 일행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의 두번째 조선 내륙 여행은 끝이 났다. 다양하고 멋진 경험으로 가득한, 또 걱정과 불안으로 보낸 900마일의 여정이었다. 그동안 나는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조선인으로서 살았다. (기독교인의 마음으로). 그토록 많이, 그토록 구석구석, 내가 보았던 조선은 과거에도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 장면들이 되풀이되지는 못할 것이다. (p. 444)

'과거에도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 장면들이 되풀이되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은 맞았다. 포크의 이 여행이후 정세가 격변했고 포크는 조선을 떠나야 했다. 조선에 대한 기록들은 서양인의 우월한 시선아래로 쓰여진 것들이 많다. 이 책에서도 다른 서양인들의 기록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역시나 그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기록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비교적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이들도 있었다.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선교사였던 저자가 서울에 살면서 경험한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였기에 <화륜선을 타고 온 포크> 와는 관점이 다르고 내용도 전혀 다른 방향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서양인들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느꼈던 '당혹감'은 분명 당시의 조선과 서양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니 그 넓은 간극을 이해하려면 한쪽 방향의 시선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이 읽고 깊게 숙고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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