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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얼마전엔 SF잡지를 읽었었는데, 이번엔 새로나온 문예잡지를 보게 됐다. 문예잡지 하면 '창작과비평' 계간지 정도만 알았는데 요즘엔 새로운 문예잡지들도 등장하는 것을 보니 반갑고 일단 오래 갔으면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에픽은 어떤 잡지인가? 내가 읽은 건 2호라서 잡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에 1호를 검색해보았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는 1호에 대한 소개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러티브 매거진 《에픽》은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신개념 서사 중심 문학잡지이다. '에픽(epic)'이라는 단어는, 명사로는 '서사시, 서사 문학', 형용사로는 '웅대한, 영웅적인, 대규모의, 뛰어난, 커다란, 광범위한' 같은 뜻을 지녔다. 이 'epic'의 모음 'i'에 'i' 하나를 덧붙였다. 이야기란, 서사란, 하나의 내[i]가 다른 나[i]와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생겨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픽(epiic)》은 바로 이 두 겹의 세계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모았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벌어지는 화학 작용을 다루는 이너 내러티브 'i+i'를 시작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서사인 픽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져 온 크리에이티브 논픽션(creative nonfiction)을 두루 다루고자 한다. 이 논픽션에는 르포르타주(reportage), 메모어(memoir), 구술록(oral history) 같은 여러 세부 장르가 포함된다.
책 리뷰 역시 한 권이 아닌 서로 연결된 두 권을 다루는 1+1 방식으로 소개되며, 가상의 누군가를 만나는 버추얼 에세이 'if i'도 마련된다. 픽션 파트에서는 기존의 문단 중심 단편소설뿐 아니라 장르문학을 편견 없이 함께 다루고, 책 말미에는 그래픽노블을 통해 각 권의 제호에서 비롯된 또다른 상상력을 살펴본다.
이러한 에픽만의 특징은 1호에 이어 2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절반은 논픽션 절반은 픽션인데 둘다 서사중심의 글들이고 다루는 소재도 두 가지 혹은 두 방향이 함께 서술된다. 사람인 人 이라는 한자가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을 옆에서 본것을 상형화한것이라 하지만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으로 풀이되는 것을 나는 좋아하는데 이 잡지의 특징이 그런 人 을 생각나게 했다. 필진들도 눈에 익은 이름이 많아서 호기심이 up 되기도 했다.
『 앞장과 뒷장 사이의 우주 』 - 문지혁
"코덱스 형식은 닫혀 있으면 공기로부터 저절로 차단돼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디바이스인 셈이죠. 저는 이걸 책이 스스로 선택한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세월 끝에 이런 구조만 살아남았으니까요. 좋은 종이를 쓰고 튼튼하게 묶어놓으면 천년 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요. 언제든 다시 풀고 묶어서 수명을 늘려줄 수도 있고요" (p. 35)
공방의 이름 '렉또베르쏘'는 라틴어로 앞장이라는 뜻의 렉토와 뒷장이라는 뜻의 베르쏘를 합친 말이다. 렉또였던 백순덕 선생이 세상과 공방을 떠난 뒤 조효은 대표는 한동안 혼자서 공방을 운영했다. (p. 38, 40)
예술제본 백순덕씨에 대한 기사를 언젠가 어디선가 본것 같다. 책을 그렇게 정성들여 손으로 직접 제본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프랑스 유학까지 가서 배워왔다니 더욱 생소했지만 잠시 봤던 그 책표지들이 참 아름다워보였다. 백순덕씨 타계후 유일한 제자였던 조효은씨가 공방 '렉또베르쏘'를 이어받았다. 소설가 문지혁이 그녀를 인터뷰했다. 렉또를 바라보며 책을 꿰매던 조효은씨에게 프랑스로 유학가서 를리외르 자격증을 따온 베르쏘가 생겼다. 참 다행이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수업의 본질이 내용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수업의 본질은 수업 이전과 수업 이후에 있다는 것을, 나는 1년을 헤매고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오늘 읽어야 할 책과 배워야 할 기술에 관한 몇 시간짜리 강의가 아니라, 옷을 입고 책과 노트와 필기구를 챙겨 버스와 지하철에 타는 것이 수업이다. 교실까지 걸어가서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딴생각을 하는 것이 수업이다.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머뭇거리는 시간, 잘 정돈된 슬라이드가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컴퓨터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낑낑대는 시간, 활발한 토론이 오가는 시간이 아니라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이 수업이다. (중략) 어쩌면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중략) 책만이 줄 수 있는 것은 책 자체, 책이라는 크기와 무게를 지닌 물리적 형식뿐이다. 내용이 아니라 물성이 책의 본질이다. 눈이 아니라 손이다.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가 아니라, 앞장에서 뒷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순간 경험하는 어둠과 공백과 멈춤만이 진짜 책이다. (p. 41, 42)
멋진 표현이다. 지난 1년간 학교수업에 대해 열변을 토하게 한 것은 비대면수업으로 인한 학력격차 문제도 컸지만 그보다도 문지혁 작가가 말한 저런 수업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수업은 수업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도... 책또한 의미만이 다가 아니고 글자만이 다가 아니다.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느낌과 여백은 또다른 책이다. 단숨에 읽히는 책도 띄엄띄엄 읽히는 책도 그 앞장과 뒷장 사이의 그 모든 시간들은 결국 다 책이다. 책속의 내용이 무엇이건간에 어떤 책을 예술적으로 제본한다는 것은 또다른 아름다움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 두 사람의 내력 만나기 』 - 최현숙
어떤 글에서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씨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구술생애사 작가라니, 대단한 삶을 대신하여 써주는 자서전 작가도 아니고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글로 담아내는 에세이 작가도 아니고 구술생애사 작가라니 생소했던 기억이 있다. 그땐 그저 누군가는 기록해야 할 삶을 사는 이들을 기억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글을 보고나서야 작가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왜 어떻게 남기고자 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나는 그녀가 말해준 것을 가지고 그녀를 가늠해간다. 더 잘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와 나 사이에 더 많은 시간과 말과 경험이 섞여야 하고, 그녀의 느낌을 그녀의 단어와 문장으로 풀어내도록 내 단어와 문장이 바뀌어야 한다. 궁금한 사람은 그녀가 아닌 나니까. 별수 없이 내가 고생해야 한다. (p. 55)
작가는 한 여성 노숙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작가는 누군가의 요청으로 그 사람의 생애를 듣고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선택한 사람을 어렵게어렵게 인터뷰해가며 그 사람의 삶을 최대한 그사람답게 글로 표현하려 애쓴다. 왜냐면 그들도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21세기의 소위 민주 정권들은 홈리스/신자유주의 바깥의 존재/노동하지 않(못하)는 비체들을 '싹 쓸어다 가두거나 죽이'지는 못한다. (중략) 내내 그 비용을 아까워하면서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비용임을 수긍하고 별수 없이 지불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그들의 삶을 '불쌍' 과 '비참'을 들먹이며 동정하지만 결국은 혐오이자 배제다. 여기에는 자기불안도 들어있다. 신자유주의 각자도생 사회에서 여차하면 자신들의 삶 역시 그렇게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 홈리스는 그들에게는 되지 말아야 할 구체적 사례이자 증거이다. 불가피한 존재이자 사례로서의 홈리스들에 대해 '그 사회' 속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해주는 것이 국가라고 생각한다. (p. 69~70)
일면 과격한 면도 있게 읽히는 글이지만 다 읽고나면 그 기저에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또한 처음 읽는 여성노숙자의 삶도 이해는 안가지만 인정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과한 표현들에 대해서는 생각의 여지를 좀더 남겨두기로 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므로...
『 나는 왜 밀덕이 되었나? 』 - 정명섭
나는 덕질을 삶의 유희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하나의 축제라면 즐기고 또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p. 79) 내가 이렇게 밀덕에 빠져든 것은 군대라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이겨낼 만한 매력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전쟁에 매혹된 것이다. (p. 84)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해롭고 나쁜 전쟁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고백하자면, 너무 싫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것이다. (p. 85) 인간의 역사는 깊고, 그 와중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은 전쟁의 목적과 본질, 그리고 그 피해자들뿐이다. 역사는 굉장히 냉정하고 차갑게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전쟁을 연구하고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뭔가를 피하려면 거기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p. 86)
덕후중에서도 드물다는 밀리터리덕후인 작가 정명섭이 알여주는 밀덕의 세계는 생각보다 심오하다. 덕후라고 하면 자신이 꽂힌 뭔가를 열정적으로 모으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히 요즘은 덕질로 성공하는 사례들도 종종 있는데 이 작가가 그러했다. 여하튼, 덕후들은 자신이 꽂힌 그 분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 열정이 정명섭 작가처럼 역사와 이어질때 나는 좀더 반가울것 같다. ㅎㅎ
『 응급실의 노동자들 』 - 남궁인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피플을 읽은 이후로 내내 그 소설의 여운이 내게 남아있는 듯 하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시선으로 바라본 응급실의 24시와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피프티피플이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응급실의 24시간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응급실 이야기는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픽션처럼 읽히는 에피소드들이었다.
『 다시, 다시 - 만약에 꽈리고추와 계란을 다시 사지 않았더라면 』 - 김대주
방송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남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김대주 작가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1박2일, 응답하라1994, 꽃보다청춘, 윤식당, 스페인하숙, 여름방학등의 작가로 참여했다는 이력을 읽고나니 아~! 예능방송에서 출연자가 작가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던 것 같다. ㅎ 여하튼 대부분 히트작이었던 프로그램 이름들을 보면서 어떤 글일지 궁금증이 일었다.
방송작가라고 하면 대본을 쓰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예능프로그램의 작가는, 적어도 내가 주로 하고 있는 리얼버라이어티 작가는 말하는 거 반 몸 쓰는 거 반이다. 대본이란 걸 써본 게……, 아마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마지막인 것 같다. [1박2일]때는 매일 전국으로 답사를 다니고 게임 시뮬레이션을 하는 게 일이었고, [삼시세끼]때는 밭에 작물을 심고 키우는 게 일이었고, [윤식당] 때는 시장조사하고 메뉴 개발하는 게 일이었다. 물론 밤새 촬영 준비를 하고 며칠 밤낮 촬영장 생활을 지켜보며 고민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몸 쓰는 건 회의실에 앉아서 기획할 때에 비하면 꿀 빠는 일이다. 낮부터 모여서 새벽까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다 보면 머리가 멈추는 순간을 자주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디어는 바닥나고 침묵은 길어지니 속만 타들어간다. (p. 129 ~ 130)
예능프로그램 방송작가 답게 자신의 하루를 담은 에세이도 재기발랄했다. 늙은 애견과 반찬과 맛있는 김밥집이 코로나로 문을 닫는 것들이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게 짠하지만 짠하지만은 않게 작가의 아이디어 고민과 어우러지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게 되는 글이었다.
『 짜이고 익는 말들 』 - 김화진
나에게 신념이 견고한지 말랑한지, 직선인지 곡선인지 가늠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확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대체로 골라 읽은 책들을 통해 내가 어떤 것을 믿으며 사는지 알 수 있었다. 내용을 따라가는 사이 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네, 하고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지닌 어떤 믿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책들이 있다. 최근에는 백온유의 소설 [유원]과 브래디 미카코의 논픽션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였다. (p. 140)
자주 보고 읽은 것들로 우리의 언어가 구성된다면 나의 언어는 어떨까. 어떤 걸로 짜이고 어떻게 익어갈까. (p. 144)
두 권의 책을 중심에 놓고 풀어낸 이 글에서 [유원]은 읽었던 책이라 반가웠고 [나는 옐로에서 화이트에 약간 블루] 라는 읽고 싶은 책을 만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책을 통해 나를 확인해간다는 점에서 느껴지는 공감대가 참 좋았다. 작가는 이 두권의 책을 보고 읽은 것들에서 익어간 언어들을 썼지만 나는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이 내 안에서 어떤 언어들을 만들었을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 어떤 물질들의 장소와 환대에 관한 이야기 』 - 이지용
누군가의 글을 통해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할때면 왠지 믿음이 가는 기쁨이 생겨나곤 한다. SF작가 다운 선택으로 보여지는 책 두 권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 와 천선란 작가의 [어떤 물질의 사랑] 도 내 관심도서에 리스트업 해두기로 했다.
『 슬픔을 다시 썼을 때 우리가 엿보게 되는 것들 』 - 임지훈
나는 이야기가 우리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살아 있는 이들 사이의 연결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이와의 연결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 수전 손태그의 말처럼 이미지는 충격을 주지만 이해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 뿐이기 때문이다. (p. 156)
어쩌면 이 책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일부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당신은 정말로 당신 자신인가. 당신은 단지 이데올리기의 육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예컨대,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행한 발화들은 주체적인 것이었을까. 나는 단지 저 대타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나 스스로를 비운의 주인공으로, 어떤 거대한 삶의 실패를 이겨내고 등장한 목소리로 가장하는 것은, 그런 부피 없음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경험한 고통은 단지 가장된 고통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이 고통은 무엇일까. 그 고통으로부터 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p. 162)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가 늘 반쪽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한 타인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타인이 되어보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여성에 의해 타인이 되어보는 체험, 이 비극 속에서 자신이 얼마쯤은 늘 타인의 위치에 있었다는 자각 말이다. (p. 164)
시노다 세츠코의 [장녀들] 과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이라는 두 권의 책을 연결해 풀어내는 저자의 고통이 마음을 울렸다. 솔직한 글은 늘 마음에 닿는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와 2부가 논픽션이라면 3부는 픽션이다. 5편의 단편과 1편의 만화가 실려있는데, 음... 단편에 약한 나로서는 1부와 2부의 글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내게 닿지 않는 단편소설의 특성을 나는 개인적으로 '글이 너무 작가적이다'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 5편의 작품들은 아쉽게도 너무 작가적인 글들이었다;;;
『 말하지 않는 책 』 - 김솔
책은 죽은 자들과 이야기하는 데 사용됐다. 악기는 현재 살아있는 자들을 이해하는 도구였다. 천체관측 도구를 통해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불평을 들을 수 있었다. (p. 173) 책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질문에 반응을 하는데, 그 방법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책만큼이나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만 책의 침묵을 듣고 이전 세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위대한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이다. (p. 174)
세살때 라틴어 책을 술술 읽을만큼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수많은 책을 읽고 배운 마르타 수녀는 어느날 스스로 문맹이 되어버렸다. 문맹이 됨으로써 더 온전하게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맹인 그녀가 불온한 책을 썼다는 소문이 돌고 종교회의에 소집된다. 마르타 수녀의 비밀을 알아챈 펠리페 수사는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문맹에 이르는 논리적 방법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신은 영원히 편재하고 모든 인간은 유한하다. 문자를 발명해낸 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며, 문자의 쓸모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에 있다. 문자로 옮겨 적는 순간 그 기억은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진다. 더욱이 문자로 변환된 대상은 실재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문장의 시제는 과거이고 현재의 상태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와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마르타 수녀는 3년 만에 라틴어 [성경]을 마야의 문자로 번역했다. 마야어로 완성된 [성서]는 고작 두 페이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을 반년 동안 반복해서 읽고 나자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모든 문자의 의미와 작동 원리를 완전히 망각할 수 있었다. (p. 179, 181)
유한한 인간에 대한 책들에는 망각과 오독의 운명이 이미 반영돼 있다. 자신이 쓴 책은 모든 인간에게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펠리페 수사에게 용기를 주었다. (p. 183)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한 소설이고 내가 관심있어 하는 중세종교시대의 이야기라서 집중하여 읽었지만 책과 종교가 뒤섞이고 마르타 수녀와 펠리페 수사가 독서를 통해 책과 독자, 화자, 등장인물 그리고 책 까지 모두 운명이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애초에 마르타 수녀가 있긴 했던 것인지 펠리페 수사는 무엇을 기록한 것인지 나는 알아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유언을 남겼다. "천국에 이르는 열쇠 중에는 말하지 않는 책도 포함된다" (p. 202
『 이인제의 나라 』 - 김홍
김홍 작가의 [스모킹 오레오]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기에 반가운 이름이었다. 그런데 단편 제목이 '이인제의 나라' 음? 내가 생각한 그 이인제? 그 이인제가 맞았다;;; 마치 소설을 준비하는 에세이처럼 쓰인 이 소설은 분명 소설이고 '이인제의 소설'은 소재일뿐 결국 소설이 아니다.
2014년 이 소설을 처음 썼을 때 내게는 '이인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이인제'는 그 무엇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이인제'라는 법조인 출신의 중견 정치인에 대한 폄하나 무해를 담고 있는 평가라기보다 한국 정치에서 '이인제'라는 현상 혹은 '이인제'가 점유하고 있는 위상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인제'는 한국 정치의 텅 빈 기표 그 자체이자, 한국 정치의 텅 비어 있음에 대한 물리적인 구현으로서 세상은 절대로 '이인제의 나라'가 될 수 없고, 한편으로 세상이 '이인제의 나라'가 된다고 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은 기분이 드는 한편, 세상은 어쩌면 이미 '이인제의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패배주의적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이 바로 소설 '이인제의 나라'였다. (p. 206 ~ 207)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수 없는 소설속의 소설 '이인제의 나라'는 사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내용을 몰라도 상관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인제의 나라'라는 소설속 소설을 쓰기로 한 이유는 아니 '이인제의 나라' 라는 소설이 나오는 소설인 '이인제으 나라'를 쓰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를 알기전에 소설속 작가는 '이인제의 나라'에서 눈을 뜨고 소설은 끝난다.
『 프롬 제네바 』 - 송시우
"기업과 인권 포럼이요? 그게 뭐예요?"
"일단 기업과 인권, The Business and Human Rights의 개념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러니까, 에……인권을 보호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것이 인권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었다면 말이죠 날로 커지는 초국적기업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제 기업에도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뭐 그런 가치 체계인 거죠. 기업이 이윤만 추구해서는 안 되고 기업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에요" (p. 233)
인권증진위원회에서 일하는 부지훈과 한윤서는 제네바에서 열리는 '기업과 인권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왔다가 그 포럼에서 한국 최초의 스피커로 나선 오성전자 이국재 이사의 발표를 보게 된다.
"결국 지 자랑이에요, 지 자랑, 회사 자랑. 여기에 기업 관계자 나오면 자기 회사 자랑밖에 안 하죠. 윤리를 방패 삼은 회사 홍보랄까. 어쩌면 그게 기업과 인권의 본질이긴 하지만요" (p. 242)
복도에도 거대한 네트워크의 장이 펼쳐졌다. 잠깐의 이동 시간을 틈타 회의 참석자들은 서로에게 명함을 건네고 자기 소개를 했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활기 있게 와글거렸다. 국제회의의 진정한 네트워킹은 쉬는 시간 복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p. 245)
그런데 이국재 이사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기업과 인권 포럼에서 인권을 무시한 기업인의 죽음이 발생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5편의 작품 중 가장 내 상식수준에서 이해하기 적당한 소설인데다 스릴러적 분위기가 있다보니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다.
『 이 세상 사람 』 - 이주란
그동안 여섯 번의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를 가도 불안하고 또 이사를 가도 불안한, 제게 집이라는 건 늘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며칠 전 선생님께서 보낸 우편물을 받았을 때도 도저히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 사람과 제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난다는 것. 아니, 그럼에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것, 저만 그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p. 277 )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나 지금껏 두려웠고 이제는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통지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두려운 이 마음을 아실런지요. 대체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며칠이 걸렸습니다. (p. 281)
저는 습관이 삶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습관을 만든 것은 거의 내던져졌다고 해야 타당할, 제게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해요. (p. 286)
지금도 별일 없이 하루가 가면 기분이 좀 이상한 게 그 때문일까요. 저라는 사람의심리의 원형이 그렇게 형성된 걸까요.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다행이다 싶기보다는 오늘이 무사히 갔으니 내일은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지요. 하루, 아무 일이 없는 할. 이를테면 평범한 하루.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 수많은 하루일 뿐인데, 그 사람은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 까요. (p. 291)
살면서 겪은 대부분의 고난을 지나왔고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인간을 이해했고 살면서 받은 대부분의 상처를 견뎌왔고 자주 웃기도 했으나 그 사람만은 끝내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p. 297)
내내 화자의 독백으로 서술되는 이 이야기에선 구체적인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순간의 화자의 심리에 대해 서술되고 그 심리가 풍기는 분위기가 느껴질 뿐이다. 스릴러 영화에서 어떤 결정적 장면이 등장하기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만 나오는 바로 그때의 그 순간을 묘사한 작품 같았다. 영화가 그 장면에서 끝났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자막이 올라간다고 상상해 보자. 자막으로 결말은 알았지만 결정적 장면은 보지 못했다. 관객의 기분은 어떨까? 그런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결정적 사건을 모르기에 화자가 말하는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 기담 (奇談 』 - 황정은
어쩌다보니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꽤 여럿 읽었던 터라 작가의 분위기가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기담'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기이함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는 '이사'다. 집을 옮기는 그 이사 말이다.
선인과 강희는 세입자로 오래 살았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집을 샀다. 2년이나 3년 주기로 자기들이 사는 집을 남에게 보여주고, 남이 사는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일단, 모르는 사람의 살림으로 끓어넘치는 낯선 집에 발을 들이는 일이었다. 남의 영문 모를 질서와 무질서, 남의 무신경, 남의 피로와 곤궁과 곤경을 목격하는 일이자 세입자를 향한 집주인의 적대감이나 집주인을 향한 세입자의 환멸을 목격하는 일이기도 했다. (p. 306)
월세와 전세로 여기저기 이사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무척 공감가는 내용일 것이다. 남의 집을 보는 것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보여주는 것도 정말 참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 요즘은 영끌이라도 해서 집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재산적 의미가 더 강하긴 하겠지만 집이 주는 안락함은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이유다.
내 이웃들은 이걸, 이 걱정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이건 별로 걱정은 아닌 걸까. 강희의 말대로 여기 사는 사람들에겐 걱정이 너무 많아서, 이 정도 걱정은 당장 걱정이 아닌 걸까. 그렇지 않다면 왜 몇 번이고 이걸 …… 다시 겪고 있을 까. 잠잠해졌다가도 뒤집히곤 하는 물결처럼 선인은 이웃을 향한 의구심과 분노와 환멸이 서서히 자라는 것을 느꼈다. (p. 319)
도시 중심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은 집들이에 와서 왜 이런 외곽 가파른 산동네 오래된 빌라를 샀느냐고 물었다. 아파트를 살아본 적 없어서 생각도 못했던 이 질문에 선인과 강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빌라가 낡아갈수록 생겨나는 불편함들에 대해 이웃들은 그저 내버려둘뿐 아무도 무엇에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 낯설진 않지만 역시나 황정은의 작품은 마음이 참.. 착잡해진다...
『 멋진 신세계 』 - 의외의 사실
'의외의 사실'이 필명인건가? 모르겠다;;; 그래픽노블인 이 작품은 짧은 만화로 만화가의 글과 그림에 대한 고충을 담은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이 잡지는 그 디자인이 멋지긴 한데 커다란 책 크기에 비해 글자가 너무 작아서 좀 아쉬웠다. 문예잡지라고 하면 대부분 그 안에 실린 소설들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이 책을 포함한 최근 읽은 문예잡지 2권은 모두 소설보다 논픽션 글들이 훨씬 좋았다. 단편은 언젠가 묶여나올 책으로도 읽을수 있겠지만 소설이 아닌 심도깊은 글들은 문예잡지이기에 읽을 수 있는 글들이기에 잡지로서의 매력을 한층 높여주고 있었다. 3호를 읽게 된다면 아마도 그런 논픽션글들에 대한 기대치로 선택하게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