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소금에 손대지 마, 그럼 괜찮을 거야"

우리가 처음 상상하는 특별한 인어가 나타났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미스터리 판타지

"그가 가진 백어석은 사람을 죽인 살인 도구였지만

그녀의 백어석은 빛을 담은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작가의 이름만 보고 선택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작가가 아니었다. 동명이인이었다. <세여자> 라는 감탄할 만한 역사소설을 쓴 조선희 작가의 차기작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동명의 판타지소설 작가였다. 하지만 굉장한 작품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바로 빠져들었다. 읽다보면 저절로 숨죽인 채 가빠오는 호흡이 느껴져 가끔 큰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강렬한 몰입감을 주는 책이었다. '인어'라는 판타지적 존재에 대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소설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를 전부 사실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했다. 그들에게는 늘 보이지 않는 사고의 원인이 따로 있었다. 무언가를 지키지 않았거나 무언가를 봤거나 무언가를 노하게 했거나. (p. 10)

백어도라는 섬이 있다. 그 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래동화 같던 그 이야기는 뱃사람들에게 유혹이자 저주였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 전설의 실체를 확인시켜준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백어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백어의 전설 때문이다. 사람만큼 큰 흰 물로기. 백어는 인어를 가리켰다. (p. 18)

망망대해에 솟아오른 작은 돌섬 백어도는 황량한 무인도이다. 그 돌섬 꼭대기에 무덤이 하나 있다. 섬에 있는 것이라고는 돌뿐이었기에 돌지를 쌓아놓은 돌무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이장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그 돌무덤이 열린 순간 백어의 전설이 현실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의문의 죽음이 연이어 발생한다.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해도 괜찮겠어?"

"내 소금만 손대지 마. 그럼 괜찮을 거야" (p. 33)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희고 단단한 것, 그것이 백어의 소금비늘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백어도 전설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벌어지던 일들에 대해. 평범하디 평범하기만 하던 용보는 그렇게 특별해도 너무 특별한 마리와 결혼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혼은 사람에게만 있다고 해. 사람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에게 깃들어 있는 것은 영 뿐, 혼 은 없대. 때문에 사람의 것은 영혼이고, 우리의 것은 영 과 정 이 결합된 정령이야. 그러니까 인어가 사람이 되려면, 혹은 사람으로라도 환생하려면 먼저 영혼을 얻어야 해. 그 영혼을 얻는 데는 조건이 있어. 사랑, 모든 저주를 풀 마법의 열쇠. (p. 42)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백어의 전설이었다. 인어는 아니 백어는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환생을 꿈꾸었다. 방법은 '사랑'. 동화와 같다. 하지만 인간남자가 백어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백어들에겐 '소금비늘' 이 있었다.

"백어의 비늘은 백어가 처음 한 번만 주는 거야. 그것만 행운이고 나머지는 전부 불운을 가져오지. 백어의 비늘을 훔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화가 난 백어가 자기 비늘로 소금 도둑의 목을 뎅강 잘라. 내 목이 잘리게 생겼는데 어떡해. 살려면 내가 먼저 백어의 목을 잘라야지" (p. 63)

아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 최동수는 면회 온 아들 순하에게 백어의 소금비늘을 훔쳤다고 말했다. 순하가 알던 어머니와 무덤속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그동안 외면하려 했지만 자신은 다른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어들의 전설에 이런 말이 전해져. 물 아래 세계가 있고 물 위 세계가 있다. 물속 세계가 있고 물 밖 세계가 있다. 서로 다른 세계로 건너간 자, 그것을 얻을 수 있다. (p. 65)

마리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과 함께 쓰여있던 문장들을 처음 읽었을때 용보는 무시했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고 글자는 낙서일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물속 백어만 물 밖 인간 세상에 건너오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방법은 양쪽 두갈래 였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 하나만 생각할 수 있었을 뿐이다. 용보는 그 하나의 길조차 알지 못했지만.

이 빛은 오직 백어의 비늘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어의 비늘 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보아도 알 수 없다. 누군가 백어의 비늘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 그 누군가는 어디서 백어의 비늘을 얻었을까? (p. 115)

순하는 비오던 날 우연히 벽화를 보았다. 그 그림에서 백어의 빛을 보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홀로 살던 순하에게 그 빛은 향수이자 뿌리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어석염 혹은 어염석 이라고 한다. 산호, 진주와 더불어 바다의 삼대보주로 일컬어진다. 고대 중국에서 산호는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효과가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악마의 눈으로부터 보호하는 부적으로 붉은 산호를 착용했다. 그러나 백어석의 운은 지닌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주성분이 탄산칼슘 96퍼센트인 산호는 손톱보다 조금 강한 정도의 경도를 지니고 있어 흠집이 쉽게 생기지만 백어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강도를 자랑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소금이기 때문에 민물에 닿으면 녹아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p. 119)

용보가 백어석의 존재를 알게된 후 검색한 결과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검색을 해보았다;;; 백어석은 당연히 소설의 판타지였다. 하지만 너무 실감이 나서 정말로 있을 것만 같았다.

교어와 혼인한 남자는 모두 살해당했다. 그들 중 염린을 탐하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p. 135)

용보에게 마리를 소개시켜 준 준희는 백어에 대해서도 백어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소금장사를 가업으로 확장시켜오면서 그 누구보다 백어석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대대로 모은 백어석 즉 염린으로 염린등을 완성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염린등에는 또다른 전설이 있었다.

진실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준희는 완성된 염린등이 자신에게 보여줄 진실이 궁금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순간 정신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염린의 빛에 홀릴 대로 홀렸다. 하지만 한 번도 환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는 이상 그 경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준희는 불운이 담긴 소금 비늘을 원하지 않았다. 불운 없이 소금 비늘을 얻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p. 139)

용보가 마리 몰래 염린을 몇개 들고 왔을때 준희는 용보가 불운을 시작했음을 알았다. 불운이 더 퍼지기 전에 염린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준희는 용보에게 염린을 샀다. 하지만 준희가 염린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영혼의 부재로 우리의 세계에는 언제나 현재만이 존재하지.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그러므로 시간은 언제나 멈춰 있어. 늙지만 늙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 늙음조차 현재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세지 않아. (p. 184)

마리는 자신의 소망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이제 소금도둑이었다. 하지만 용보와 마리 사이에 딸이 있었다. 섬 이라는 이름의 딸. 또다시 살해를 하고 싶진 않았다.

갓 태어난 백어는 고래 새끼나 사람의 아기처럼 반들반들한 피부를 갖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주름이 생기듯 백어는 소금 비늘이 돋아난다. 주름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듯 소금 비늘의 크기와 개수는 백어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준다. 민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없는 나이 많은 백어들은 온몸에 소금 비늘이 가득하다. 살아 있을 때 소금 비늘은 심해의 수압을 견디게 해주는 신체의 요긴한 일부이지만 죽고 난 후에는 그 무게 때문에 몸이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육신은 썩어 물거품이 되고 소금 비늘만 남는다. 소금 비늘은 보주가 되어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을 굴러다니지만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p. 192)

어디인지 모르는 곳을 찾아 헤매고 가져서는 안되는 것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이라면 사랑도 또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백어가 따라나선 남자들에게서 바란 사랑은 염린의 가치를 알게 된 후 차갑게 식어버리곤 했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하지만 꿈이라는 것이 원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계속 꾸는 것이듯 백어들의 꿈은 시대를 이어오며 계속 시도되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은 계속 꿀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마리가 물에 흠뻒 젖은 채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던 바로 그날 그 순간, 그는 마리가 품고 있던 백어석의 빛을 알아보았다. 가슴이 울렁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 혼자 다르지 않아. 그는 충만감에 휩싸였다. (p. 203)

소금도둑 용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섬을 데리고 거리의 화가로 돌아온 마리를 만난 순하는 백어의 빛을 알아보았다. 마리도 순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순하는 궁금했고 마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용보는 마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준희는 용보에게 백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의 운명은 얽혀들었다.

"옛 기록에 그렇게 나와. 뭍으로 올라온 수인들은 거문고나 해금, 적과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인다. 그들에게 소리는 다양한 전달 효과를 갖는다. 정확히 말하면 소리라기보다는 공기의 진동을 뜻하지"

"그 기록이 사실인지 누가 알겠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사람은 평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채로 살다가 죽어. 세상엔 우리가 본 것보다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지. 내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야" (p. 266)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만해라"

"백어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장봉도나 거문도 같은 서남 해안에서 인어를 잡았다가 놓아주고 만선했다는 이야기는 너도 들어봤을 거야. 신지끼에 대해서도 들어봤을 거고, 경상남도의 어느 소금 장수가 인어와 교접하고 아들을 얻어 아버지의 묫자리를 지켰다는 이야기도 있지. 인어가 준 토산을 먹고 3백년을 넘게 산 낭간의 이야기도 있어. 18세기 보르네오에서는 푸른 눈에 물갈퀴를 가진 인어가 잡혔다고 하지"

"상상이야. 와전된 거고, 콩쥐팥쥐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동시에 상상해낼 수 있는데?" (p. 274, 275)

작가의 백어에 대한 설명은 치밀했다. 앞서 나도 모르게 검색해봤던 것처럼, 역사서를 찾으면 그 구절이 정말 있을 것만 같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역사서에 기록이 없더라도 신기하지 않은가?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에 공존한다.

용보는 아무리 많은 설명을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다. 마리와 섬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마리는 소금도둑을 죽이는 백어라고 한다.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마리가 백어라는 것은 믿어져도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백어의 전설을 잊었다. 백어의 비늘이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덕재는 백어의 비늘을 언제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따. 동짓날이면서 음력으로 그믐이나 초하룻날이고, 시각이 자정이면 삼음이 겹쳐 가장 어두운 날이 된다. 삼음이 겹치는 그믐날은 19년에 한 번씩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백어를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들은 백어와 엮이면 살해당한다는 기록을 믿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백어가 아니라 백어의 비늘이었다. (p. 280)

준희가 열세살이었을때 삼음이 겹치던 그믐날밤에 아버지와 백어도에 있었다. 백어도에는 백어들이 올라오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소금비늘을 떨어뜨리고 먼동이 틀무렵 소금비늘을 모두 벗은 백어는 바다로 돌아간다는 전설의 웅덩이가 있었다. 아침이면 그 소금비늘들은 모두 웅덩이물에 녹아버릴 터였다.

바다로 나간 백어는 지나가는 배를 흔든다. 갓 비늘을 벗은 백어는 남자의 나이를 세지 못한다. 흔들리는 배에서 자칫 바다로 떨어지는 남자들 중 누구든 처음 본 남자에게 백어는 손을 뻗는다. 그렇게 백어는 자신이 살린 남자를 뭍으로 올려 보내며 따라가는 것이다. (p. 281)

마리가 처음 본 남자가 용보는 아니었다. 인어공주의 동화는 소설속에서 현실로 더 구체화 되었다. 용에게 역린이 있다면 백어에게는 염린이 있었다. 둘다 치명적인 비늘이었다.

단숨에 읽혀지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탄탄한 판타지는 현실감을 높여서 나도 모르게 그 기묘함에 포옥 빠져들었다.

소금비늘의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해졌다. 거의가 목숨을 잃곤 했다. 하지만 용보, 준희, 순하 세 남자는 마리의 염린을 알고 있지만 전설은 실현된듯 실현되지 않았기에 이 소설은 어찌보면 새드엔딩이고 어찌보면 해피엔딩이었다. 어떤 엔딩을 상상해도 아마 그 이상일 것이다. 치명적인 인어의 판타지에 홀리고 싶은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해주고 싶다.

말이 전하는 온기와 상처, 말이 가진 무게, 약속의 소중함, 행운과 불운을 향한 선택, 그 밖의 이런저런 입장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소금 비늘을 향한 용보의 욕망은 물질입니다. 물질을 갖춘 준희의 욕망은 지적 호기심입니다. 순하의 욕망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진실에 닿는 겁니다. 용보의 자랑인 고운 손은 운올 좇고 순하의 거친 손은 성실함을 살아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너와 너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곧 나와 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후회를 합니다. 때론 후회할 것을 알면서 후회할 일을 선택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백어와 인간은 각자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가며 다음을 기약하고 더 나은,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을 결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저도 여러분도. (p. 452, 453, 454 - 작가의 말 中)

ps. 어찌보면 삶에 결말은 없다. 결말은 죽은 뒤에 나오므로 살아있는 동안은 결말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결말은 사실 결말이 아니다. 하지만 선택에는 항상 그에 따른 결과가 따라온다. 인간들의 욕망도 백어들의 꿈도 그 실현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사랑'이다. 사랑을 잊은 순간 욕망은 탐욕이 되고 꿈은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결말이란 멈추지 않는 사랑과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