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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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

이름은 종종 들어봤었다. 역사에서나 시에서 등등...

위인전에서 생애를 몰라도 표지에 쓰여있는 이름은 알듯이 페트라르카 라는 이름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름으로만 알던 역사적 인물의 책이 새로 나왔다길래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표지를 보는 순간 조금 후회가 되려 했다. 페트라르카 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초상화이긴 한데... 중세 신학자의 복장에 계관시인이라는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꽌을 쓴 모습이니 딱 저 그림이긴 한데... 표정이;;;

다른 초상화를 찾아 봤지만 별로 없다;;; 그나마 동상이 좀더 멋있는 것 같다. 동상의 모습으로 기억에 새겨두어야 겠다. ㅎㅎ

여하튼 표지 속 초상화는 살짝 기운빠지게 하지만 내용은 예상외로 흥미진진했다.

 

 

페트라르카 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정보가 워낙 없다보니 책의 가장 뒷부분 <작품해설> 부터 읽었다. 그렇게 읽고 본문을 읽으니 한결 이해가 쉬웠다. 나처럼 페트라르카 에 대해 생소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작품해설 부터 볼 것을 권유해 본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 혹은 르네상스의 바탕을 깔아준 인문학자로 불리곤 하는 페트라르카 는 1304년 이탈리아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평생 여행을 많이 했는데 잦은 거주지 변경으로 마음의 피로나 권태를 풀었다고 한다. 법률을 전공했으나 성직자 된 이유는 문학 활동에 필요한 여유와 한가함을 위한 경제적 기반 때문이었다. 소년시절에는 키케로의 학문, 청년시절에는 연인 라우라의 만남에 영향을 받았으나 성직자가 된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페트라르카는 풍부한 고전적 교양을 갖춘 당대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성직자 다운 도덕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만 봤을때 나는 단순하게 페트라르카의 편지들을 모은 책이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페트라르카에게 있어 편지는 문학적 기법이었다. 즉 서간집은 문학작품으로 쓰여진 글의 모음이었다. 따라서 문학적 요구에 따라 서간에 대폭적 손질을 하거나 내용을 고치고 바꾸어 보편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페트라르카에게 있어 서간 작성은 중용한 문학적 자기 훈련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편지를 써서 보낼 때는 그 사본을 떠서 보존하고, 그 후에도 계속 고치고 다듬는 습관을 가졌다고 하는데, 플라톤 시대의 작품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체로 쓰여졌는데비해 중세시대의 작품이 일방적 편지 형식으로 변경된것은 종교적 영향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페트라르카의 방대한 라틴어 서간집 중에서 일부를 선별한 것으로 원본 번역 텍스트마다 해설을 붙이고 있어서 읽는데 한결 쉽게 느껴졌다. 또한 시간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묶여 있다보니 페트라르카의 다방면의 활동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페트라르카 자신에 대한 서간문들은 인물됨됨이에 대해, 문학 관련 서간문들은 문학적 열정에 대해, 조국과 정치 관련 서간문들은 애국심에 대해, 로마 관련 서간문들은 공화정에 대한 향수에 대해, 고대문화 관련 서간문들은 고전의 깊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로마 고전에 대한 다양한 인용문들이 있어 좋았다. 역사서를 읽으며 친숙해진 이름들이 나올때마다 괜히 반갑고 최근에 읽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는 보에티우스의 연장선에서 읽혀지면서 중세의 암흑이나 지나친 종교색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 점이 신선했다. 산문 사이에 가끔 등장하는 운문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서간문이 문학의 한 방법이었던 만큼 편지의 대상은 실제적 인물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고대의 인물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미래의 후세대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는데 후세인(後世人)에게 쓴 편지에서는 자신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분명 여러 가지로 거론될 것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진실에 이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판에는 무릇 척도가 없습니다. 어쨌든 나도 당신 동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죽어야 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p. 77) 청춘은 나를 현혹했고 장년기는 타락시켰지만 노년은 나를 바로잡고 옛날 책에서 배운 것의 진실을 경험으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p. 78) 나의 천성은 날카롭기보다는 조화로움이어서 모든 건전하고 좋은 연구에 적합했지만, 특히 도덕 철학과 시학에 적합했습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나는 시학을 소홀히 하여 종교문학에 끌려갔고, 그곳에 이전에는 꺼려하고 있던 숨겨진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시쪽은 오직 꾸밈을 위해서만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연구 중에서도 저는 오로지 고대를 아는 데 열중했습니다. 이 현시대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 82) 내가 법률 연구를 포기한 이유는, 사실 사람들의 나쁜 의도로 인해 법률의 운용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 86)

[후세인에게 보내는 서간]은 거의 자서전이라 할 정도로 자신의 생애와 업적과 인연들에 대해 길게 쓰여진 서한인데 역자에 따르면 고대인에게 보내는 서간에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인에게 보내는 서간]은 책에 실려있지 않아서 어떻게 상응되는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페트라르카가 서간문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서간이었다.

모든 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을 떠올려 보세요. 로마인을, 그리스인을, 게다가 그 이외의 사람들을, 그들 중 누가 살아 있을 때에 명성을 잃지 않았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인물 중에서 오직 스키피오 대 아프리카누스 만이 그 명성에 의해 우러러 칭송을 받았습니다. (p. 119)

페트라르카 는 스키피오를 정말 존경했나 보다. 스키피오의 전쟁을 다룬 <아프리카> 라는 서사시도 썼다고 한다.

페트라르카는 생각보다 당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시인이자 역사가'로서 계관을 수여받았던 대관식은 1341년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성대한 의식속에 치뤄줬다고 한다. 개선장군의 행렬도 아니고 황제 대관식도 아닌 시인을 위한 성대한 계관식이라...

조각상은 몸의 초상이며 범례는 아름다운 덕성의 초상이라고 해도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활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모방은 한 쌍의 빛나는 라틴어의 별을 만들어 냈습니다.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입니다. 이렇게 이제 우리는 웅변이라는 분야에서도 그리스인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를 닮고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를 추종하고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는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고 키케로는 스승을 능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p. 156)

로마고전을 좋아하고 깊이 연구한 페트라르카는 그의 글 속에 고전을 수시로 인용했다. 그러한 범례 사용에서 그의 자부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키케로는 페트라르카가 가장 존경한 위인이었다. 고대로마위인들에 대한 칭송이 가끔 과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책의 말미에 가서 시대적 배경이 드러난 서간문을 읽고 나면 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페트라르카가 살던 시대에는 교황이 아비뇽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다. 모국 이탈리아의 현실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수시로 개탄하고 직설적으로 글을 쓰곤 했다. 그런 그의 글 속에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과 영광이 대비되면서 더욱 이탈리아의 참상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마음이 드러나곤 했다.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교황청을 '서방 바빌론' 이라 부르며 혐오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글은 이탈리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나아가 유럽 내에서의 명성을 높였다.

구원의 길을 가리켜 주는 인도자라면 누구라도 경멸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어떻게 진리의 탐구에 방해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로 플라톤의 학파는 진정한 신앙을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쳐 권하고 있고, 키케로의 책은 그것으로 똑바로 이끌어 줍니다. (p. 236) 독자가 하느님의 진리의 빛에 비추어 무엇에 따르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은 독서는 좀처럼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빛으로 인도된다면 모든 것이 안전합니다. (p. 237)

고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를 역사에 인본주의자로 남게 했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으로 기록하게 했나 보다. 페트라르카는 라틴 고전문학이 모든 문학의 정점에 위치해 문학의 완성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한 그의 태도는 고전을 다시 부흥시키는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페트라르카의 정치적 혁신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서간문은 [호민관 콜라와 로마 인민에게]라는 편지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서간문인것 같은데 콜라혁명을 일으킨 '콜라'라는 젊은 지식인에게 보낸 것으로 고대로마의 역사를 길게 훑어내리며 공화정으로의 복귀라는 희망을 열렬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는 왕정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혁명은 실패했고 페트라르카는 실망하여 결국 황제라도 와달라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이조차 응답받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 이탈리아에는 교황도 황제도 없는 즉 절대권력이 없는 분열상태였다보니 페트라르카가 마음껏 문학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 나는 이미 모든 인간적 욕망의 불길에서 거의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하다고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모든 죄를 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끝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p. 324) 어떤 병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나는 책에 싫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물에 있어서도 비슷한 일이 책에 있어서도 생기는 것입니다. 즉, 욕구의 충족은 한층 더 탐욕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책은 우리를 마음속으로부터 즐겁게 해주고 대화하고 조언하며 생생한 친밀함으로 우리와 연결됩니다. 게다가 책은 각각이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의 이름도 숨어들게 하여 서로 욕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p. 325)

페트라르카에게 급 친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책에 대한 욕망!!! ㅎㅎㅎ

휴머니즘, 인본주의, 르네상스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페트라르카는 좀 낯설었는데 그의 글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페트라르카 는 왠지 중세인답지 않은 묘한 활동성을 느끼게 해주면서 친근감이 들기도 했다. 키케로의 서간집을 보고 자신의 서간집을 구상했을 만큼 키케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과 고대문헌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보며 보에티우스와의 세월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선했다. 여하튼 표지가 주는 아쉬움에 비해 예상외로 재미있고 새롭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사를 좋아하고 고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중세학자를 이런 기분으로 읽을 수도 있구나~ 읽을 책이 많아도 너무 많은 참 좋은 세상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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