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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타자기 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향수어린 기분이 든다. 자판이 익숙해진 시대에 타자기를 쳐본 경험 아니 타자기를 본적이라도 있는 사람이 드물 것 같다. 어렸을때 타자기를 몇번 쳐볼 기회가 있었다. 그야말로 독수리타법으로 한글자씩 톡톡 누를 때마다 종이에 바로 활자가 찍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손가락에 느껴지는 타격감과 동시에 입체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타자기를 사용하는 인물이 나오면 왠지 더 멋있어 보이곤 했다.
기린은 또 어떤 연관일까... 싶었는데 작가가 말한 기린은 내가 아는 목이 긴 그 기린이 아니었다. 상상속의 동물 기린이라... 검색해봤다. 동양신화 속 상상의 동물이라 하면 청룡, 봉황, 현무, 백호 같은 사신도에 그려진 동물들만 알았는데, 백호 자리엔 사실 기린이 더 어울려 보였다. 여러 동물의 모습에서 조금씩 따온 모습의 기린은 비슷하게 상상되어진 봉황, 현무, 청룡 처럼 신화적 다른 이름이었으면 목이 긴 기린과 헤깔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동물이었다.
'기린의 타자기'는 이렇게 과거의 타자기와 판타지적 기린을 묶어 놓음으로써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작품을 읽다보면 스릴러인가? 싶을 정도로 쫄깃한 서사가 등장하고, 액자소설 형식이라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등장하기 때문에 소설속 현실과 소설속 가상의 세계를 왔다갔다하다보면 현실과 가상이 자꾸 중첩되지만 결말에 이를 때쯤이면 그 모든 의아함들이 저절로 해소되는 잘 짜여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성장소설이었다.
"그럼 네 오빠 다시 길 거리로 나 앉아도 돼? 오빠랑 애들도? 엄마는? 엄마 한 달에 당뇨, 관절염 치료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아버지 암 치료는, 그 비싼 약값은? 네 남편이 병원비 내주고, 약값 대주고 언니 오빠 사업 다 도와주고 이런 큰 집에서 살게 해줬으니까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야" (p. 20)
서영이 시댁식구들에게 맞아죽을 뻔 하던 날 겨우 도망쳐 갔던 친정집에서 서영은 시댁으로 되돌려보내졌다. 그렇게 친정집의 제물이 되어 시댁에서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던 나날 중에 태어난 남매 지하,지민 에게 엄마노릇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여느 날 처럼 남편이 닥치는 데로 집어던지며 폭력을 행사하던 중 서영의 결혼전 아끼던 타자기를 던지려 했을때 지하가 막아섰다. 대신 맞은 지하는 피를 흘리며 집에서 도망쳤다.
입주도우미가 몰래 전해준 물건은 소포였다. 수신인에 나서영이라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없었다. 소포 봉투를 찢자 책이 나왔다. 하얀 배경에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는 듯한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표지였다. 표지의 분위기와 제목을 보니 미스터리 소설 같았다. '조용한 세상'이라는 제목 옆에 적혀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서영은 흠칫했다. 류지하, 작가의 이름이 딸의 이름과 같았다. (p. 35)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채 살던 서영에게 6년만에 딸의 소식을 알게 해준 건 소설 한 권이었다.
타자기는 그때 당선을 축하한다며 친구 우탁이 사준 것이다. 우탁은 서영을 기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기린이란 '재능이 남다른 사람'을 부를 때 붙이는 이름이며 상상 속의 동물이기도 하기에 우탁의 선물엔 '이 타자기로 네 상상력을 마구 쏟아내길 바란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우탁이 보는 앞에서 타자기 위에 네임펜으로 '기린의 타자기-우탁&서영'이라고 적어 넣었다. (p. 38)
소설 속에서 현실의 실명들과 마주치다 보니 소설의 허구성은 점점 사라지고 현실성이 극대화됐다. (p. 78)
자신의 꿈을 잊고 산지 오래였다. 기린의 타자기... 그 타자기가 소설의 제목이 되어 서영에게 왔고 그 소설의 작가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리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자신의 가족을 캐릭터로 활용하며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소설 속에 빠져든 서영은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소설로 읽으며 역으로 소설이 알려주는 자신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시 인식하게 되기 시작한다. 지하는 언제 어떻게 이렇게 어른이 된 것일까...
초기엔 사람들이 순간이동의 순간을 목격하더라도 대부분은 잘못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하와 이든은 경계심 없이 행동했다. 도시에는 사람의 눈보다 CCTV의 눈이 더 많이 잠복해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제 도시는 CCTV에 파파라치의 눈까지 더해졌다. (p. 51)
이든을 만난 3년 동안 두 사람은 지하의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전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하루 만에 7개국을 구경한 날도 있었다. (p. 65)
'순간이동자'가 등장한다. 사진을 보고 그 사진 속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은 영화 '점퍼'를 생각나게 했다. 영화 속 점퍼 처럼 '순간이동자'가 된 지하는 사진을 벽 한가득 붙여놓고 그 사진속 장소로 순간이동한다. 그렇게 은행 금고도 다녀왔고 그 돈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FBI가 수사망을 좁혀오던 순간 한국으로 순간이동한다.
지하는 자신의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금니가 심하게 흔들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어금니가 쑥 빠졌다. 이든은 지하가 뺀 어금니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 이, 이거 혹시 순간이동 부작용 같은 거 아냐? 울프 앞다리랑 가슴 사이에 커다란 종양이 생겼어.크기를 보니 그동안 자라고 있었던 것 같아. (p. 155)
시간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p. 172)
순간이동을 거듭하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지하,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반려견 울프의 몸에도 병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정지하기 시작했다. 부작용인 것일까... 여러 시간대를 옮겨 다니며 치명적 부상을 입는 상황이 최근 봤던 드라마 '더 킹'을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엔 평행세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 노트북에 쓰면 이상하게 쓴 만큼의 문장을 삭제하는 게 쉽지 않아.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펜으로 쓰면 버리긴 쉽지만 단단한 문장이 나오지 않아. 타자기를 글쇠를 칠 때마다 단어들이 뇌 속에 각인되는 느낌이거든. 초고는 글의 전체적인 플롯을 짜는 작업인데 타자기로 하면 집중이 잘 돼.
- 노트북 화면 속의 문장은 손에 쥘 수 없기 때문에 불안감이 바탕에 깔려 있지. 하지만 타자기는 활자를 찍는 순간, 종이에 남으니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덜하지. 그런 요소도 있지 않아?
- 맞아. 컴퓨터의 커서는 인내심이 없어.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1초마다 깜빡이면서 불안감을 줘. 그러니까 쫓기듯 생각을 쏟아내게 만들어. 그런데 타자기는 문장이 끝난 그곳에서 진득하게 기다려주잖아. 충분히 생각하고 다시 돌아와, 그때까지 기다라고 있을게, 라고 말해주지. (p. 165)
지하는 청각장애인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하다. 작가를 꿈꾸는 지하에게 남다른 촉각과 시각적 효과를 느끼게 해주는 타자기는 지하의 글을 현실화해주는 매개체였다. 지하가 타자기로 글을 쓰는 부분을 읽으면서 작가들마다 고유한 집필방식이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손으로 쓰는 것을 고수하는 작가도 있고 노트북으로 고쳐쓰는 작가도 있을 터인데 타자기로 쓰는 작가는 여전히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하는 심하게 불안하거나 화가 나거나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사라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예전처럼 가고 싶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은 두번 다시 가질 수 없었다. 대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어딘가로 소환됐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p. 189)
한국에서 꿈에 그리던 작가가 된 지하. 첫 소설을 발표하고 독자사인회를 개최하게 된 날 지하는 갑자기 사라진다. 한국에 온 이후 언제부터인가 순간이동능력은 조절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돌아오고 나면 그동안의 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울프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니 대표가 보냈다던 책이 배달되어 있었다. [조용한 세상] 20권. 류지하의 첫 장편소설. 그는 자신이 일러스트 작업을 한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련하게 깨어나는 새벽의 도시를 배경으로 몸의 절반이 사라져가는 지하를 표현했다. (p. 190)
그 일을 당한 사람이 온라인 어딘가에 글을 올렸을 법한데도 조용하다. 마치 순간이동자 관련 글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을 향해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p. 192)
'아……아 그것이 다시 시작됐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만 알고 있는 비밀경고였다. 201이라는 모스부호가 적힌 카드가 도착하면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p. 228)
이든이 그려준 지하의 첫 소설 표지, 이 그림이 이 책의 표지에 그려진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라져가는 지하... 그리고 사라져가는 지하의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은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고 서로 연관이 있어보이다가도 연관이 없어보이기도 하는데, 지하의 엄마 서영이 읽는 액자소설과 지하가 경험하는 액자세계는 이 책을 덮을때즈음 맞물리면서 현실세계에서 그 빈 구멍들이 이해되어지게 된다.
공포야말로 대부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강력한 방법이다.
지하는 그 문장을 아주 오랫동안 곱씹었고 공포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들은 내용의 변주는 있어도 결론은 같았다. 주인공이 공포를 극복하는 순간, 갈등이 해소된다는 것. (p. 266)
그런가... 공포영화가.. 그런가...
나는 공포영화를 못 본다. 보고나면 너무 찜찜해서;;; 공포영화들 속에 주인공들이 공포를 극복한 경우가 있었던가... 그런 해피엔딩적 결말이라면 공포영화도 무서워 하지 않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에필로그가 남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되었든 책이 끝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페이지가 줄어들 수록 마치 그녀의 생에 대해 조언하고, 힘을 내라고 응원해주는 가까운 사람이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필로그 까지 다 보고 책을 덮으면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서영은 그나마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p. 275)
집 나간 딸이 소설을 통해 전해주는 메세지가 엄마 서영을 다시 살게 하고 있었다. 엄마보다 나은 딸인 셈이다. 그래서 엄마 서영은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딸의 메세지를 다시 받지 못할 것 같아서 아직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다. 아껴두고 싶은 결말일 수도 있고 보고싶지 않은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현실 같은 소설일지라도 소설은 허구이기에 어쩌면 희망일수도 있겠다.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지하는 흠칫했다. 청회색의 큼직한 후드가 달린 롱카디건을 입고 검은색 반장갑을 낀 긴 머리의 여자가 피식 웃었다. 지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p. 283)
알고 있다. 카드에 적힌 오늘 날짜.
-서둘러야 할 거야. 돌아가서 엄마와 네 자신을 구해. (p. 285)
마무리되지 않는 지하의 세계들은 이런저런 암시를 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평행세계를 연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지하는 자신의 세계가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아직 그 세계를 깨뜨릴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을 '로그아웃' 할 시간이. 그리고 이때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짜 소설이 시작된다.
백일몽은 겉으로 보기엔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창조성과 학습의 숨겨진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뇌와 백일몽을 꾸는 뇌다.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땐 상상에 잠긴 네트워크를 차단한다. (p. 302)
책속에서도 언급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나도 참 좋아하는 영화다. 열심히 살던 월터에게 갑자기 닥친 시련?!은 그에게 엄청난 여정을 하게 만들고 그 여정들은 상상과 겹쳐지면서 현실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현실은 월터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영화를 보고 난 나에게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소설은 세상에 나갔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소설 속 문장 하나라도 독자들의 마음에 씨앗으로 남길 바랐다. 6년 후 약속한 장소에 어쩌면 엄마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6년 후 그날이 모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p. 397)
6년만에 만난 서영과 지하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6년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홀로서기는 두 사람에게 모두 필요한 과정이리라.
순간이동의 판타지에 호기심을 갖다가 대물림되는 가정폭력에 분기탱천하다가 살인사건이라는 스릴러에 몰입되다가 어느새 따듯해진 현실로 돌아와 마지막장을 덮게 되는 이 소설은,
여고생 지하가 사회초년생으로 자라는 과정을 함께 하며, 과거 속에 묻혀 살던 서영이 현실로 한발 내딛는 과정을 함께 하며, 두 사람 모두에게 저절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다 보면 마지막장을 덮게 되는 이 소설은,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듯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