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타는 사막에서 피어난 꽃' 처럼 오아시스 도시들은 한때 찬란했고 한때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유산처럼 남아있는 도시들이다.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답사한다는 것이, 그렇게 과거의 흔적들을 살펴본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일일수는 없는 거겠지만, 이 책처럼 읽으며 마음이 슬펐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유홍준님의 유려한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실크로드 라는 비단결같은 고운이름 속에 숨겨진 척박한 가장자리들의 삶이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짠해졌다.

실크로드는 길 이름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유명한 길이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구체적 경로는 그닥 알려지지 않은듯도 싶다. '로드' 의 유적답사는 지도을 알고 보는 것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실감나게 읽힌다. 그래서 이 책의 처음도 지도로 시작한다.

 

 

동쪽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가는 길의 여정은 알겠는데, 역사를 바탕으로 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좀더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지도를 함께 알아두는 것이 맥락이해에 도움이 된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에 의해 열린 길이다. 타클라마칸사막을 둘러싼 이 길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 지역은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데 산맥을 경계로 티벳자치구와 닿아있다. 이 두 자치구는 지도에서 차지하는 크기 대비 발달한 도시가 매우 적다. 이것은 땅은 넓으나 사람이 살만한 땅이 별로 없다는 의미다. 높은 산맥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서로다른 문화권의 자연경계에 해당했다. 이 자연경계로 인한 완충지들 덕분에 중국은 오랜기간 나홀로우뚝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다 실크로드가 열렸고 문명의 흥망성쇠에 따라 비슷하듯 다른 다른 길들도 열렸다.

여름이면 40도를 넘나드는 불타는 사막에서도 일년내내 녹지않는 만년설이 흘려보내주는 강물을 마시며 살았던 곳이 바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양쪽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이 도시들은 문명의 혼합지였고 강력한 왕권들의 도전처였다. 불교문화의 시작이 이곳이었고 이슬람문화의 끝이 이곳이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카라반들이 낙타를 몰고 구릉을 따라 사막을 건너가는 처연한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실크로드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타림분지에는 작은 오아시스 왕국들이 넓게 퍼져 있었다. 카라반의 상품 교역은 오아시스 도시와 도시를 이어가며 행해졌다. 실크로드는 선이 아니라 점에서 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타림분지 주위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5천년 전의 신석기시대 토기, 4천년 전의 미라, 3천년 전의 청동기 등이 오아시스 도시들의 오랜 역사를 증언해 준다.(p. 9)

 

'책을 펴내며' 머릿말부터 나의 좁은 상식들을 깨트려 준다. 실크로드 하면 사막, 사막하면 오아시스 도시, 오아시스 도시하면 연못이나 호수같은 고인물 근처의 작은 촌락 을 연상하게 되지만 다~ 아니었다. 중국의 실크로드는 사막뿐만 아니라 살을에는 추위의 산맥을 넘어야 했고 도시들은 흐르는 강을 따라 강변에 건설되었으며 그 기원은 실크로드가 있기 훨씬 전 석기시대부터 존재해온 고대도시국가들이었다. 무엇보다 실크로드 라는 부드럽게 흐르는 느낌의 길이 아니라 '점'에서 '점'으로 이어진 길이었다는 것이 가장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러다 기원전 2세기,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이 조용한 오아시스 왕국들의 평화로운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비단과 옥을 매개로 한 카라반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동서교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역대 중원의 제국들이 격렬하게 다투면서 그 틈바구니의 오아시스 왕국들은 온갖 고통을 겪게 되었다.

상인들이 개척해놓은 그 길을 따라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왔다. 불교를 전파하러 가는 서역승과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서 천축(인도)으로 가는 입축승의 발길이 이어졌다.

결국 죽음의 사막을 뚫은 것은 돈과 신앙이었다. (p. 10)

 

길은 서로를 연결하게 하고 연결되면서 서로다른 마음을 확인하게 한다. '돈과 신앙' 이 뚫은 길은 실크로드 뿐만이 아닐 것이다.

시각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도 동반하는 법이라고 한다. 뭔가 변해도 변했을 것 같다. (p. 15)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은 책으로만 익힌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일단 마음에서 솟아나는 애정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국내 유수한 곳을 답사하며 글을 쓴 저자도 중국을 답사하며 전과 다르게 느끼는 본인을 깨달으셨다는데 하물며 어쩌다 책으로나마 조금씩 답사를 느끼는 나는 그 감동을 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기행문과 답사기 사이에서 고민하다 그동안 유지해온 답사기의 기조(정확하게, 재미있게, 유익하게)를 지키며 글을 써주신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실크로드에 대한 애잔한 감정의 절반은 누란에서 나온다. 그네들의 역사가 더없이 아프고, 그네들의 최후는 마냥 슬프기만 한데 탐험가들의 증언은 신비롭다. (p. 17)

어떤 그림에는 티투스 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것이 로마 글자가 아니라 고대 인도어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 며칠간 그는 중국 변경의 어느 사원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속해 있던 시리아나 다른 동방 지역에 위치한 어느 저택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발굴했다고 한다. '붉은 수염에 파란 눈'의 누란 사람은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쿠샨왕조에 가까웠고, 그리스 미술과 만난 불교미술이 누란까지 이렇게 전파된 것이었다. (p. 42)

불교사원의 유적지 기둥 밑부분에 '날개 달린 천사' 벽화가 그려진 곳 누란, 이미 사막속에 묻힌 지 오래라 지금은 사라진 도시이기에 근대 유럽탐험가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는 누란 이라는 도시를 시작으로 한 이 답사기는 이렇듯 힌비롭게 시작한다. 최근 로마사를 읽은 나로서는 '티투스' 라는 로마인 이름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기원전 중국 변방도시에 로마문화라니 wow

한결같이 카누 모양의 배를 뒤집어놓은 모양의 관에 우리나라 관의 칠성판처럼 여러 개의 넓적한 널빤지로 뚜껑이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소가죽이 넓게 덮여 있었다. 바닥은 따로 만들지 않고 모래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듯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던 것처럼 보였다. (p. 49)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샘의 도시가 아니라 강의 도시였다. 관을 배모양으로 만들만큼 그들에게 강은 중요한 영적 장소였다. 사막기후인 땅인지라 누란의 고대무덤들에서는 미라도 다수 발견되었다. 사막에 배모양 관이라... 얼마전 김훈 작가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속 초원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년설의 강물을 젖줄로 삼은 초원부족들에게도 배는 저승길에 동반자였다.

하지만 이 '누란'은 핵실험 장소로 45차례 사용되면서 지금은 군사보호구역이라 가볼수 없는 곳이 되었다. 가봐도 사막뿐이겠지만...

결국 나로 하여금 타클라마칸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답사하게끔 바람을 불어넣은 것은 투르판의 유혹이었다. 그리고 내가 실크로드 답사기의 제목을 '불타는 사막에 피어나는 꽃'이라 붙인 것 역시 오아시스 도시들을 순례하면서 받은 전체적인 인상 중에서 투르판에서 받은 감동을 가리킨 것이다. (p. 57)

지배자와 주민이 바뀌면서 투르판에는 계속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다. 하나의 문화가 정착되기 무섭게 또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다 이러한 문화의 변천은 어느 오아시스 도시보다 다채로웠고 그 흔적이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에 뚜렷이 남아있다. 종교도 불교, 이슬람교뿐 아니라 유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교, 마니교까지 그 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문명사가들은 투르판을 '문명의 용광로'라고 말하기도 한다. (p. 60)

생전 처음 보는 도시 이름 '투르판'에서 이렇게 다양한 단어들을 한꺼번에 보게될줄 몰랐다. 투르판이 이렇게 문명의 용광로가 된 것은 그 지리적 환경에 영향이 크다. 그래서 이곳은 중국문화, 인도문화, 그리스로마문화, 이슬람문화 의 흔적을 모두 볼수 있는 곳이다. 자연적으로도 도심 바로 옆에 쿰타크사막이 있어(저자는 실크로드 답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풍광이 쿰타크사막이었다고 한다) 한곳에서 유구한 세월을 지금도 느낄 수 있게 한다, 문명의 흔적은 신석기시대때부터 있었으며 지금까지 삶이 이어지고 있는곳, 따라서 넓은 땅에 다양한 폐허들이 존재한다.

답사는 찾아가는 유적지 못지않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적지가 처한 지리적 환경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p. 61)

역사는 유적·유물과 함께 기억할 때 이미지가 선명학 그려지기 때문에 한 지역의 답사는 역사 순서로 진행하는 것이 요령이다. (p. 74)

어느 답사나 마찬가지이지만 중국 답사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유적지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곳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p. 100)

책을 읽으며 답사기로서의 배울점도 많았다.

폐허에는 폐허 나름의 미학이 있다. 같은 폐허라도 로마 시대의 대규모 목욕탕인 카라칼라 대욕장이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곳은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인간 공력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우리 산천에 널려 있는 폐사지를 보면 화려한 건축이 있는 절집보다는 풀숲에 묻혀 있는 주춧돌과 무너진 석탑에서 오히려 조용한 선미가 느껴진다. 이에 반해 지금 교하고성 폐허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치장이 업는 흙벽이기 때문에 어떤 상상도 필요치 않다. 세월의 흐름 속에 모든 빛깔과 장식적인 형태미가 다 제거된 골격이 주는 건축물의 원형질을 보여줄 따름이다 콤타크사막에서 대자연에 압도되는 경외심이 올라왔다면 여기서는 인간 삶의 원초적 향기가 일어난다. 참으로 위대한 폐허였다. (p. 86)

쿰타크 사막이 대자연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주는 장엄한 울림이었다면, 고창고성의 폐허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체취가 뼛속까지 스며오는 숭고의 감정이었다. (p. 105)

폐허의 미학... 마음에 든다. 언젠가 내가 어떤 유적지에 가서 무심하게 돌무더기를 바라보게 되었을때, 그 너른 땅에 무너져 내린 돌조각들을 보며 '폐허의 미학'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다 이 책 덕분이다.

정방형에 가까운 이 마당 한 변의 길이가 25미터 정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최대 거리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표정까지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12미터 정도이기 때문에 이 공간 가운데 있으면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다 읽을 수 있는 셈이 되죠. 해서 이런 크기의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절간의 마당도 이 크기를 넘지 않고, 공연장 역시 이 크기 이상이면 다른 차원의 공연이 됩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인간 감각과 신체조건의 한계에 바탕을 둔 휴먼 스케일에 대해 열심히 연구해서 이런 결론을 얻어냈지만 이 건물을 설계한 분은 아마 체험적으로 또는 인간의 생래적 감각으로 이처럼 인간적인 공간을 만들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p. 88)

저자와 실크로드 답사를 함께 한 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았던 듯 하다. 그래서 그 전문가들의 식견을 사이사이에서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건축과 미술사와 종교 그리고 그림까지.. 거기다 고구려의 후예의 기록도 그 먼땅에서 보게될 줄이야...

어느 나라든 국립박물관은 그 나라 문화유산의 자존심이자 문화능력을 상징적으로 담보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구색에 맞추기가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은 유물을 보유했느냐는 점이다. 박물관의 위상은 소장품의 질과 양으로 평가되는데 모든 것이 다 우수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 박물관만이 내세울 수 있는 소장품이 있느냐 없느냐에 그 평가가 달려 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두 가지 분야예서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다. (p. 141)

이 두 가지 분야란 하나는 신안해저유물이고 하나는 투르판과 누란에서 출토된 중앙아시아 유물들이다. 신안해저유물이야 우리나라 바다에서 나온 것이니 큰 수확이지만, 중앙아시아 유물들이 많다는 건 뜻밖이었는데 '오타니 컬렉션' 이라 불리는 일제의 수탈?덕분이었다. 여하튼, 중앙아시아 유물을 거의 쓸어가다시피한 독일은 2차세계대전때 폭격으로 거의 대부분의 유물을 잃었지만, 우리나라는 6.25때도 문화유산들을 부산까지 피난시키며 보존했기에 그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한 것 같긴 하다.

위구르족은 기원전3세기 이전부터 고비사막 북쪽에 살고 있던 '정령'이라 불린 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흉노족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흉노의 왕자 2명이 다툼을 벌이다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 만든 것이 돌궐족과 위구르족이라고도 한다. 위구르란 연맹 또는 단결이라는 뜻이다. (p. 147)

이후 천산위구르왕국은 원나라의 멸망과 동시에 종말을 고했고 1347년 신강성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차가타이한국에 복속되었다. 이 무렵(14세기)부터 이 지역은 투르판이라 불리게 되었고 주민들은 완전히 이슬람화되었다.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회교로 불리게 된 것은 회골이라 불리던 위구르가 믿는 종교로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투르판의 이슬람화와 동시에 베제클리크벽화는 혹심한 피해를 당하고 만다. (p. 149)

회교도라는 말이 위구르족을 일컫는 말임을 처음 알았다. 그저 이슬람교인들을 한자화한것을 음차하여 그대로 부르는 말인줄 알았는데, 중국땅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위구르족에게서 이슬람교의 용어가 나왔다고 하니 신기하고도 신선했다. 고대소아시아와 이집트지역에서 기독교가 사라지고 이슬람교가 자리잡았듯이 중국의 서역지방변경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산맥과 사막등의 자연경계가 없었다면 이 종교의 흐름이 어디까지 이어져 왔을지 모를 일이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자연이 그어놓은 경계를 인간이 바꾼 적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우리도 중국을 바라볼 때 중원을 중심으로 했던 왕조만 생각할 것이 아니며 서역과 막북(고비사막 북쪽)의 유목민족들을 함부로 '호'라고 부르며 오랑캐로 대할 일이 아니다. 안서 유림굴의 서하시대 불화를 보면 고려불화와 연관성이 있듯이 베제클리크석굴의 천산위구르왕국 불화에서도 고려나 조선 불화와의 천연성을 볼 수도 있었으련만 그것이 다 파괴되어 지워진 것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한 것이다. (p. 170)

역사를 볼때 너무 중심만 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를 볼때 중원이라 불리는 중심왕조만 생각했었는데, 중국에 영향을 끼친, 끊임없는 서역에서의 다양한 흡수와 융합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장자리지역의 위구르지역과 티베트지역은 전혀다른 외모의 사람들이 중국어로 말하는 낯선 풍경속에 자신들의 자치와 독립을 꿈꾸고 있다.

카레즈는 위구르어로 '우물'이라는 뜻으로, 지하에 우물을 파고 이 우물들을 서로 연결해서 물길을 만든 지하 관개수로를 말한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여름이면 녹아내려 흐르다가 사막 속으로 사라지는데, 투르판은 바다보다도 낮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비굑적 용이하게 우물을 팔 수 있어 카레즈 건설이 가능했다. 이런 카레즈가 모세혈관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합치면 그 길이가 무려 5천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카레즈는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불가사의 공정으로 꼽힌다. (p. 179)

실크로드는 사막을 두르고 있는 길이지만 마냥 사막을 건너는 길이라기 보다는 가끔 사막을 만나는 길인듯 하다. 오아시스 도시지역은 왕국이 번성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충분한 지역이 있었다. 수로하면 로마만 생각했었는데, 카레즈 라는 수로를 보니 더욱 놀라웠다. 길은 물길만큼 대단한 길이 없는 것 같다.

이번 실크로드 답사에서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았느냐' 고 물으면 나는 투르판이라 할 것이고, '어느 오아시스 도시가 매력적이더냐' 고 물으면 쿠차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디가 제일 인상 깊었냐'고 물으면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간 일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느 코스가 제일 감동적이었냐' 고 물으면 주저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천산산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p. 183)

답사를 다녀온 사람에게 가장 하기 쉬운 질문이 '어디가 제일 좋았냐' 일 것이다. 그 의미에 따라 여러 곳을 말하는 것은 좋은 답인듯 하다. 가는곳마다 느껴지는 감상은 다 다르고 제각각 의미가 있을 터이다.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경험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보고 배운다. 문화유산 답사는 인류의 역사와 인문정신을 가르쳐주고, 도시 여행은 인간 삶의 다양한 면모를 엿보게 하며, 자연 관광은 대자연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p. 186)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이처럼 여행에 대한 저자의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적과 역사와 답사도 흥미롭지만, 여행에서 느끼고 배우는 저자의 생각들에 배우는 부분들이 참 많았다. 늘.

채색에 있어서는 파란색 안료를 많이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푸른색 안료는 '라피스 라줄리'로 우리에게는 흔히 청금석이라 알려진 광물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이로인해 키질석굴의 청색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푸른 석굴'이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나오던 광물이라 이를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쿠차 사람들은 푸른색을 좋아했다는 얘기인데 실제로 지금도 쿠차의 민가를 보면 대문과 창틀이 대부분 청색으로 되어 있다. (p. 210)

제69굴에는 신라와 연관된 이른바 '장식보검 벽화'가 있다. 한 무사가 허리에 장식보검을 차고 있는데 꼭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런 장식보검은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함께 전 세계에서 3점뿐이다. 우리 신라와 서역의 문화교류를 증명해주는 매우 중요한 벽화다. (p. 218)

청금석은 고대부터 정말 귀한 광물이었다. 그 광물을 이용한 청색이 페르시아문화와 인도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며 여전히 벽화에 남아있다. 고대의 문화교류와 상업교류는 늘 상상의 영역이다. 어떻게 그 옛날 그렇게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을까... 예전부터 신라에서 출토된 보검과 유리잔 같은 고대페르시아나 고대로마와의 연결성이 보이는 유물은 늘 신기했다. 그러데 중간지역인 실크로드에 같은 모양의 검 그림이 있다니... 실크로드는 신라까지 이어졌던 셈이다. 사실 초원유목민과 가장 연결된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아니라 신라였다. 신라와 가야의 역사는 늘 신비롭다.

쿠마라지바가 등장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해줌으로써 비로소 중국의 지식인(유학자)들도 불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단순히 단어를 직역만 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들을 한문으로 옮기려 애썼다. 쿠마라지바가 번역하면서 고민한 것은 '천축에서 찬불가의 가락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이것을 한문으로 옮기려니 그 뜻은 얻을 수 있은 그 말의 이치까지 전할수는 없다' 는 점이었다. (p. 225, 226)

쿠마라지바로부터 250여 년이 지나 현장법사는 천축에 들어가 원전을 구해와 평생을 다해 번역했다. 현장법사는 의역이 아니라 직역을 택했다. 이렇게 불경은 중국어로 의역과 직역이 모두 완성됐다. 후세 사람들은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구역, 현장법사의 번역을 직역이라고 하며 이 둘을 역성의 성도가 아니라 율장·경장·논장의 삼장에 통달한 삼장법사라 부르며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p. 228)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동상은 불교사에 금자탑을 세운 위인이며 성현인 쿠마라지바이다. 현장법사 나 삼장법사 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쿠마라지바 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하지만 그의 번역은 지금도 유효하다. 극락, 지옥, 열반 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표현한 의역들이라고 한다. 지금도 외국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한자는 융통성이 별로 없는 문자이다. 그런데 그 옛날 음악처럼 운율이 있고 노래처럼 불리던 게송 들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었다면 못했을 일이다. 왜 쿠마라지바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쿠차의 벽화는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보호된 굴이라 답사여행에서 직접 보진 못했다는 '신2굴의 천장벽화'는 비잔틴의 성현을 그린 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이고, 동아시아에서 춤과 음악과 노래와 악기라면 쿠차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었기에 고구려 고구려 벽화와 신라의 시구절에도 쿠차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문명의 융합과 전파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게다가 고구려유민2세로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선지장군의 흔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보의 시에서 고선지 장군에 대한 시를 보면 '푸른빛의 한혈마를 탄 고선지'장군을 표현하고 있는데, '한혈마' 라는 단어에서 다시금 김훈의 소설이 생각났다.

젊었을 때는 모두 화려하고 발달된 문명을 경험해보고 싶어해 파리, 런던으로 떠나는 배낭여행을 선호한다. 중년으로 접어들면 유명한 박물관과 역사 유적을 찾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여행한다. 그러다 중늙이가 되면 역사고 예술이고 골 아프게 따질 것 없는 중국의 장가계, 계림 등 자연관광과 일본온천여행을 선호한다. 그러다 노년이 가까워진 인생들은 오히려 티베트, 차마고도 등 인간이 문명과 덜 부닥치며 살아가는 곳을 보고 싶어한다. 인간의 간섭을 적게 받아 자연의 원단이 살아 있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 노년에 들면서 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몸이 받쳐주지 못하여 그냥 로망에 머물고 말기 일쑤다. (p. 281)

이럴수가! 이렇게 절묘한 여행의 흐름이라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여행지는 나이에 따라 선호지역이 뚜렷이 구분되는 편이다. 내가 눈여겨 보던 곳은 어디였더라 새삼 생각해보니 갑자기 나이를 절감하게 된다. 그랬구나... 여행지도 나이듦을 나타내주고 있었구나... 그리고 결국은 로망으로만 남기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소그드인의 고향은 소그디아나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부하라 지방으로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오아시스 곳곳에 퍼져 작은 왕국들로 형성되어 있었다. '다리야'는 강 이라는 뜻이란다. 이들은 이란계 주민으로 소그드어를 사용했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중앙에 자리 잡고 일찍부터 중국, 인도, 이란과 직접 교역하면서 실크로드의 중개상 역할을 해왔다. 소그드인들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이들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계약서를 작성할 정도로 일상생활에서도 거래를 분명히 했다고 한다. 소그드 상인들은 4세기부터 동쪽의 중국, 북쪽의 유목국가들, 서쪽의 이슬람제국과 거래하며 방대한 상업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6세기부터 8세기 사이, 중국으로는 당나라 시대이고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궐이 있었을 때가 소그드 카라반의 전성기였다. 거래에는 동전과 함께 염색하지 않은 '평직비단'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동전에 비해 비단이 장점이 많았다. 우선 동전의 가치는 유동적인 반면에 비단 가격은 안정적이었고 비단이 동전보다 가벼웠다고 한다. (p. 292~296)

비단은 주요거래 품목인줄 알았더니 화폐대용으로도 사용됐었다. 이러니저러니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계약서를 중시하는 소그드인들을 보며 고대유대인의 상업이 생각나기도 했다. 소그드인들의 계약서 중에 혼인계약서가 발굴된 것이 있는데 거기 '드라크마' 라는 화폐단위가 등장한다. 로마의 화폐단위다. 고대로마의 화폐로 중국과 거래한 소그드인들의 카라반 행렬이 우리가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연상하는 그 낙타행렬이다. 소그드상인들이 활발히 오가고 당나라가 위세를 떨쳤을때 밀려난 북쪽의 초원유목민들은 서유럽으로 눈을 돌려 침략의 시간을 만들어 간다. 역사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이렇게 활발했던 소그드인들은 소그디아나가 이슬람에 점령된 이후에도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을 통해 유지되다가 이슬람의 동방진출로 궤멸되고 만다. 소그드의 정체성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서쪽길에 위치한 도시들은 이슬람화 되었다. 이슬람화 된 곳들의 불교유적은 거의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지형의 특성상 석굴 유적지가 많았고 석굴의 벽화와 후대 책으로 남은 기록이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될때마다 고대의 역사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곤했는데 파괴된 유적은 더이상 역사를 알려줄 수 없게 되었다. 여하튼 이러한 사정들이 중국땅 변방에 이슬람도시들이 여전히 있는 배경이다.

호탄에 왔으면 모름지기 알아두어야 할 것이 ㅎ나 있으니 그것은 옥 이다. 호탄의 영광과 역사 그리고 호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옥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인의 옥에 대한 애호는 상상을 초월한다. 금보다도 옥을 더 귀중하게 받아들인다. 한 예로 임금의 도장은 금인 이고 황제의 도장은 옥새 다. (p. 363)

황제의 도장은 옥새다! 이 옥새의 의미를, 금새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옥새임을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 가장 흔한 기념품들 중에는 꼭 옥과 관련된 상품들이 있었다. 홍콩에 갔을때도 커다란 옥덩어리를 전시해놓은 것을 봤는데... 중국인들은 옥을 그렇게까지 귀하게 여겼구나... 호탄옥은 최고급옥이라는데 그중에서도 양지백옥을 가장 높게 친다고 한다. 양지백옥은 양비계 빛깔의 희고 윤기나는 옥이다.

'곤륜산 신화'를 바탕으로 한 '요지연도' 를 볼때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를 이끌어 자신들의 이야기로 쓴 것처럼 조선사람들이 중국의 신화를 즐겨 인용한 것이라는 생각이나, 위구르족의 '열두 무카무'가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 세종대왕의 '종묘제례악'이 나라의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설명등 우리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면 더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의 내용은 모두 신선하고 신기했다.

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들이 이룬 국가명이 대부분 00스탄인 것처럼('스탄'이라는 이름은 땅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위구르족이 위구리스탄으로 독립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될 정도로 실크로드의 도시들은 내가 알던 중국과 너무나 달랐다. 아마도 티베트지역의 답사기가 나온다면 마찬가지의 마음이 들 것 같다. 너무나 다른데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 대체 어떤 정서를 갖게 할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자가 답사한 모든 지역이 생소했고 알려주는 모든 문화유산이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차근차근 읽고 있는 중인 서양역사에서 조만간 이슬람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전에 실크로드를 접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미리 넓혀놓을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된것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오아시스라면 사막 속의 옹달샘을 떠올리곤 했는데 실크로드에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p. 1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