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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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차별, 억압에 맞서온 스물한 명의 여성 미술가들

여성의 예술은 한낱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위대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 여성 거장들의 삶고 철학을 만난다

 

여성이 미술을 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미술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주체적으로 뭔가를 하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할수 없던 시대였다. 남성의 재산이자 소유물로만 살아야 하는, 존재하지만 존재성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시절이 오래도록 계속되어온 것이 인류 역사의 한 단면이다.

여성미술사 가 왜 따로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미술사는 다 남성들의 미술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사가 왜 따로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역사는 다 남성중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여성'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마음에 안들수도 있겠지만 희소하기 때문에 그만큼의 가치를 더 부여해서 파악해보자는 의미에서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한 여성들이 특히 미술을 한 여성들이 다 싸움꾼이었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많은 어려움이 있긴 했겠지만 미술하는 여성이 희소했던 시대에 미술을 했던 여성들의 배경은 다양했다. 전투적으로 싸워야 했던 여성도 있었지만 비교적 평탄하게 꿈을 이루었던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미술관에 여성미술가의 작품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여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는가?"

그동안 우리는 남자들로 가득 채워진 미술사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을 한번 떠올려보라.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다. 여성 예술가들은 왜 없을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예술적 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p. 8)

그렇다고 남성들은 생각했다. 여성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남성들보다 뒤떨어진다고 여성이 남성처럼 생각하고 남성처럼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산업사회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했고 여성미술가 들은 드물게 빛을 보다가도 금새 사라졌다.

이 책에서는 르네상스부터 20세기 초 현대 미술의 태동까지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미술의 범주를 미술사에서 중심 역할을 해온 회화와 조각에서 패션, 공예, 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예술가를 포함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p. 14)

저자는 걸출했던 여성 거장들 21명에 대해 삶과 작품을 간략하게 나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작품이 많이 실리지 않아서 아쉬웠고, 싸우지까진 않은것 같은데 과하게 편향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럽게 의문이 드는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유의미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지던 간에 이 걸출한 여성들의 노력만큼은 몇배로 힘들었으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1부 가부장 수레바퀴 아래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다

>> 조각, 그 금녀의 문을 두드리다 - 포르페르치아 데 로시 (1490 ~ 1530)

그림을 그리는 여성은 있어도 조각을 하는 여성은 없었다. 조각은 거친 망치외 끌로 작업해야 하는 데다 육체적 힘이 요구되어 남성이 독점한 분야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육체적 힘과 지적 활력이 부족해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조각가가 되려면 남자 견습생으로 북적이는 작업장에서 수년간 수습과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정조가 중요시된 당시에 여성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금지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이 할 수 있던 예술 작업이라고는 공예, 테피스트리와 자수, 수채화 등이 전부 였다. 이것들은 남자에게만 허락된 회화, 조각, 건축에 비해 하찮고 열등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p. 23)

데 로시가 과일 씨앗에 한 조각을 보면 그야말로 그 정교함에 입을 다물수 없게 된다. 씨앗 조각으로 유명세를 얻은 데 로시는 대리적 조각까지 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그녀의 작품은 헐값에 팔렸고 남성경쟁자들의 모함에 시달리다 마흔살에 무일푼인채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진 초상화의 귀재 - 마리에타 로부스티 (1560~1590)

미술신동이었던 마리에타는 열네 살에 초상화로 명성을 떨쳤다. 심지어 그녀의 초상화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의 펠리페2세의 관심을 끌어, 두 사람 모두 그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딸과 계속 공동 작업하기를 원했고 마리에타가 이 제안을 거절하도록 종용했다. (p. 34)

여성이 미술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시대에 화가가 된 여성들은 아버지가 화가인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 밑에서는 미술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화가아버지 틴토레토는 딸의 재능을 자신의 작업장에서만 이용하려 했을 뿐 넓은 세상에서 펼칠 기회는 주지 않았다. 틴토레토의 작품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속속 마리에타의 작품으로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 여성 영웅들을 캔버스에 소환환 '여자 라파엘로' - 엘리자베타 시라니 (1638~1665)

시라니의 유디트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인 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려졌다. (p. 49)

시라니가 그린 여성들은 비록 포르티아, 마리아 막달레나, 클레오파트라 등 강인한 성품을 지닌 여성들이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남성 화가가 여성을 보는 전통적 방식, 즉 남성의 시각을 만족시키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고수했다고 할수 있다. 남성들로 채워진 영웅 역사화에 여성의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 영웅적인 여성들조차 끝내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p. 50)

 

스물일곱 나이에 요절했으나 여느 왕후장상이나 유명인사 못지않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던 시라니는 화가의 딸이었다. 역사화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에 역사화로 인정받은 여성화가였다. 그러나 시라니의 역사화 속 여성은 영웅이든 아니든 애로틱했다. 그리고 그녀는 짧은 생애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야 했고 그 수입은 모두 아버지가 가져갔다.

>> 전문 화가의 길을 개척한 풍속화의 대가 - 유디트 레이스테르 (1609~1660)

프란스 할스의 작품 중 수작으로 평가되던 <즐거운 커플>은 19세기 말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코르넬리스 호프스테드 데 그루트에 의해 결국 레이스테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극찬하던 이 작품이 할스가 아닌 한 무명 여성의 그림으로 밝혀지자 미술사가들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 (p. 60)

레이스테르는 화가의 딸은 아니었지만 미술 신동으로 인정받았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작업장을 가졌던 성공한 전문 화가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은 화가였던 남편 얀 민세 몰레나르 나 프란스 할스 작품으로 팔려나갔다. 금전적 이익을 위해 여성화가의 작품은 남성화가의 작품으로 둔갑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당대 유명했던 레이스테르는 죽고나자 무명이 되었다.

>> 18세기 유럽을 사로잡은 여인 - 앙겔리카 카우프만 (1741~1807)

앙겔리카 카우프만은 전 유럽의 스타 예술가였다. 그녀는 18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화가로, 엘리자베타 시라니처럼 '여자 라파엘로'라고 일컬어지며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음악과 미술 모두에 재능이 뛰어났고, 자신의 그림들을 가구, 직물, 찻잔, 그리고 장식품에 디자인하여 엄청난 수입을 올린 뛰어난 사업가였으며, 괴테를 비롯해 레이놀즈 경, 빙켈만, 러시아의 카타리나2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2세 등 유럽의 왕족과 귀족은 물론 그 시대 최고위층 인사들과 친분도 두터웠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 지성들이 흠모한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앙겔리카 카우프만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왜 이 위대한 여성화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p. 71)

카우프만은 영국왕립미술아카데미의 창립회원이었다. 화가인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부모의 열성적인 교육열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양질의 교육을 다양하게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회와의 범주에서는 역사화가 가장 우월하고 지적인 분야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카우프만 또한 역사화가로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누드수업에 참가할수 없던 여성으로서 인체묘사에 뒤떨어지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 여성의 공간과 세계를 그린 인상주의의 두 거장 - 베르트 모리조(1841~1895) 와 메리 카사트(1844~1926)

19세기는 프랑스 혁명 이후 전통적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와 시민 사회가 등장하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도래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은 시대'라 부른 이 시대는 남성들의 것이었고 여성들은 그 혜택을 나눠 갖지 못했다. (p. 86, 87)

카사트와 모리조는 부유한 계층 출신이라 그나마 전문화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상류층의 부모 덕분에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교양으로서 미술을 가르쳤을 뿐 딸이 전문화가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모리조는 마네의 남동생과 결혼함으로써 마네의 도움으로 미술계에 진입할 수 있었고 카사트는 드가와 동료가 되면서 다양한 도움을 받았다. 카사트와 모리조는 인상파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사회적 제약으로 여성의 일상과 실내공간을 그림의 주요소재로 할 수 밖에 없었다.

2부 편견과 억압을 담대한 희망으로 바꾸다

>> 운명은 만들어나가는 것 - 소포니스바 앙귀솔라(1532~1625)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하면 흔히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남성 미술가들만 떠올리지만 이들 못지않게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여성 화가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6세기 여성 미술가들이 처지를 생각하면, 앙귀솔라는 이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화가였다. (p. 105)

16세기까지도 예술가의 자화상은 일반적ㅇ니 것이 아니었고, 더구나 팔레트, 붓, 캔버스와 이젤이 등장하는 화가의 자화상은 없었다. 따라서 앙귀솔라의 <이젤 앞의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자신을 묘사한 최초의 자화상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p. 110)

유럽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국제적 여성 화가로서, 라비니아 폰타나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같은 다음 세대 여성 화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교황비오4세, 스페인의 펠리페2세도 그녀의 열성 팬이었고,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반 다이크오 카라바조, 루벤스 등 불세출의 거장들이 그녀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p. 116)

 

앙귀솔라도 부모덕이었다. 부유한 귀족의 딸로 태어난 앙귀솔라에게 아버지는 유명한 선생을 초빙해 딸들을 가르칠 만큼 교육에 열성이었다. 남다른 교육철학을 갖고 딸의 재능을 지원해준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그림실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스물일곱에 스페인 궁정화가가 된다.그러나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서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남성 화가들의 작품으로 알려져왔다.

>> 고정된 성 역할을 걷어차고 직업 화가로 - 라비니아 폰타나 (1552~1614)

그녀가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의 딸이었고, 볼로냐 출신이었으며, 아버지와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가 타고난 재능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프레스코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훈련을 받았고, 여성 예술가들을 지원한 도시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앙귀솔라와 젠틸레스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명한 르네상스 여성 화가들은 볼로냐의 지적·예술적 토양이 만든 결과물이었다.(p. 123)

라비니아 폰타나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며, 앙귀솔라와 쌍벽을 이룬 동시대 여성화가라고 한다. 딸의 재능을 키워준 아버지는 딸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뒷바라지할 수 있는 사람을 사위로 골랐고, 그렇게 만난 남편은 열한명의 아이를 양육하는데 헌신적이었그며 폰타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건 정말 폰타나의 개인적 복이다. 지금도 이런 남편은 만나기 힘들지 않나?;;; 폰타나는 '초상화의 귀재'라고 불렸다.

>> 성폭력 피해자에서 불세출의 여성 화가로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7~1651)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로 불린다.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여성으로서는 아주 독립적이었고, 전문 직업인으로도 성공했으며, 작품 역시 강인한 여성상을 묘사했다. 젠틸레스키가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한 여자의 영혼에서 시저의 정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p. 131)

 

중세 여성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아마도 젠틸레스키 가 아닐까 싶다. 카라바조의 제자화가였던 아버지 덕에 그림을 배울 수 있었으나 스승인 화가에게 성폭력피해를 당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재판정까지 갔고 온갖 수모를 겪었으나 재판도중 가해자가 전 부인을 죽이고 처제와 간음했다는 다른 범죄가 밝혀져 1년형을 받음으로써 젠틸레스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명예가 회복된 것은 좋으나 이 재판내용 자체가 이미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 여하튼 압도적 재능으로 자신의 작업장을 운영하며 성공한 여성화가의 삶을 살았다.

>> 350년 만에 수장고 밖으로 나온 정물화 - 클라라 페테르스(1594~1657)

페테르스는 이렇게 작품에 끊임없이 서명을 하거나, 나이프 같은 사물에 제조 회사의 상표처럼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고, 작게 초상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림 곳곳에 숨겨놓은 서명과 자화상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사회에 살았던 한 여성의 몸부림 같아 안타깝다. (p. 157)

클라라 페테르스는 17세기 플랑드르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이자 정물화의 개척자였다고 하는데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거의 없다고 한다. 페테르스의 정물화는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팬던트나 빛에 비친 금속표면등에 아주 조그맟게 자신의 초상을 그려넣기도 했는데 그 세밀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350년간 내내 미술관 수장고에 묵혀진채 모두에게 잊혀져 왔다.

>> 탐험 정신으로 빚어낸 과학과 미학의 결합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1647~1717)

관찰을 바탕으로 1675년에 최초의 삽화집 <새로운 꽃에 관한 책>을, 1679년에는 곤충의 탈피를 소재로 한 삽화집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그 특별한 식탁>을 출판했다. 메리안이 남긴 아름답고 정밀한 곤충 그림과 세밀한 관찰 기록은 사람들이 곤충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일깨워줬다. (p. 164)

당시 동식물 연구서가 대개 표본을 모사한 곤충 그림만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녀의 탐구 방법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p. 169)

그녀는 현지 답사를 하며 직접 생물 표본을 수집해 연구한 저명한 생물학자들인 다위, 헤켈, 월리스 보다 훨씬 앞서서 적도 부근의 열대 지역에서 곤충을 채집하고 기르며 연구 관찰했다. (p. 174)

 

서양의 곤충학자 하면 바로 파브르 가 떠오르는데, 파브르 이전에 먼저 곤충에 관심을 갖고 세밀하게 관찰하며 그림으로 기록을 남긴 여성이 있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식물 수채화와 동판화를 남긴 여성화가 메리안 이다. 메리안의 집안은 출판공방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메리안은 출판되는 책들을 통해 지적 탐구심을 키울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학을 그대로 믿던 시대에 곤충의 변태과정을 밝힌 것은 그녀가 최초였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물학에도 미술학에도 남지 않았다.

>> 오직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 로자 보뇌르(1822~1899)

당시에 여성은 바지를 입을 수 없었고, 만약 입고 싶다면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보뇌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공장소에서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이후 그녀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자 옷을 입고 살았다. (p. 180)

보뇌르는 평생 부유한 삶을 살았다. 77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들라크루아에 상응하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화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즐겼고, 작품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p. 185)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명확이 구분되고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미덕을 강요했던 19세기 프랑스에, 남자같이 짧게 머리를 자르고 거친 작업복을 입은 채 파리 도살장과 가축시장을 활보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공개적인 레즈비언이었고 동물만 전문적으로 그린 성공한 여성화가 로자 보뇌르 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딸에게 집에서 동물과 함께 마음을 여는 교육을 했던 부모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키워갈 수 있었고 인정받고 성공했다.다만 인상주의 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에 사실주의 화가들이 잊혀질때 잊혀졌을 뿐이다.

>>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의 관찰 -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사실상 최오의 모더니즘 여성 화가이다. 그림의 주제며 색채, 형태, 붓질 등 대담하고 새로운 실험들은 그녀가 20세기 초 모더니즘을 창조한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혁신적인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이런 미술사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반 고흐가 그랬듯 그녀 역시 작품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처지였고, 가난과 냉대 속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p. 195)

100여 년 전 사실주의 화풍이 유행했던 독일 미술계에 베커의 표현주의적 화풍은 낯설었다. 생전에 화풍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여성때문이기 때문이었을까... 주류의 화풍에 반하는 독자적 화풍을 가졌던 화가들은 대부분 당대에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베커는 자신이 하고싶은 데로 하고 살았고 출산 후유증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후 '파울라 모더존 하우스' 라는 여성 미술가에게 헌정되는 미술관으로는 최초의 미술관도 건립되었다. 오히려 여성이라서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거침없이 통념을 깨부순 행동하는 페미니스트 - 수잔 발라동(1865~1938)

'수잔'이라는 이름은 이런 복잡한 그녀의 삶을 압축해 보여준다. 사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클레멘틴 발라동이었는데, 나이 많은 화가들 사이에서 정부 노릇을 하는 그녀의 처지가 성서 속에서 장로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수잔과 비슷하다고 하여, 화가 툴루즈 로트렉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당시에 그림 모델이란 직업은 화가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일종의 매춘부 취급을 받았다. (p. 207)

발라동은 누드를 그릴 때, 마치 자신의 삶을 반영하듯 투박한 노동 계급의 여성을 소재로 불완전한 몸매를 과장하지도 이상화하지도 않고 보이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p. 213)

 

수잔 발라동은 거리의 아이였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모델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우고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키워나갔다. 그녀의 그림은 거침없었지만 그림에 대한 태도만큼은 진지했다. 하지만 발라동은 그림보다 스캔들로 더 유명세를 탔다.

>> 각성한 여자에게 보이는 것들 - 한나 회흐(1889~1978)

그녀는 여성과 남성, 서구권과 비서구권, 인간과 오브제를 어수선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정치 문제와 젠더 문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판타지 등을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독일을 장악한 나치는 급진적 사상을 가진 그녀를 다른 다다이스트들과 함께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었다. (p. 228)

20세기 초 유럽을 강타한 예술운동중에 다다이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서구문명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서 비롯된 다다이즘은 기존 사회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예술운동을 펼친다. 이성을 부정하고 무의미, 우연성, 즉흥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예술'을 지향하는 다다이스트 중 독일에서 돋보인 존재는 한나 회흐 였다. 하지만 혁명적 다다이즘 조차도 기존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넘어서지 못했다. 동료들은 그녀를 멤버로 인정하지 않았다.

3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다

>> 렘브란트 그림보다 비싼 종이오리기 작품 - 요아나 쿠르턴(1650~1715)

요아나 쿠르틴은 이 민속 공예를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로 재창조했다. 그러나 미술사학자들은 종이 오리기를 그저 민속 예술로만 취급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뛰어난 걸작을 남기고도 미술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p. 239)

17세기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렘브란트의 <야경>보다 비싼 가격에 팔린 미술 공예품이 있다. 바로 종이를 정교하게 오려 만든 공예품인데, 이 종이 오리기 작품의 대가는 요아나 쿠르턴이다. 그녀는 '종이 오리기 예술의 렘브란트'라고 불리었으며, 그녀의 작업장은 당대 유럽의 명사라면 빼놓지 않고 찾는 암스테르담의 랜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재료의 특성상 아주 소수만 남은 그녀의 작품은 그나마도 미술관 창고 서랍속에서 수백년간 잠들어 있다.

>> 직물 디자인을 예술로 끌어올리다 - 안나 마리아 가스웨이트(1688~1763)

가스웨이트는 산업 혁명 전후 시기에 활동한 뚜어난 실크 직물 디자이너로서, 직물에 그림의 원리를 도입해 직물 디자인을 예술적으로 한 차원 더 끌어올렸다. 그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서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당시 예외적으로 굉장히 성공한 직물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다.

>>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가난한 소녀 - 로즈 베르탱(1747~1813)

베르탱은 예리한 비즈니스 감각과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대에 베르탱은 모자, 리본 등 패션 소품까지 파는 전문 옷 상점의 탄생, 새로운 소비 형태를 이끄는 패션 디자이너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p. 268)

로즈 베르탱은 오트쿠튀르(고급맞춤여성복 또는 그런 옷을 만드는 의상점)의 창시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을 맡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프랑스의 사치스런 왕정이 몰락하면서 베르탱의 사업도 몰락했지만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그녀가 만들어낸 패션은 남았다. 본문 내용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성을 부각한 점은 역사적 해석이 좀더 필요한 부분이다. 사치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왕비보다 수십배로 사치와 낭비를 일삼은 루이14세를 더 부각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을 만든 여자 - 카린 라르손(1853~1919)

카린의 예술적 공헌은 남편의 이름 뒤에 가려졌다. 최근 현대 디자인에 미친 카린의 영향이 점차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미술사에서는 칼 라르손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단독 개척자라고 소개하는 일이 더러 있다. (p. 275)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원형을 만들고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부부는 칼 라르손과 카린 라르손 이다. 최근 이 부부에 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다시 보아 반가웠다. 저자는 카린을 결혼 후 자신의 꿈이었던 화가의 길을 포기한 결혼 제도의 희생자라고 표현했지만, 최근 읽었던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를 읽고 들었던 생각은 카린이 가정을 선택한 것이지 꿈을 포기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들 부부의 삶과 가정은 너무나 행복이 충만했다. 카린이 결혼의 희생자라면 그녀가 불행한 삶을 살았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카린은 가정에 충실하면서 직조공예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살았고, 그렇게 카린이 멋지게 꾸민 집을 그린 남편의 그림을 통해 그녀의 작품들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 녹색 정원의 작은 신 - 거트루드 지킬(1843~1932)

기존의 정원에서는 조각물, 파빌리온, 분수 등이 중심이었고 나무와 식물은 오히려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정원은 식물을 인위적으로 다듬어 식물 고유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소홀히 취급했고, 반면 영국식 정원은 관목과 교목이 자유롭게 어우러져 정원이라기 보다는 숲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킬의 새로운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처럼 완전히 인위적으로 통제되지도, 영국식 정원처럼 방만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두 정원의 특징을 모두 살려 어떤 형식 안에서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혁신은 건축물이나 조각, 나무 중심의 정원에서 초본 식물, 꽃 중심의 화단 정원으로 정원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이다. (p. 293)

거트루드 지킬은 영국의 원예사이자 정원 디자이너이다. 자연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린 '정원의 화가' 라고 불린다. 원래 화가였으나 시력이 실명에 이를 정도로 손상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찾은 새로운 캔버스가 정원이었다. 그녀의 정원은 여전히 세게 곳곳에서 방문객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고 한다.

아는 여성미술가들보다 모르는 미술가들이 많다보니 짧게 라도 한명한명 기념하며 적는 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명한명 다 알아두기에 충분할 거장들이었다. 다만,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여성미술가들은 대부분 당대에 인정을 받고 성공한 여성미술가의 삶을 살았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라기 보다는 성공한 여성미술가들의 역사라고나 할까. 당대에 여러 편견들과 싸워야 했던 여성미술가는 표지 자화상의 수잔 발라동 한 사람뿐인듯 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미술계에서 다른 그림들과 우열을 다투며 싸우고 있지 않을까 싶다.

후대에 잊혀지고 지금 모르는 사람이 된 것은 그녀들이 싸울 수 없는 그녀들이 없어진 후의 시간대의 일이다. 당대에 녹록지 않은 여성미술가의 삶을 산것은 분명하나 당대에 그녀들 스스로 싸워야 했다기 보다는 현대에 지금 우리네 인식에서 잊혀진 이유를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에는 유명했는데 실력도 인정받았었는데 지금은 왜 잊혀졌는가? 어쩌면 그옛날보다 지금이 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들의 이름을 미술사에 새겨놓으려면 지금 미술계에 싸우는 여성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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