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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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투성이 마음을 딛고 날아오르는 모든 이를 위한 성장소설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아몬드』 『페인트』 『위저드 베이커리』 『완득이』 에 상응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궁금했다. 아몬드, 페인트, 위저드 베이커리, 완득이 다 너무 좋았던 작품들이었다. 내게 청소년 소설이 성인 소설보다 더 완벽하게 좋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대표적 작품들이 저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뒤를 잇는 작품이라 말해도 손색없는 소설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먹먹해진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뻑뻑해진 눈을 껌뻑거리느라 한참을 앉아있었다...

유원은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해보이지만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 모두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녀.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거의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궁금한 것들을 걱정을 가장해 물어 오곤 했는데 모범적인 내 대답을 들은 후에는, "그래도 잘 컸네" 그런 말을 칭찬이랍시고 내뱉곤 했다. (p. 18)

어른들은 늘 아이들이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예의없음이란 것이 어른인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존경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예의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예의를 제대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적어도 걱정을 가장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죽은 친구의 부모를 이렇게까지 챙긴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신아 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일단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우리 언니 같은. (p. 21)

누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큰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경우에는 더욱.

나는 아저씨의 의도를 가늠하려고 노력한다. 일부러 괴롭히는 것 같기도, 점진적으로 복수하는 과정 같기도 하다. 나는 왜 아저씨의 냄새에 예민해지고, 아저씨의 말투와 사소한 습관을 판단하는지. 나는 왜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에게 사나운 마음을 갖는지. (p. 42)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라는 건 사실 말이 안되는 말이다.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없다. 고마움을 당연하다고 생각할때 고마움은 더이상 고마움이 아니게 된다. 그게 인간적이다. 더구나 십이년째 언니의 기일마다 혹은 사이사이 명절이나 대소사 때마다 집에 찾아오는 대상이 그 당연히 고마워애햐 할 대상이라면. 고마움이라는 부채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 되어버리고 난 이후라면.

그날 이후, 이전에 나를 몰랐던 사람들조차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나를 위로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p. 81)

자신이 모르던 때에 자신으로 인해 생긴 목숨값을 평생 갚는 심정으로 자란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뜻없는 맑은 웃음조차 생경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눈빛을 너무 어렸을 때 깨달았다는 것은...

"뻔한 내용을 왜 50화까지 챙겨 보는 거야? 그럼 최소한 오십 시간을 저 드라마를 보면서 날렸다는 거잖아"

"다 아는 내용이고 뻔한 내용이니까 보는 거야. 치킨이랑 짜장면도 아는 맛이니까 먹는 것처럼" (p. 96)

갑자기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그랬다. 드라마를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반의 내용을 보고 나면 대충 감이 올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럴때일수록 더더욱 끝까지 챙겨본다. 다 아는 뻔한 내용이 다 아는 맛 과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새로운 음식보다 늘 먹던 맛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00)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텐데...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힘듦을 나는 안다. 죄책감 가질만한 사건이 없었음에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이제야 조금 나태해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소설을 읽으며 나보다 훨씬 시간절약을 한 소녀들이 고마웠다.

"적당히 행복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두 배나 행복하게 살라는 거야" (p. 111)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응원의 말이랍시고 이미 없는 사람의 몫까지 두배로 행복하라는 말은 결코 응원이 될 수 없다. 나하나 행복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언니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언니에 대한 무서운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느껴 왔다. 언니의 죽음은 그저 그런 죽음들과는 차원이 다라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다른 희생자 가족에 비해서 엄마가 일찍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원동력임을 알고 있다.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는 유가족이기 때문이었다. (p. 117)

더한 죽음과 덜한 죽음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마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어차피 죽은 사람들은 모르니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죽음의 의미를 달리 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십이 년 전 기사에는 '희망' 의나 '기적' 이나 '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세계 전체에 희박한 것들을 굳이 내게서 찾으려는 시도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p. 152)

직설적이지만 기분나쁘지 않은 문장들을 발견할 때마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남의 일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 쉽게 말한다. 거창한 의미여도 거침없이 해댄다. 그러한 의미부여를 받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폭력이 될수도 있는 것인데.

수현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바람. 먼지 가득한 창고, 노을과 에드벌룬, 오랜 기다림.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목소리. (p. 195)

'미워할 수 있는 용기' 라는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자기계발서에서 말해주는 것보다 이렇게 소설로 느끼게 해주는 용기가 더 마음에 와닿을 것 같다.

미워한다는 감정에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미워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힘을 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p. 196)

죄책감이 만들어낸 합병증에 시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죄책감은 미워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게 하고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다 보면 남에 대한 분노로 번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낫다. 불특정 다수에 대해 분노하게 되기 전에 그 한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낫다.

"근데 살인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도 종종 있잖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영화에서는 시거를 사이코 킬러라고 부르는데 나는 시거 같은 사람은... 그냥 돌멩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교회 주차장에 깔려 있는 자갈 같은 거 말이야. 뽀족뽀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긇기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인 거야" (p. 215)

유원과 수현을 보면서 친구 사이에도 운명적 만남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드라마에 나오는 운명적 사랑 보다 살다보면 만나는 운명적 친구를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에는 적절한 때 라는 것이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때 그런 친구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 216)

수현과 정현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부둥켜 안아 주었다. (p. 224)

유원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고 유원의 부모님이 오래된 마음의 빚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수현과 정현이 나름대로 자신들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를 유원이 알아가는 그 모든 시간들이 소설속에서 내내 따뜻하면서 시원했다. 따듯한데 시원해서 좋았다. 정말 좋았다. 모든이를 위한 성장소설이 맞았다. 내마음도 한뼘 위로를 받은 만큼 한뼘 용기를 얻었고 그렇게 한뼘 자란 듯 했다. 이 작품을읽게 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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