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과 야만의 뒤엉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

표지 中

신비로운 소설이었다.

판타지처럼 읽히지만 판타지가 아닌 것을 알겠고 역사서처럼 읽히지만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역사에 존재했을 것이 분명한 시대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판타지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넘나는 초원의 이야기였다.

초원의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판타지 처럼 다가오는 역사의 영역인데 다른 문명의 역사에 기록된 작은 편린들 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늘 궁금해지곤 한다. 역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저런 역사서들을 찾아 읽는 편인데, 서양사건 동양사건 늘 유목사에서 막히곤 한다. 문자를 갖지 않았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을 달리며 여기저기 자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유목민족,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설로 접하고 나니 새롭고 신기한 기분이다.

간단한 지도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선 대립적인 두 나라가 등장한다. 나하 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북방엔 초원민족의 초나라가 있고 남방엔 농경민족의 단나라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끝쪽에 나하의 시원이 있는 백산이 있고 백산 아래 작은 나라? 월 이 있다. 초나라의 말은 신월마 이고, 단나라의 말은 비혈마 이다. 대화가 거의 없이 3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서사와 말의 서사가 교차되면서 색다른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앞에> 초 와 단 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고 본문이랄 수 있는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에서 좀더 세세하게 풀어주는데 묘하게 몰입이 된다.

초나라는 유목민들의 나라다. 떠돌아다니는 민족이었기에 포로는 죽였고 늙인이와 병든 자는 두고 떠났으며 식량이 모자라면 아이와 젊은이가 먼저 먹었다. 초는 산 자들의 나라였다. 건물을 짓지 않았고 문자를 멀리했다. 모든 지식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몸으로 익히게 했다. 군대는 진지가 따로 없었고 대오는 헐거웠다. 하지만 빠르고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했고 전투복이 따로 없었다. 동물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자연에 순응했다.

단나라는 정착민들의 나라다.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민족이었기에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성을 쌓기 시작했다. 문자를 숭상했고 많은 것을 기록하려 했다. 기록이 쌓이고 쌓일수록 의례가 늘었고 무덤은 커져갔다. 군대는 밀집대형으로 움직였고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단체행동을 중시했다. 단의 역사는 대부분의 문명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과 비슷할 터인데 그렇게 기록된 역사들은 사실 그리 믿을만 하지 못하다.

단은 문자를 알았고 문자로 세상일을 적었고 문자를 받들었다. <단사>는 당대에 기록되었으므로 언설의 흐름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기록하는 자들 가운데 세상을 보지 않고 문자를 보는 자들, 세상과 헛것이 뒤섞여 보이는 자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 봐도 보이지 않는 자들, 대낮에 귀신과 흘레붙어서 정액을 흘리는 자들이 많았고 또 후세에 말 잘해서 영화로운 자들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비틀기를 거듭했다. 그러므로 <단사>에서 옮길 만한 대목은 그리 많지 않다. (p. 32)

초와 단의 역사를 간략하게 풀어놓는 부분을 읽다보면 정말 있었던 나라들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쓴 것 같아서 연대를 찾아보고 나라의 기록을 찾아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나 이 책은 소설이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하는 역사의 시간과 역사가 알려주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잘 짜맞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소설임을 잊어버리고 역사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여기까지가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내 이야기의 멍석이다. 초의 <시원기>나 단의 <단사>는 모두 제각각의 기록이다. 초와 단이 나하를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싸웠으므로 그 기록들은 서로 부딪친다. 게다가 단의 기록은 당대에 이루어졌으나 초의 일들은 후세에 문자로 옮겨졌으므로 두 건의 서물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p. 43)

역사는 사실 크게 보면 유목세력과 농경세력의 각축전이었다. 이 소설은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그 다양했던 각축전을 하나로 함축해놓은 것 같았다.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는 표현이 정말 아주 절묘하게 들어맞는 소설이다.

옛날옛날에...

말과 사람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그러다 사람의 냄새를 거부하지 않고 신기해하는 말과 동물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은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추는 이 세상이 멀리 보였고 내려다보였다. 먼 곳이 가까웠고 더 넓어진 세상이 더 좁아 보였고 지평선이 자꾸만 뒤로 물러갔다. 말이 땅을 박차고 치솟을 때 추는 사람이 땅을 밟고 살아온 수만 년의 발걸음에서 풀려나 바람 속을 달렸는데, 땅의 사슬에서 풀려나려면 말은 끝없이 땅을 박차야 했다. 발굽이 땅에서 떠서 다시 땅에 닿는 사이사이에 말은 앞으로 나아갔다.

말에 올라타서, 추는 시간을 앞질러, 시간을 이끌면서 달렸다. 초원은 다가왔고 다가온 만큼 멀어져서, 초원은 흘러갔다. (p. 57)

사람과 함께 살게 된 동물들이 다 제각각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겠지만, 말을 타기 전과 후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사람은 더멀리 더빨리 갈 수 있었다. 사람은 더 넓은 땅을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다가왔던 말은 순했지만 핏속에 초원을 향한 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초원에서 비혈마의 무리들이 지는 해를 향해 일제히 달려간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나하 북쪽, 초의 신월마들이 초승달을 향해 달리던 까닭도 알 수 없다. 저무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말들의 넑을 잡아당겼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게으른 소리다. 그것은 말들만이 안다. (p. 72)

인간사는 인간사대로 복잡해서 인간이라고 누구나 다 이해할 수는 없기 마련이지만 말이 봤을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특히나 인간들의 전쟁은.

목왕은 나하 건너로 군대를 보내서 대륙 남쪽, 단의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대업을 준비해 나갔다. 목왕은 그 싸움에서 죽어서 무덤 없는 흙이 되어 초원의 풀을 키울 결심을 했다. (p. 83)

작전을 재가하면서 칭왕은 말했다. -나는 이제, 문자로써 이루려 하는 것을 무력으로 이루려 한다. 문과 무는 본래 하나인데, 그 방편이 다를 뿐이다. 나의 문과 나의 무는 서로 의지해서 함께 나아간다. 무는 문을 힘차게 하고 문은 무를 아름답게 한다. 그대들은 나하 북쪽 대륙에 나의 뜻을 심어라. 피어나서 무성하게 하라. (p. 95)

초의 목왕과 단의 칭왕은 달랐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볼수 없고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목왕은 아들 표에게 자신의 뜻을 유훈으로 남긴다. 표는 군대를 모아 출정했고 단은 벽을 튼튼이 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한채 기다렸다.

초원에서 수만 년을 살아온 부족들은 늑대나 개 떼처럼 자신의 진퇴와 대형을 맞출 수 있었다. 초의 군독들은 말을 해야만 말을 알아듣는 아둔한 자들에게만 말로 지시했다. 말을 해야만 알아듣는 자신은 말을 해도 결국 알아듣지 못한다고 초의 군독들은 한탄했다. 초의 군독들은 군병들을 다그치면서, 바람을 보고 배워라, 개들을 보고 배워라, 무장을 가볍게 해라, 가벼워야 이긴다, 싸울 때 많이 먹지 마라, 배가 고파야 정신이 맑아지고 싸움에 신명이 난다. 그것은 선조때부터 이어지는 가르침이었다.

초의 기병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바람 속으로 똥오줌을 내질렀고, 목이 마르면 말 목에서 흐르는 말 땀을 핥아 먹었다. (p. 111)

중국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쌓게 하고 로마제국을 손쉽게 침략했던 유목민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다. 소설을 읽는 내내 초의 습성들은 역사가 알려주지 않는 유목민족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게 해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표가 상양성을 병력으로 두들겨보니 땅에 들러붙어서 사는 종족들의 착지 근성은 완강했다. 그 종속들은 땅에서 떨어지면 곧 죽는 줄 알아서 기어이 앉은 자리에 눌어붙어 돌무더기를 쌓는데, 그 성벽을 바로 쳐들어가서 부수기는 어렵다. 군대의 진퇴를 풍도로 출렁거리게 만들어서 적들의 사이사이를 바람이나 연기처럼 흘러가게 한다는 것이 표의 생각이었다. (p. 162)

사람이 땅에 들러붙으면, 땅은 그 위에 들러붙은 자의 것이 되는데 그 위에 기둥과 지붕을 세우고 그 안에 들어앉은 자들의 어두움을 표는 상양성에서 알았다. 초원에서 창세 이래로 전개된 싸움은 세상에 금을 긋는 자들과 금을 지우려는 자들 사이의 싸움이었고, 초원 끝까지 나아가서 금을 지우면, 그 뒤쪽에서 다시 금이 그어져서 싸움은 끝이 없었다. 싸움은 초의 시원부터 대를 이어가며 표에게 물려졌다. (p. 191)

연도를 알수 없는 시대이긴 하나 초원사람들은 벽을 허물고 금을 없애기 위해 싸우고 땅에 들러붙은 사람들은 벽을 세우고 금을 긋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땅에 들어붙는 순간 그리 된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자주 초나라 사람의 시선으로 땅에 들어붙은 단나라 사람들을 보다보면, 초원의 습성에 대한 로망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월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고 그날로 장례를 마쳤다. 시신이 굳기 전에 새들에게 먹여 보내려고 월나라 사람들은 장례를 서둘렀다. 월나라의 새들은 크고 검었고 울음소리가 멀리 닿았다. 다 먹은 새들은 날갯짓 없이 높이 떠서 백산 쪽으로 날아갔는데 사람들은 날이 저문 후에도 새가 날아간 쪽으로 요령을 흔들었다. (p. 175)

월의 백성들은 땅에 붙어서 살았지만, 땅에 금을 긋지는 않았다. 각자의 집 앞마당은 그 집 곡식만을 말릴 수 있었으나, 넓은 들의 소출은 나누었다. 집들은 풀과 나무로 엮어서 낮았고, 어른 허리 정도까지 땅을 파고 들어앉았다. 집집마다 방 한가운데 화덕을 마련해서 불씨를 귀하게 여겼다. (p. 248)

초나라도 단나라도 아닌 나라를 이루지 않고 부족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곳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월나라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를 의도하지 않았다.

월나라의 장례의식은 '티베트의 천장(조장)'을 생각나게 했다. 나무가 부족하여 화장도 못하고 물이 귀하니 수장도 못하고 땅은 돌투성이 척박하여 매장도 못하는 티베트에서는 예로부터 장례를 치룬 시신을 독수리에게 내주었다. 삶의 방식은 자연환경에 맞춰지기 마련이고 티베트의 삶은 자연에 순응한 모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며칠씩 말위에서 생활할 수 있는 유목민의 모습과 정착한 순간부터 땅을 차지하고 확장해간 대다수의 농경민족의 모습과 독특한 장례의식 및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유지하는 월부족을 보면서 저자가 앞서 말한 "짜맞춘 이야기'들의 재미를 쏠쏠이 찾을 수 있었다. 시대와 장소와 민족이 혼합된 그 짜맞춤이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소설이 될 수 있다니 새삼 신기해 하며 읽게 되었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 물건이 아닌 것이 끼어드는 더러움을 초의 선왕들은 경계했고, 돈몰한 목왕도 그 가르침을 받들었다. 금붙이로 곡식이나 땅을 사고팔게 되면 곡식도 땅도 아닌 헛것이 인간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헛것에 홀려 발바닥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서 흘러가게 되고, 헛것이 실물이 되고 실물이 헛것이 되어서 세상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입으로 맛볼 수 없는 빈 껍데기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왕들은 근심했다. (p. 193)

말言이 빛나고 돌이 가지런해야 사직의 영광이 나하의 남쪽에 고루 떨칠 수 있다는 선왕들의 유훈은 상양성 싸움 후에 더욱 새로웠다. 칭은 개 떼를 풀어서 싸움을 몰아가는 초의 전술을 천하고 더럽게 여겼다. (p. 213)

전쟁은 늘 참혹하기 마련이고 인간들의 전쟁에 말들은 이유도 모른채 달려나가야 했다. 신월마 토하와 비혈마 야백의 사랑이야기가 그 어떤 로맨스보다도 짠하게 마음을 울렸다. 이미 시작된 전쟁이 진행될 수록 왕들은 서로의 사고방식을 더욱 알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님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역사는 늘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다투어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는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p. 271) <뒤에 中>

<앞에> 서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고 했는데, <뒤에> 서 이 책은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여 쌓인 답답함의 소산이라 말하는 저자의 생각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내며 한 인터뷰에서 "화가가 물감을 쓰듯이, 음악가가 음을 쓰듯이, 그렇게 한번 언어를 전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며 그렇게 써낸 신화적 판타지 세계에서 두 집단 사이의 끝 모를 적대감을 드러내며 "그 야만적 폭력, 그 양 폭력이 부딪쳐 가지고 결국 서로 무 가 되는 그런 모습들을 그리려고 했죠" 라고 답했다. 작가의 열 번째 장편소설이자 첫 판타지 소설인 이 작품을 쓰는 중간에 산소호흡기를 써야할 정도로 심각한 건강상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는 그에게 지금의 현실이 새로운 혹은 여전한 약육강식의 시대인것이 안타까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이 소설은 유목민 대 농경민의 전쟁이야기로 읽어도 좋고, 신화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역사판타지로 읽어도 좋고, 인간의 폭력과 말의 생명력을 연결시킨 無의 소설로 읽어도 좋을테지만, 내게는 그저 궁금했던 역사속 감춰진 시간들의 재현으로서 충분히 멋진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