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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날개 달린 것
맥스 포터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평점 :
Grief is the Thing with Feathers 슬픔은 날개 달린 것
슬픔... Grief ?? (특히 누구의 죽음으로 인한) 비탄
제목부터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그리고 까마귀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그것이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전부;
까마귀는 까마귀에
그것은 충분해, 실린 짐의 무게는 바큇자국이 말해주겠지 - 에밀리 디킨슨 -
까마귀의 까마귀가
'에밀리 디킨슨' 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부분부분 원래의 글자들 대신 '까마귀'를 써놓은 페이지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테드 휴스' 라는 시인이 첫번째 부인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 후 긴 침묵 속에서 완성했다는 '까마귀'라는 시집을 종종 등장시키는 것으로 에밀리 디킨슨 과 테드 휴스 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그들의 시적 슬픔을 내재시키고 있었다.
시인을 사랑하는 작가라서 그런지 그의 첫 소설이라는 '슬픔은 날개 달린 것' 이라는 이 작품은 시집크기의 얇고 작은 소설로 시적 리듬과 상징이 잔뜩 들어있는 소설이었다. 시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롱 웨이 다운' 이라는 소설이 생각나기도 했고, 일관된 상징들이 읽힌다는 점에서 한강 작가의 '흰' 이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한강 작가는 '이상한 온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책' 이라며 추천했다고 한다. 상징과 시적미학이 혼재된 소설이라는 점에서보면 한강 작가의 소설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도 싶다.
테드 휴스의 '까마귀' 라는 시집을 오마주하는듯 슬픔을 까마귀로 은유하는 이 소설속 배경은 비슷하다. 아내와 사별한 슬픔.
나는 줄줄이 찾아오는 애도객들을 대처하는 데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다보면, 기이하게도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인류학적 지각을 얻게 된다. 슬픔에 압도된 사람들, 애도를 가장하는 사람들, 지금껏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사람들, 너무 오래 머무는 사람들, 아내가, 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새로 사귄 친한 친구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대체 누구였는지 알아처먹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지구가 두꺼운 띠를 이룬 우주 쓰레기에 둘러싸인 그 놀라운 사진, 바로 그 사진 속 지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p. 15)
아빠, 아이들, 그리고 까마귀 로 화자가 번갈아가며 바뀌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돌고 돌지만 같은 위치가 아닌 그 경사를 빙 둘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다다른 꼭대기, 그 지점을 향해 소설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애도와 상실에 대한 분노를 오가던 중 까마귀를 만난다. 말하는 까마귀.
네가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떠나지 않을 거야.
날 내려줘, 나는 말했다.
안녕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안 돼. (p. 18)
남자에겐 어린 두 아들이 있다. 아이들은 어리지만 알고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어쩌면 아빠보다 먼저 적응하고 있었다. 그 변화에.
아빠가 우리를 우리 방으로 데려가서는 침대에 앉아 자기 양옆으로 앉아보라고 말하기 전부터 뭔가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이제 아빠는 예전에 우리가 알던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니고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하는 용감한 아이들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짐작했고 이해했다. (p. 26)
아이들은... 이해했다! 하지만 아빠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정말로 신경이 쓰여. 인간들이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를 빼면 별 재미가 없거든. 건강, 재난, 기근, 악행, 찬란한 것들 또는 정상적인 것들은 별로 내 흥미를 끌지 못하지만 엄마없는 아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엄마 없는 아이들은 순수한 까마귀야. 나처럼 감상적인 새에게 그것은 숙성되고 진하고 그윽해서, 마치 새 둥지처럼 약탈하기에 아주 그만이야. (p. 29)
까마귀는 아빠와 아이들 곁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녀는 죽느라 바쁘지 않았고, 간병의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사느라 바빴고, 그러고는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p. 36)
소설속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장이었다. 가족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여전히 삶의 현실속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떠난 이의 죽음의 흔적보다는 삶의 흔적이 많다는 것이 이토록 절절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러니 까마귀와 함께 살수밖에 없었던건지도...
아내는 나에게 좀 이른 생일 선물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플라스틱 까마귀였다. 우리는 사랑을 나눴고, 나는 그녀의 견갑골에 키스하면서 부모님이 내게 아이들은 날개가 자란다고 거짓말했었다는 이야기를 다시금 들려주었다. 아내는 "내 몸은 새가 아니야" 하고 말했다.
다시.
날개.
사랑.
내 몸은 새.
다시. 제발 모든 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p. 57)
회상과 현재와 우화와 실재가 혼재하는 이 소설은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삶이 때론 판타지처럼 여겨질 때가 있을 뿐이다.
아빠와 까마귀가 거실에서 싸우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끄아악 끄르르 까악, 끄아악 끄르르 하고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아빠는 그만해, 그만해, 까악, 까아악 하고 말하며 헛기침을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쉰 목소리로 꺽꺽거리고, 컹컹 짖고, 흑흑 흐느꼈는데, 그것은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아빠의 소리와 쿵 했다 꽥 했다 찌릿찌릿한 파열음을 내는 난폭한 새소리가 펼치는 괴상한 가믈란 즉흥연주 같았다.
까마귀는 털이 헝클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녀석은 조용히 문을 닫고 우리가 앉아 있는 부엌 식탁에 함께 앉았다. (p. 63)
번역자는 작품의 말미에 덧붙인 말에서 원작에 쓰여진 의성어들이나 비유적 표현들을 번역하는데 고심했다고 한다. 영어의 운율과 한글의 운율도 다를 뿐더러 비유라는 것이 은유라는 것이 읽혀지는 사회의 문화를 포함하는 것이기에 아마도 엄청 고민이 됐을 것 같긴 하다.
여하튼, 아빠가 슬픔과 싸우고 있는 동안 아이들 곁에도 어쩌면 당연히 슬픔은 늘 함께 하고 있었다. 아빠가 슬퍼하는 모습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매사에 아내를 끼워넣고 생각하는 습관을 좀 버려. 슬픔과 터무니없는 집착은 다른 거야. (p. 79)
하지만 애도라는 것이 원래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을 끊임없이 생각하다 조금씩 덜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 아니던가... 어쩌면 슬픔은 집착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녀는 감기에 걸렸었다. 아내가 아픈 건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렸고 밖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아내는 우리가 집안에서 날뛰는 꼴을 참아줄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공원으로 썰매를 타러 갔다. 아내가 없으니 우리 꼴은 한심했다. 아이들은 자기들 모자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끈으로 연결된 손모아장갑 양쪽을 패딩 소매 안으로 집어넣을 수 없었고, 다른 덩치 큰 아이들이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있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내가 장화도 신기지 않은 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길을 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아이들의 작은 발가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둘 다 징징댔고, 우리는 셋 다 엄마 없이는 제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실감했다. 아이들은 나를 동정했다. 나는 아버지로서의 내 탁월함이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한 덕분이었음이 드러나자 심한 당혹감을 느꼈다. 만일 그날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의 최종 리허설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자 다들 힘을 좀 내봐 요 똥덩어리들아, 혹은 날 도와줘' 하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날 데려가, 대신 날 데려가줘 제발, 하고. (p. 134)
아빠, 아이들, 까마귀가 번걸아가며 현실 혹은 판타지를 이야기하다 보니 각각 다른 에피소드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런 짧은 글들이 모여 전체 소설의 흐름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이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한페이지를 몽땅 옮겨 적었다. 적으면서 또다시 읽어도 여전히 가장 슬픈 장면이다.
나는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은 괜찮아졌다. 하지만 나는 조용한 성격이며 감상적이지 않다. 나의 형제는 까아아악 하고 외치고 그들에게 말을 건다. 내 인생에서 끔찍했던 그 몇 년은 얼룩진 까마귀였다. 그리고 털어놓을 작은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심지어 그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나는 휴스가 싫고 시가 싫다. (p. 142)
그래 아냐, 나는 말했다. 아빠도 동의해. 우리는 잘해나가고 있어.
방에서 나올 때 까마귀가 내게 따라붙더니 문을 닫고는, 내게 친밀한 헤드록을 걸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꼬맹아. (p. 146)
나는 우리 가족의 친구인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내는 내가 상상의 존재인 까마귀와 함께했던 가족 휴가를 좋은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그건 까마귀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어도 좋았고,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수도 있었고 저런 식으로 풀릴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다소 이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엄마가 그립다. 우리는 아빠를 사랑한다. 우리는 까마귀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건 그렇게 기이한 일이 아니다. (p. 147)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자란다. 자란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일까. 다 자란 어른은 오히려 변하기가 쉽지 않다. 늘 같은 모습으로 제자리에 있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진 모습으로 늘 다른 자리에서 갑자기 등장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까마귀는 늘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남자에게 까마귀는 늘 같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까마귀가 아빠에게 뭔가 가르쳐준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끊임없이 균형을 유지하는 법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속된 표현을 쓰자면 : 신념.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미안하다고 외치는 말, 다시 말해서 '네, 그래요' 다시 말해서 '고마워요' 다시 말해서 '계속 전진' (p. 154)
이제 그만 가봐도 될까, 내 임무는 끝났어. (p. 158)
엄마를 그리워하는 일에 관한 한, 그들은 전문가였어. 나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지. (p. 159)
우리는 아내가 사랑했던 장소로 갔다. 나는 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아이들에게 엄마가 죽은 후로 내가 줄곧 유별난 아빠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내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까마귀와 관련된 온갖 터무니없는 일들은 이제 끝났으며, 앞으로 강사 자리를 좀더 알아볼 계획이고 테드 휴스에 대한 생각은 그만할 거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내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p. 163)
일상이 일상이 아닌 것처럼 살때 까마귀는 그들 옆에 존재했지만, 일상이 일상으로 느껴졌을 때 까마귀는 날아가고 없었다.
애도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일상이 아닌 시간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간...
파도처럼 일어나는 웃음소리 그리고 고함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내 두다리를 껴안았고, 발을 헛디디다 서로를 움켜잡았고, 뛰고, 돌고, 휘청이고, 으르렁거리고, 새된 소리를 지르더니, 이윽고 목청껏 외쳤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아아들의 목소리는 바로 그들 어머니의 삶과 노래였다. 미완인 채로 남아 있다. 아름답다. 이 모든 것이. (p. 165)
차마 하지 못했던 더이상 할 수 없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목청껏 소리지를 수 있을 때 그 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나올때 어두웠던 세상은 다시 밝아져 있었다. 그래서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라 제멋데로 날아왔다가 제멋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슬픔이 다녀갔기에 일상은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기이하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나는 해피엔딩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