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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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끔은 스릴러 소설을 읽어줘야 한다.

간만에 몰입해서 읽은 이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었을때 왠지 머리가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표지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두 부부, 즉 4명의 인물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로이드 와 헨 부부는 한적하고 쾌적한 동네로 이사를 와서 동네 주민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매슈 와 미라 부부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서로 옆집 이었다.

헨은 벽난로 위에 놓인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작은 놋쇠 뱀, 나무로 만든 촛대, 자그마한 개 초상화, 불이 켜진 지구본 그리고 한가운데에 트로피가 있었다. 트로피의 은색 받침대 위에는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다른 쪽 다리는 쭉 편채 앞으로 칼을 겨눈 펜싱 선수상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헨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p. 23)

표지였다.

표지 그림이 이렇게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줄은 미처 몰랐다.

신선했다.

서재로 돌아간 매슈는 신문지로 유소년 체전 트로피를 싸서 빈 상자에 넣었다. 밥 셜리의 라이터, 제이 사라반의 BMW에서 가져온 비아르네 선글라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런 맨소가 가지고 있었던, 너덜너덜해진 아동판 <보물섬>도. (p. 29)

아직 사건이 벌이지지도 않았는데 범인은 암시되었다.

대부분 소설 초반에 밝혀진 범인은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반전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었다.

그렇게 범인을 염두에 두고 과거 사건을 역추적하는 동시에 현재 사건이 전개된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헨은 늘 음산한 분위기의 책들을 골랐고,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때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몇몇 대회에서 상까지 탔으니까. 하지만 캠던 대학교 1학년 때 첫 조증이 오면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 오가게 되었다.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했으며, 머릿속으로는 쉴 새 없이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헨은 자살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상상했으며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씹었다. (p. 37)

화가이자 동화삽화작가인 헨은 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병원에 입원도 하고 전기치료도 받고.. 여하튼 긴 치료 끝에 지금은 조증은 없이 가끔 우울증만 있는데 이또한 꾸준히 복용중인 약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지 꽤 오래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충분이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은 기기묘묘한 그녀의 작품들은 볼때마다 섬찟하지만 그녀는 그 그림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그림이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매슈는 <동떨어진 거울>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로 읽는 것이리라. 매슈는 역사물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중세 시대를 다룬 책이 제일 좋았다. 죽음이 만연하고, 생명이 값싸게 다뤄지며, 거칠고 생생한 당시 분위기 때문이었다. (p. 47)

매슈는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다. 헨이 몇년 전 일어났던 미제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자신을 신고하면서 두 이웃은 서로 친해질 새도 없이 접근금지신청을 한 사이가 됐지만 매슈는 헨에게 자꾸 끌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헨은 자신을 알아보았다. 헨의 그림에서 매슈는 동질감을 느꼈다. 매슈는 헨과 헨의 그림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통할 거라고 여겼다.

경찰도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매슈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헨리에타 머주어는 믿을 수 없는 증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짜 증인이었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 어떤 면에서는 일이 완벽하게 풀렸다. (p. 199)

어머니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고, 어떤 모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증인의 얼굴이었다. 그 일을 겪는 게 아니라 그냥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 그게 바로 헨리에타의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매슈는 그 순간 그녀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뿐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헨리에타는 그의 아버지의 괴물 같은 면, 어머니의 나약함과 우아함을 모두 보았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동생 리처드도 보았다. 매슈가 처음으로 누군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 그의 안에서 열려버린 문도 보았다. (p. 200)

헨의 추리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남편 로이드도 경찰도 아무도. 오직 범인 매슈만이 헨의 말을 믿어주었다. 헨의 과거 병력은 철저히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매슈는 알았다. 헨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헨에게 모든것을 말하고 싶어졌다.

유일한 증인이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증인인 헨, 헨리에타.

고대그리스 신화속 인물인 카산드라가 생각났다. 트로이의 공주이고 예언력을 가졌으나 저주 받은 예언력이라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았던, 진실되지만 거짓으로 받아들여졌던 카산드라의 예언. 그리고 실현된 트로이의 멸망.

헨과 카산드라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나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은..."

"당신도 알겠지만 난 누구에게도 솔직히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상담사를 찾아가도"

"상담사가 돼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리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지 설명하려는 겁니다. 난 당신에게 무슨 얘기든 할 수 있고, 당신은 그걸 듣고도 어쩌지 못해요.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생각을 바꿔보면 당신에게도 가치 있는 제안일 겁니다. 당신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난 여자는 죽이지 않아요. 그러니 난 당신도 해치지 않을 겁니다." (p. 234, 235)

매슈와 헨은 기묘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헨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고, 매슈는 헨에게 자꾸 솔직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기괴하면서도 웃기는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와 매슈뿐이라니. 매슈는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테니까. 헨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고, 다들 그녀의 정신병이 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매슈를 만나야 할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는데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슈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들어줘야 할지 몰라. (p. 247)

매슈는 남자만 죽였다. 그것도 바람핀 남자만. 그런 남자들은 지속적으로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이므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슈의 살인은 작품 초반부터 등장했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은 잔혹하진 않았다. 그저 일종의 사형집행수 처럼 보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나한테 구세주 콤플렉스가 있고, 세상의 모든 죄 없는 여자를 사악한 늑대에게서 구해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죠? 난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도 없진 않아요. 우리 아버지는 괴물이었고, 어머니는 피해자였죠. 그래서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이나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깊게 분석했습니다. 난 나를 잘 압니다.

남자를 해치는 여지보다 여자를 해치는 남자가 훨씬 많습니다. 이건 그냥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난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단지 당신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난 압니다. (p. 264)

매슈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늘 논리정연하게 자신을 분석하고 있었다. 아무나 죽이지 않고 죽어야 할 놈만 죽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이 살인범 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갖진 않았다. 늘 이성적으로 생각했고, 헨과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헨을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살인범 매슈 뿐이었다.

처음부터 시작된 아이러는 점점 더 타당한 근거를 드러내며 독자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매슈가 비록 살인범이지만 잔인한가에 대해 자꾸 의구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한동안은 괜찮다가 살인을 맛보고 나면 문이 열리는 셈이고, 다시는 그 문을 닫지 못합니다. 적어도 난 죽어 마땅한 남자들만 죽이면서 그걸 통제할 수 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해요. 동생은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죄없는 여자들을 해치고 싶어 해요. (p. 312)

매슈에게 열린 문이 동생에게도 열려 버렸다.

그리고 동생 리처드는 늘 헨 을 예의주시하며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슈와의 대화를 통해 헨은 남편 로이드의 감춰진 모습을 깨닫게 되고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매슈를 '나의 곰 아저씨' 라 부르며 믿어왔던 아내 미라는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매슈의 감춰진 부분들을, 하지만 언젠가부터 눈치챘던 부분들을 이제 인정해야 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때 사건이 터저버렸다. 미라가 매슈를 만나러 가고 있던 그때.

살인사건이 연거푸 발생하고 여전히 헨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이 활동을 개시한다.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 그날, 미라고 집에 가고 있던 그날, 헨의 작업실에 누군가 찾아온다.

잠들었던 그가 깨어났다.

처음부터 드러난 진실이, 거짓에서 진실이 되어 가는 과정 내내 서서히 쫀득해지는 소설이었다.

스릴러 소설다운 반전의 재미도 함께 있는 가독성 좋은 소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브링 미 백' 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브링 미 백은 여자 버전이고 이 작품은 남자 버전이랄까.

헨은 싸이코패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였는지 그녀 주위엔 자꾸 싸이코패스들이 다가왔다. 여자건 남자건 어리건 나이들었건.

그리고 그들은 제정신이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고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다. 그녀는 싸이코패스가 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또다른 싸이코패스를 만나더라도 헨은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Before She Knew Him 그녀가 그를 알기도 전에' 라는 원제 뒤에 어떤 말이 어울릴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그를 알기도 전에 ...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알아보았을때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ps. 이 책에서 가장 서늘했던 부분은 호밀밭의 파수꾼 은 언급한 부분이었다. 최근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싸이코패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읽고 나니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매슈는 손끝으로 책등을 훑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열세 살 때 그를 구원해 주었다. 그 책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와 세상 전반에 느끼는 분노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p. 318)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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