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슐린을 시작으로 성장호르몬, 인터페론 등이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생산되면서 화학약품에서 바이오의약품으로 제약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 (p. 233)
한때, 기생충은 박멸해야 하는 악이었지만 기생충이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난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충을 인체는 이물질로 인식한다. 면역세포가 기생충을 감시하며 관리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가 강해졌는데, 이방인이었던 기생충이 갑자기 사라지자 혼란이 생겼다. 아토피, 천식, 비염같이 예전에는 드문 질환이 늘어났다. 3만년 전 사람 몸속에서 회충이 발견될 만큼 사람과 기생충은 오랫동안 공생해왔다. 그래서 서로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균형을 이루며 살았다. 보기에는 흉측하지만 나름 기생하면서 면역을 튼튼하게 해준 공로가 있다. (p. 252)
1980년대 우리나라 흡충 감염은 400만 명에 달했다. 그때만 해도 바이엘에서 판매한 빌트리시드가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서 약값이 비쌌다. 그런데 KIST 응용화학연구소에서 3년여간의 연구 끝에 1983년 새로운 방법으로 프라지콴텔 합성에 성공했다. 신풍제약은 이 합성법을 실용화해서 디스토시드를 만들어 판매했다. KIST에서 만든 합성법은 대량생산이 가능해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바이엘이 신풍제약에 특허권을 수십만 달러에 팔라고 요구했지만 팔지 않았다. 독일 역시 한국이 이런 약을 만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연합해 우리나라에 물질특허를 도입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이후 합성법이 아닌 화학적으로 제조되는 물질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물질특허제도가 1987년에 도입되었다. 이때문에 독자적인 물질을 최초로 만들지 못하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신약 개발을 시작했다. (p. 260)
후발주자가 앞선 나라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선진국이 처음에 어떻게, 왜 기술을 개발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역사, 사회, 문화 요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쫓아간다고 해서 그들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모방에 그치거나 힘들게 개발해도 시장성이 없어 쉽게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신약 개발을 하려면 단지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p. 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