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마크 미오도닉은 '타임즈'가 선정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100명 중 한 명으로 재료 라이브러리인 UCL공작연구소(Institute of Making)의 소장이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질들 중에서 '액체'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적으로 풀어낸 이 책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읽는 동안에도 내내 잘 흘러간다.
세계 유수의 지식인들이 극찬한 글솜씨까지 갖추고 있는 저자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는 여정에서 만난 액체들에 관해 그만의 독특하고 개성넘치는 스타일로 딱딱할 수도 있을 과학적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저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러 출발해서 학회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하고 나면 이 책 한권을 다 읽게 되는데, 과학책을 읽은듯 비행에세이를 읽은듯 묘하게 공감하면서 때론 키득키득 웃어가며 읽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과학책을 과학책이 아닌 것처럼 읽게 되는 설정의 힘! ㅎㅎ
저자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검색대에서 압수당했던 액체형 용품들에 대한 그닥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을 상기하며 '폭발적인' 액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늘 같은 형식으로 시연되는 승무원의 안전브리핑을 보면서 저자는 그 브리핑 속에 빠져있는 항공유 에 대한 위험성을 혼자 걱정한다. 9세기에 페르시아의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라제스가 '비밀의 책'이라는 책에서 언급했던 '등유'의 발견이 왜 천 년이 지나서야 현실화 되었는지 읽다보면 과학적 발견도 시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뭐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증기기관에 대한 아이디어도 고대에 이미 있었지만 과학이 된 것은 역시나 한참 후였다.
여하튼, 등유에 대해 걱정하던 마음은 승무원이 제공해준 와인을 마시면서 비로소 진정되었는데 그래서 다음 등장하는 액체는 '알코올'이다. 와인에 들어있는 알콜에서 용해제 역할을 하는 알콜 이야기를 하다 표면장력의 차이를 설명하다보면 시각이 맛에 끼치는 영향까지 설명하게 된다. 비행기에서 취할 만큼 마셔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창밖을 내다보니 '바다' 가 보인다. 커다란 액체의 등장이다.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는 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이야기를 시작으로 밀도와 파도를 거쳐 쓰나미의 위력과 원자력발전소문제까지 등장시킨다. 하지만 창밖으로 잔잔해보이는 파도 대비 비행기가 난기류에 흔들기기 시작하자 저자는 비행기 동체의 안전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다. 다른 승객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비행기가 여러 조각이 접착제로 붙어 있는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공포에 빠질 수 밖에 없다며 '접착제' 이야기로 연결한다.
그렇다. 비행기의 동체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작은 조각들이 이어붙여져 있는 것이다. 비행기를 붙일 수 있을 만큼의 접착액체가 등장하기까지 인류는 다양한 재료의 역사를 거쳐왔다. 접착물질의 변천사는 고무의 등장과 에폭시까지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제 안정된 비행기에서 저자는 영화 한편을 보기로 한다. 다음 액체는 '액정' 이다.
지금은 움직이는 활동을 액정화면을 통해 보는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사실 액정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림을 보는 것에서 LED 그리고 LCD 액정화면으로 보기 까지 급격한 발달을 이루었다. 끈적이는 거미줄을 뽑아내던 영화 스파이더맨을 다 보는 동안 함께 했던 액정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한다.
옆사람이 거칠게 밀어낸 덕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저자는 자신이 자는 동안 옆사람 소매에 '침'을 흘린 것을 깨닫지만 아직 자고 있는 척 당황감을 감추기로 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 '침' 이 사실은 불쾌한 물질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열심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기내식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깬 척 식사에 집중하던 저자는 그동안 생각했던 '침'의 효용성으로 인해 자기만족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식후 '음료'를 선택한다.
'커피나 차 드시겠어요?' 하는 승무원의 질문에 길고긴 비행시간 동안 각성상태로 있고 싶지 않았던 저자는 '차'를 선택하고 한모금 마시자마자 이내 후회하게 된다. 우리는 차 보다는 커피 를 많이 마시는데, 영국인들은 (아직까지는) 차 를 훨씬 많이 마시는 문화라고 한다. 차문화와 다양한 차 와 커피원두 이야기를 하다보니 '비행기 내의 기압이 낮기 때문에 물의 끓는점은 약 92℃가 되는데, 우연히도 커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는 과학적 사실을 뒤늦게 기억한 저자는 차의 이뇨성분에 충실한 신체반응에 의해 화장실로 향한다.
비행기 내의 화장실에 새삼스러운 감탄을 하며 '세정제'로 손을 씻던 저자는 비누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액체형 비누로 손을 씻고 로션을 바르며 화장실을 나오던 저자는 지금 비행기가 날고 있는 고도에서 하늘의 온도가 얼마나 낮은지 생각하다 '냉매'를 연상하게 된다. 냉장고와 에어컨의 냉매가 발견되기 까지의 과정을 이야기 하다가 액체 산소까지 이어지는 동안 비행기는 어느새 도착지에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그의 손에는 세관신고서가 들려진다.
'잉크' 가 들어 있는 볼펜으로 세관신고서를 적다보니 지금의 '잉크'가 자리잡기까지 어떤 노력들이 있어왔는지 이야기하던 저자는 작성을 마치고 창밖을 보니 구름이 보이고 안개낀 상태에서의 착륙이 갑자기 불안해진다. '구름'의 상당부분은 수분으로 되어 있다. 구름속 수분과 인공비까지 생각하다보니 불안한 안개속에서도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한다. 비행기가 지구표면에 닿았다. 그런데 '지구'의 중심또한 액체 이다.
'지구'는 모든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유동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행성이다. 비행기가 단단한 땅에 안착한 것 같지만, 사실 '단단한' 은 실제로 옳은 단어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행성이 움직이는 한 지구는 특별히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지구는 뜨거운 액체 덩어리로 생명을 시작했음을 상기시킨다. 지구의 액체형 활동은 화산을 통해 체감할 수 있으니 화산활동을 생각하던 중 어느덧 비행기 내에 사람들이 거의 다 내렸음을 확인한 저자도 서둘러 내리기로 한다.
지구 이야기를 하다보면 '환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환경에 악형향을 주는 다양한 재료들을 생각하다가도 인류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에필로그 에서 물 이야기를 조금 더 한 후 '액체를 기대 수명을 연장하고 집단 이주와 갈등을 예방하는 주요 발명품으로 환영하게 될' 21세기 를 그려보며 저자는 책을 마무리한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다음 액체로 흘러가는지 다 읽고 나니 마치 내가 저자 옆에서 비행기를 11시간 함께 타며 이야기를 들은 듯한 피로감이 살짝 들 정도다. 하지만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의 액체들이 새롭게 보일 것 같긴 하다. 이 책이 액체를 다룬 책이고 보니 '고체'를 다룬 저자의 책 '사소한 것들의 과학' 이라는 책도 궁금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체' 에 대한 책이 어서 나오길 기대하게 된다. 이처럼 신선하게 일상의 과학탐험을 시켜주는 책들을 나는 언제나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