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은 고립을 원했다. 고립된 곳에서 자학을 했다. 십자가형을 자처하고 채찍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다.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꼈고 지나치게 속죄하려 했다. 그가 채찍질 하는 것을 보면서 '다빈치 코드'의 '오푸스 데이' 가 떠올랐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존이 문명을 접하고나서 갑자기 그렇게까지 종교적으로 몰입하는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가는 존을 예수화 하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존의 마지막 선택은 이 작품의 가장 디스토피아적 장면이었다. 그것은 승화가 아니라 포기였고 절망이었다. 더이상 암울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물들의 이름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버나드 마르크스 는 버나드 쇼와 칼 마르크스를 합성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둘다 진보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헬롬홀츠 왓슨 은 과학철학의 선구자였던 헬름홀츠 와 청교도 목사였던 토머스 왓슨의 이름을 합성한 것으로 보아 철학적 인물의 성향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존 은 가장 흔한 이름으로 먼지 같고 톱니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인상깊었던 이름은 다윈 보나파르트였다. 소설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영화제작자인데, 그가 만든 영화로 존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다윈도 나폴레옹도 어떤 의미로든 간에 커다란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인물들 아닌가? 그런 인물들의 이름을 잠깐 등장하는 이 영화제작자에게 부여한 이유를 다른 그 어떤 이름들보다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인물들의 이름부터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소설 내내 포드라는 이름과 포드의 공장생산방식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은유인지 풍자인지 한쪽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온통 이중적이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가족은 무엇인가? 사랑은 ?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는가?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래서 여전히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불평등과 비인간적 안정성이 (그것이 디스토피아인 것이 분명함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음이 분명하다. 피라미드식 사회구조와 운명적이고 역할론적인 삶과 나쁜 감정을 전달하는 문학을 배제하는 공동교육과 가족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소수 철학자의 나라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국가는 (도덕과 윤리적 면을 제외하고 본다면) 과학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로 표현된 것 같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했다는 고대철학처럼 미래가 될 수 있는 모든 폐해를 미리 보여주었기에 이 작품이 디스토피아소설의 고전이 된 것일까
그 모든 질문에 다양한 답을 해오면서 철학이 발달해 오고 있듯이 그 모든 폐해가 실현되지 않도록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무엇일까? 이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미래는 의미있었다. 그리고 그 '멋진 신세계'가 던져주는 오답은 넘치는 해석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도 '멋진 신세계' 는 계속 멋지게 회자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