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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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되는 세계,

모든 행동과 생각, 죽음까지도 통제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느 만큼이나 인간일까?

표지 中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중에 최고로 손꼽히는 명작이자 고전이 아마도 '멋진 신세계' 인가 보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 파괴된 지구의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그린 '더 월' 이라는 작품도 여자들의 입을 막고 소유물화하는 시대로 회귀하는 현실을 그린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라는 작품도 '멋진 신세계'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멋진 신세계'로 풍자되는 멋지지 않은 미래를 그린 작품들 또한 '멋진 신세계'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고 홍보되지 않을까? '멋진 신세계' 라는 제목이 갖는 은유와 상징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인 관용어가 되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가 상상한 멋진 신세계는 포드자동차가 생산되는 컨베이어벨트 식의 대량생산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생물학적 표현과 공장적 지식은 그가 경험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작가의 할아버지는 진화론의 다윈을 옹호하며 논쟁에 나섰던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고 형은 생물학자 동생은 전기생리학자 인 학자집안이었다. 집안 연줄로 들어가 잠시 근무했던 당시 최고의 첨단 시설로 지어진 화학공장에서의 경험또한 '멋진 신세계'에 큰 영감을 주었다. 즉 학문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는 당시 최첨단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판은 1932년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를 1946년 다시 내면서 적은 작가의 긴 머리글은 전쟁을 겪으며 저자가 디스토파이적 미래에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작가에 대한 설명보다 번역자에 대한 설명이 더 길게 써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지 싶은데, 그 긴 번역자의 약력이 이 책의 번역적 신뢰도를 높여주는데 큰 기여를 하긴 했다. 외국책은 번역자가 정말 중요하다.

워낙 유명한 책이고 읽는 내내 더디게 책장이 넘어갔던데다 다 읽고 나서도 온통 물음표들이 남았던 책인지라 나름 정리하기전 사설이 길어졌다;;;

거의 100년전 나왔던 '멋진 신세계' 의 디스토피아가 여전히 전설적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학생들이 부화-습성 훈련 런던 총본부로 견학와서 훈련국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훌륭하고 행복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가능한 한 그런 인식은 조금만 깨우쳐줘야 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독특한 개성이란 미덕과 행복에 이바지하지만 보편성이란 지적인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계층은 사상가들이 아니라 실톱으로 뇌문세공을 하는 기술자나 우표 수집가 따위의 사람들이다. (p. 31)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 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세계국에서 인간이란 사회구성원 딱 그만큼이어야 했다. 개성보다는 보편성이 중요한 딱 그만큼.

획일적으로 떼를 지어 태어나는 표준형 남자들과 여자들,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거친 단 하나의 난자로부터 생산된 인력으로 몽땅 운영되는 하나의 작은 공장(p. 36)

"알파 아이들은 회색 옷을 입어요. 그들은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합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베타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로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감마나 델타보다 훨씬 좋습니다. 감마들은 어리석어요. 그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어요. 그리고 델타 아이들은 황갈색 옷을 입습니다. 아, 싫어요, 난 델타 아이들하고는 놀고 싶지 않아요. 엡실론들은 더 형편없죠. 그들은 너무 우매해서 글을..." (p. 64)

 

컨베이어벨트위 유리병 속에서 수정란이 자라고 각종 제제요소가 들어간 주사를 맞고 필요한 만큼의 능력만 가지고 태어나 정해진 운명대로만 살다가 똑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생명체 인간, 그런 인간이 생산되는 시대에는 날짜도 포드력을 사용한다. 오마이갓 대신 오마이포드 를 내뱉고, 성호를 긋는 대신 T자를 의식하는 600여년 후의 미래사회는 철저한 신분제사회다.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계 통제관들은 단 10명뿐, 이들은 거의 신적인 존재다.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인 안정이 없다면 어떤 문명 세계도 존재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안정이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회의 안정도 존재하지 못한다"

기계가 돌아가고, 돌아가고, 계속해서 영원히 돌아가아먄 한다. 가만히 서 있으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바퀴들은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지만 누가 돌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바퀴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 축에 달린 바퀴들만큼이나 변함없이 꿋꿋한 사람들이, 건전한 사람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만족하는 삶에서 안정을 찾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 아기, 우리 어머니, 오직 나만의 소유, 하나뿐인 사랑을 외치고, 내가 저지른 죄, 내가 섬기는 무서운 하나님을 부르며 신음하고,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고, 열병에 시달려 헛소리를 하고, 늙고 가난한 신세를 한탄한다면, 그런 자들이 어찌 바퀴를 보살필 능력이 있겠는가?그리고 만일 그들이 바퀴를 돌보지 못한다면...... (p. 85)

 

가정은 없다. 모든 아이들은 공장에서 태어나 집단 양육된다.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라는 단어는 추악한 단어가 되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개인은 없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공유된다. 결혼은 미개하다 혼음이 당연하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해지면 소마 라는 약을 먹음으로써 행복한 몽상에 빠진다. 모두 그저 즐기고 소비하며 살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그 소비재를 생산하기위해 인력이 필요하고 그 인력은 또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세상의 바퀴는 돌아간다. 세상은 그저 계속 쳇바퀴돌듯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바퀴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순환이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이가 등장한다. 버나드 마르크스.

그는 알파이지만 알파답지 않은 왜소한 체구로 놀림을 받고 스스로도 위축되다 보니 고립감을 깨닫게 되면서 점점 더 일반적이지 않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헬름홀츠 왓슨.

그는 완벽한 알파의 신체를 가졌고 넘치는 능력을 가졌으나, 능력이 넘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신적인 과잉능력이 그에게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두 남자가 가진 공통점은 그들이 혼자라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버나드가 혼자라는 의식에 평생 시달려온 반면에, 헬름홀츠 왓슨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자신의 정신적인 과잉상태를 점점 의식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p. 120)

사회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해야 할 인간이 공동체의 부속으로서만 살아야 할 인간이 '혼자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주변과 내가 다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말해 '자아'가 생겼다는 말이 아닐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는 결국 '자아' 라는 것일까.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p. 149)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이 알아들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훨씬 더 나다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토록 철저히 어떤 다른 존재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나 자신다워진다는 거죠. 사회적인 집단의 세포 하나가 아니고요. 당신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나요, 레니나?" 그러자 레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p. 151)

 

혼음과 성적유희와 소마라는 약이 주는 쾌락을 거부하는 버나드를 보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한다. 그가 함께 산책하길 원하는 여성인 레니나는 그런 그의 말들을 무서워 한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성인의 몸에 아기의 정서로 행동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야만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있었으니, 이 야만인들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병을 앓고 노화를 거쳐 죽음을 슬퍼하는 삶을 살고 있다. 미워하며 싸우기도 하는 불편한 감정들을 갖고 종교적 제의와 조상숭배같은 관습들도 유지하며 어떤 문명세계와의 접촉도 없는채 경계안에 그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을 허가받은 이들만 구경할 수 있었으니 알파인 버나드는 레니나와 함께 여름휴가로 이곳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의 지역에서 야만인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문명인출생자를 만난다. 존의 어머니는 과거 이 지역에서 조난당한 문명인이었고 그때 임신중이었다. 존은 외모가 달라 야만인들 사회에서 늘 외톨이로 자라면서 '자아'를 확립했다. 그의 외로움에 공감한 버나드는 그에게 문명사회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이곳에는 훌륭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레니나를 생각하자 그의 상기된 얼굴이 갑자기 더욱 붉어졌다. 젊음과 더불어 피부 영양제로 윤기가 나고, 포동포동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진한 초록색 인조견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사였다. 존은 말을 더듬거렸다. "오, 멋진 신세계여"

"오, 멋진 신세계여" 존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멋진 신세계여. 우리 당장 출발합시다"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젊은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버나드가 말했다. "그리고 어쨌든 당신이 신세계를 실제로 볼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p. 220)

 

존은 야만인 지역에서 우연히 구한 셰익스피어전집을 읽으며 성장했다. 그의 세계관은 곧 셰익스피어문학이었다.

문학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는 버나드와 레니나는 그의 말도 감성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외모적으로 존은 문명인이었고 연구가치가 있었다.

"학생들은 세익스피어를 읽나요?" 야만인이 물었다.

"물론 안 읽습니다. 우리 도서관에는 참고서들만 비치합니다. 이곳의 젊은이들이 기분 전환할 대상이 필요하면, 그들은 촉감 영화를 보러 갑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혼자서만 즐기는 오락에 탐닉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아요" (p. 253)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참고서만 읽고 관련 기술들만 익히고 시간이 나면 함께하는 오락에 탐닉하는 사람들.

레니나와 촉감영화를 보고 난 존은 화가 나서 소리친다. "그건 천박한 영화였어요. 천박한 영화였다고요"

존이 꿈꾸었던 신세계는 이런 세계가 아니었다. 존은 레니나와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레니나는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금 정신이 들어 외부의 현실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에 비치는 주변의 존재들을 인식했다. 그것은 공포와 역겨움의 무게로 그를 절망시켰다. 눈앞의 현실은 개체로서의 구별이 불가능한 동일성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여서, 그가 밤낮으로 반복하여 겪었던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쌍둥이들, 쌍둥이들...... 그는 흠칫 동작을 멈추고, 당혹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몰려든 황갈색 집단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이곳에 존재하는가!" 노래의 가사가 그를 조롱하듯 놀려댔다.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오, 멋진 신세계여......"

"소마 배급시간입니다!"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질서를 잘 지켜주기 바랍니다. 거기 빨리 좀 움직여요" 기대감에 부풀었던 쌍둥이들인 만족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만인은 그냥 서서 구경만 했다. "오, 멋진 신세계여, 오, 멋진 신세계여......"그의 머릿속에서는 노래 가사의 음조가 달라지는 듯했다. 노래는 비탄과 회한에 빠진 그를 비웃었으며, 너무나도 흉약하고 냉소적인 모욕의 어조로 그를 놀려댔다! 노래는 악마처럼 웃으며 구역질 나는 추악함의 악몽을, 비천한 더러움의 악몽을 끈질기에 내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전투 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오, 멋진 신세계여!"미란다가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악몽까지도 숭고하고 못진 무엇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선포했다. "오, 멋진 신세계여!" 그것은 하나의 도전, 하나의 명령이었다.

"그만해요!" 야만인이 우렁차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하라고요!" (p. 318~320)

 

야만인이 일으킨 소동에 헬름홀츠가 동참했고 버나드는 당황했다. 존은 세익스피어의 작품속 대사와 노래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세익스피어 문학작품들을 통해 평화를 얻었고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는 또하나의 이상향일 뿐이었다. 또하나의 '멋진 신세계'일 뿐이었다.

소동은 진압되었고 세 사람은 통제관을 만나게 된다.

"난 궁금했어요" 야만인이 말했다. "태아 유리병들을 가지고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얻어내는 방법을 잘 알면서도 도대체 왜 그들을 만들어놓았는지 말이에요. 이왕이면 왜 모든 사람을 알파 더블 플러스로 만들지 않나요?"

무스타파 몬드가 웃었다. "그건 우리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그가 대답했다. "우린 행복과 안정을 신봉합니다. 알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틀림없이 불안정하고 비참해집니다." (p. 336)

 

소설의 앞에서 훈련국장이 인간의 성장-학습 과정을 설명했다면 소설의 뒤에서 통제관은 사회의 시스템과 세계관을 설명한다. 야만인의 질문에 대한 통제관의 대답은 앞서 행했던 그 어떤 시도들 중에서 결국 선택된 가장 나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강조한다.

"섬으로 전출될 거야. 다시 말하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흥미진진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거지.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 자아의식이 강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온갖 사람들이 있는 곳 말이야. 정통성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관념을 지닌 사람들. 다시 말하면, 조금이라도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이지. 난 자네들이 부러울 지경이라네. 왓슨"

헬름홀츠가 웃었다. "그렇다면 왜 통제관님은 스스로 섬으로 찾아가지 않으시나요?"

"그건 결국 내가 이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야" 통제관이 대답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었어" (p. 343)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섬으로 전출가게 되었다.자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것을 통제관은 축하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잘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통제관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리학자였던 그는 순수과학을 포기하고 통제관을 선택했다.

"과학 덕택이었지. 하지만 과학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일을 과학이 스스로 무너뜨리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연구 범위를 그토록 치밀하게 제한했고, 나는 그 때문에 하마터면 섬으로 쫓겨날 뻔했지. 우리는 과학이 눈앞에 닥친 가장 긴박한 무네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게 해. 다른 모든 연구는 지극히 용의주도하게 막아내지." (p. 344)

"만인의 행복은 바퀴들을 끊임없이 돌아가게 해주지만, 진실과 아름다움은 그러질 못해. 물론 민중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을 때마다 중요성을 강조했던 대상은 진실이나 아름다움보다는 행복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한이 없는 과학적인 연구는 아직 허용되었어. 사람들은 마치 진리와 아름다움이 지상의 선 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떠들어댔어. 9년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는 그랬지. 전쟁은 정말로 그들의 인식을 바꿔놓았어. 사방에서 탄저열폭탄이 터지는 마당에 진리니 아름다움이나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9년 전쟁 이후에, 그때부터 과학이 처음으로 통제를 받기 시작했지. 조용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었어. 우리들은 그 후부터 통제를 계속해왔어. 물론 그것은 진실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행복은 대가를 치러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p. 345)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상의 당위성은 늘 곤혹스러운 질문을 남긴다. 통제된 안정 속에서의 무지한 행복과 자유로운 혼란 속에서의 복잡한 감정...

괴로운 진실을 모르지만 행복한 것과 행복하지 않지만 진실을 아는것 중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가 쉽게 한가지를 고를 수 있을까...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 작품을 써냈을 작가의 당시 시대적 상황은 충분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게 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던지고 있다는 것은 어찌 해석해야 할까...

여하튼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떠나게 되었다. 존은?

야만인은 침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말파이스에서 지낼 때 그는 푸에블로 마을의 공동체 행사가 열리면 늘 사람들이 그를 따돌렸기 때문에 괴로웠고, 문명화한 런던에서는 공동체 활동들에서 전혀 빠져나갈 길이 없어 조용히 혼자 지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p. 355)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p. 362)

 

존은 고립을 원했다. 고립된 곳에서 자학을 했다. 십자가형을 자처하고 채찍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다.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꼈고 지나치게 속죄하려 했다. 그가 채찍질 하는 것을 보면서 '다빈치 코드'의 '오푸스 데이' 가 떠올랐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존이 문명을 접하고나서 갑자기 그렇게까지 종교적으로 몰입하는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가는 존을 예수화 하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존의 마지막 선택은 이 작품의 가장 디스토피아적 장면이었다. 그것은 승화가 아니라 포기였고 절망이었다. 더이상 암울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물들의 이름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버나드 마르크스 는 버나드 쇼와 칼 마르크스를 합성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둘다 진보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헬롬홀츠 왓슨 은 과학철학의 선구자였던 헬름홀츠 와 청교도 목사였던 토머스 왓슨의 이름을 합성한 것으로 보아 철학적 인물의 성향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존 은 가장 흔한 이름으로 먼지 같고 톱니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인상깊었던 이름은 다윈 보나파르트였다. 소설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영화제작자인데, 그가 만든 영화로 존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다윈도 나폴레옹도 어떤 의미로든 간에 커다란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인물들 아닌가? 그런 인물들의 이름을 잠깐 등장하는 이 영화제작자에게 부여한 이유를 다른 그 어떤 이름들보다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인물들의 이름부터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소설 내내 포드라는 이름과 포드의 공장생산방식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은유인지 풍자인지 한쪽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온통 이중적이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가족은 무엇인가? 사랑은 ?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는가?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래서 여전히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불평등과 비인간적 안정성이 (그것이 디스토피아인 것이 분명함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음이 분명하다. 피라미드식 사회구조와 운명적이고 역할론적인 삶과 나쁜 감정을 전달하는 문학을 배제하는 공동교육과 가족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소수 철학자의 나라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국가는 (도덕과 윤리적 면을 제외하고 본다면) 과학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로 표현된 것 같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했다는 고대철학처럼 미래가 될 수 있는 모든 폐해를 미리 보여주었기에 이 작품이 디스토피아소설의 고전이 된 것일까

그 모든 질문에 다양한 답을 해오면서 철학이 발달해 오고 있듯이 그 모든 폐해가 실현되지 않도록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무엇일까? 이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미래는 의미있었다. 그리고 그 '멋진 신세계'가 던져주는 오답은 넘치는 해석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도 '멋진 신세계' 는 계속 멋지게 회자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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