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단편소설 한 작품이 수록된 가제본을 받았다.

40여페이지의 짧은 단편이었는데... 이 얇고 가벼운 책이 주는 무게감이 남달랐다.

뭐라고 해야할까... 적절한 표현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데... 아릿하면서 미묘하고 섬세하면서 슬프기도 한... 여하튼, 몇페이지 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는 개성적인 문체를 가진 작가로 다가왔다.

나는 이날이 생각보다 늦게 찾아온 것에 잠시 놀랐을 뿐 얼어붙는다거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나, 이제 그 정도 맷집은 있다고. (p. 5)

작가로 등단하여 첫 소설집이 나온 '나' 에게 구여친 혜인이 축하의 문자를 보내온다.

등단 소감에도 소설에도 잡문에도, 제발 좀 알아달라고 봐달라고 온갖 떼를 다 써놨는데 모를 수가. 그건 때론 대수였고 대체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혜인에게만큼은 꼭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는 사람 천지였지만, 혜인에게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p. 7)

'나'는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혜인과 만나기로 한다.

오랜 친구와의 만남은 이토록 허무하고, 쉽고, 단박에 잡혔다. 안부도 기별도 없이 용건만 말하고 끊었지만 그게 부족했다거나 미안하지 않았다는 점마저 익숙했다. (p. 8)

작가가 표현하는,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남직한 상황에 대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것, 그건 때때로 끔찍했지만 끔찍함마저 포함한 그 사실이 나는 소중했다. (p. 11)

사랑하는 사이라서 함께하는 사이라서, 그렇게 서로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이라서 느껴지는 그 감정을 이렇게 써낼 수 도 있구나...

그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엄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p. 15)

그 시절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사실은 내 용기이기도 했다. (p. 16)

 

그 시절의 사람들은 때론 인위적으로 때론 자연적으로 멀어졌다. 혜인도 그 시절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혜인에게만큼은 다르고 싶은 '나'

반가운 마음이 가장 먼저였지만 그애가 걸어온다는, 별것 아닌 사실에, 머릿속 문장에, 나는 살짝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p. 24)

오랜만에 연락해도 농담할 수 있는 사이, 갑자기 만나잔 약속을 잡아도 반가운 사이, 그렇게 만났을때의 기분은 어떻게 인사를 나눌지 어떤 말을 먼저 건넬지 당황스럽다 못해 울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지만, 막상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순간 그 기분은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 이거였지!' 하면서.

그때 -그곳이 지금- 이곳과 너무 비슷하거나 달라졌을 때, 내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나곤 했으나 이제 원기억 마저 희미해진 이곳에는 겹쳐지는 것도 길어낼 것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도 이제 그때,가 떠오르지 않는 나이가 되었구나, 조금 소침해졌다. (p. 33)

이 기분 알 것 같았다.

스무살 신입생때 학교를 누비며 만나던 시간들, 그리고 서른이 훌쩍 넘어 각자의 자리에서 더이상 추억을 회상할 일도 없이 살다가,

그때 그곳에서 다시 만났지만 지금 이곳은 그때 그곳이 아니라는 현실감...

"니는 니가 기다리는 것만 기다릴 줄 알잖아"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내게 그냥 던지는 건지도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혜인의 그 말에 어딘가 꿰뚫린 기분이었다. (p. 35)

 

그간의 묵힌 감정들을 가벼운 대화로 털어버리는 사이 나온 말, 선문답 같은 이 말이 '나'를 꿰뚫은 이유..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말을 하러 부산에 내려왔지만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선문답처럼 던진 혜인의 말은 아마도 사는 동안 가끔 '나'에게 문득문득 생각날 것 같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껄끄러워지고 싶지 않았고, 화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없어지는 쪽을 택했다. 내가 선명해지는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주 근사했다. (p. 39)

'나' 가 전해주는 기분들은 때로는 추억처럼 때로는 후회처럼 때로는 결심처럼 때로는 안도처럼 왠지 공감이 갔다. 묘하게...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여도 아무래도 좋을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p. 45)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은 하지 못한채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하는 '나'의 생각이, 혜인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자리잡지 못했던 그 시절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다.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 진동이, 흔들림이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p. 46)

'시절과 기분'에서 '나'와 해준은 게이커플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전에 만났던 혜인 이라는 인물을 통해 느끼게 되는 '나'의 시절과 기분은 이미 과거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똑같이 심장이 뛴다는 것이고, 지금 뛰고 있는 심장에 솔직하게 사는 것이다.

김봉곤 이라는 작가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인정받고 있는 떠오르는 젊은 작가였다. 데뷔와 동시에 커밍아웃한 게이 소설가 1호로 불리는 작가, 솔직하게 퀴어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발표되면 궁금해질 이름으로 내게 남게 되었다. 이 작품이 포함된 소설집 '시절과 기분' 이 나오면 한권의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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