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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0년 4월
평점 :
'이 시대의 <1984>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2019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이 소설의 작가는 영국의 언론인이자 저술가라고 한다. 소설 뿐만 아니라 회고록, 논픽션, 칼럼등 다양한 매체에 다양한 형식의 글을 발표하는 이력으로 보아 필력이 남다를 것 같기도 하다.(부커상은 맨부커상과 다른듯... 영국 부커사가 제정했던 부커상은 맨그룹이 스폰서로 함께 하면서 맨부커상이 되었다. 부커상이라고 부커사에서 별도로 또 상을 주는 건가...;;;)
벽-상대-바다 의 3부로 구성된 소설을 읽다보면 처음엔 군복무중인 병사의 병영일지를 읽는 것 같고 중간엔 휴전선을 사이에 둔 교전경험기를 읽는 것 같고 마지막엔 망망대해 위에서의 생존기를 읽는 것 같다. 쭈욱 1인칭 독백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보니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정치적 분열 증가로 황폐화된 미래 세계, 섬나라 영국의 모든 해안선을 둘러싸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다. 이 벽을 통해 안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에 존재하는 '상대'의 침입을 원천봉쇄하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 벽 에 항상 경계병 들을 상주시킨다. 주인공 카바나는 2년의 의무적인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경계병으로 벽 에서 지내게 된다.
하루하루 별 변화가 없다. 어제도 오늘도 별다를 게 없다. 이야기할 만한 것도 별로 없다. 항상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 즉 갑자기 엄청난 재앙이 닥칠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가능성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날은 거의 없다. 전형적인 하루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다는 것이다. 하루가 시간의 단위라기보다는 물리적 성분처럼 느껴진다. 형체가 있는 사물 같은 시간. 내 인생과 주위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 벽이 지배적인 존재이고, 내가 짊어진 책임과 하루와 생각이 모두 벽과 관련된 것이며, 나의 미래가 벽에서 벌어지는 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p. 17)
벽에서 시작해서 벽에서 끝마쳐질 생활은 여하튼 군생활이기 때문에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굉장히 공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분단국으로서 휴전중인 상태의 한국 사람이라면 정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위험요소가 일상이 되고 얼마나 무료해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의무복무가 없는 나라 사람들이 읽는 것보다는 공감도가 높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했는지, 어떤 정치적 분쟁으로 '대격변' 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벽을 세우게 된건지, 그 벽이 세계에서 어느 나라들에 세워진건지 자세한 배경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미 그렇게 된 상황에서 소설은 이야기한다. 드론과 로봇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임신이라는 말 대신 '번식'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번식을 원치 않는 사람을 선택자라 부른다. 그리고 '상대'가 벽을 넘어올 때마다 경계병도 한 명씩 바다로 추방된다. 경계병이 휴전선에서 근무중인 우리 군인들보다 더 살벌한 조건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한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우리 세대, 그러니까 대격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연인과 결별할 때 하는 말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라고 하던가? 그때와 이때는 정반대가 된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부모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다 안다. 진단 내리는 건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진단은 논란거리조차 못 된다. 그건 죄책감, 집단 죄책감, 세대 간 죄책감이다. 기성세대는 이 세상을 돌이킬 수 없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런 세상에 우리를 태어나게 했다고 느끼는 거다. 아는가? 그건 사실이다. 그게 바로 기성세대가 한 짓이다. 그걸 그 세대도 알고, 우리 세대도 안다. 모두가 다 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그때는 벽이 없었던 탓에, 대격변 발발 전이라 벽이 필요치 않았던 탓에 기성세대에게는 벽 복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세대의 삶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경험을 기성세대는 짐작조차 못 한다는 말이다. (p. 63)
세대차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 왔다.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상형문자로 세대차이에 대한 불만이 적혀 있다지 않은가.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세대차이는 좀 반대적이다. 앞세대가 '나때는 말이야~'하면서 자신들보다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이는 뒷세대를 훈계하려드는 것이 아니라 앞세대가 저질러 놓은 것을 뒷세대가 책임지느라 벌어진 간극이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은 대부분 선택자들이다. 즉, 번식을 원하지 않는다.
종종 사람들 말로는, 부자들이 ID칩을 조작해서 당사자 대신 도우미를 벽으로 보낸다고 한다. 건강이나 학업을 핑계로 벽 복무를 면제받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벽에 안 갔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아마두 없었지만, 돈있고 빽있는 사람은 벽에 안 간다는 의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p. 126)
굉장히 익숙한 상황 아닌가? ㅎㅎ 개인별 ID칩을 몸에 심고 법으로 금지되기전 넘어온 '상대'들을 도우미로 노예처럼 부리는 이 미래 사회에서도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의 선택이란...
"벽은 이제 지긋지긋해"
"나도"
"만약 우리가 벽에 있는데 공격이 계속되고, 이번 같은 공격을 받는다면 우린 결국 죽을 거야"
"너, 나하고 같이 번식자 할래?" (p. 154)
춥고 지루하기만 했던 경계병으로서의 임무에 지칠즈음 혹독한 근무에 비하면 휴식처럼 느껴지는 훈련을 함께 하면서 부대원들과 끈끈한 전우애를 쌓게된 카바나는 같은 조원인 히파에게 언제부턴가 눈길이 자꾸 가곤 했다.(경계병들의 부대는 성비를 5:5로 맞춰 편성한다. 카바나는 남성, 히파는 여성이다.) 그러다 갑작스런 '상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우 몇명을 잃고서야 겨우 막아낸 후에 히파는 카바나에게 번식자가 되자고 제안한다.
내 생각을 말한다면 나는 특별히 궁금하지 않았다. 벽에서 논리를 찾으면 과정이 공정할 거라고 기대하게 되고, 공정할 거라고 기대하면 미쳐 버릴 거다. 어쨌든 이게 내 생각이다. (p. 159)
군대 생활이란 정말 극한의 경험인 것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달려오는 사람이 간단히 주어진다는 건, 사실상 개인 자신이 된다는 건.... 물론 엄밀히 따지면 국가의 자산이고, 온갖 종류의 감시 장치와 안전 보장 장치가 있으며, 무지몽매한 과거의 제도와 완전히 다르다 하고, 불쌍한 자들한테 복지 혜택과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제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냐. 난 믿지 못하겠다. 이건 퇴화, 우리 인간성의 상실이야. 도덕규범의 추락이라고 할 수 있지. (p. 168)
기술이 발전하고 드론과 로봇이 있지만 사람만한 기술력을 가진 기계는 아직 없는 시대, 적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도우미' 로 그들을 부려먹는 것 뿐이다. 나쁜 과거로 회귀되는 미래... 이 소설은 여러모로 디스토피아적이다.
우리는 잠시 선 채로 섬을 바라보았다. 나는 예전에 이 섬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해변이 있었고, 완만한 둔덕이 있었고, 아마 물가엔 집도 몇 채 있었겠지. 발밑에 있는 저 해저는 맨땅이었을 거다. 이제는 모두 물속에 잠겼다. 물에 잠긴 세상이 되어 버렸다. (p. 233)
경계병으로 벽 에서 처음 생활할때는 벽 이 끝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차라이 벽 에 있을때는 살만했던 것이었다. 카바나와 히파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가도 가도 새로운 끝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끝은 점점 더 벽 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벽.
나는 이런 게 바로 이야기라고, 모든 게 다 잘되는 것이야말로 이야기라고 말했따. 그러나 이건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았따. 이건 또 다른 이야기, 누군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머릿속이 텅 비어서 지금 히파는 내가 해 주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뿐이라고, 모든 게 다 잘된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는 이게 바로 이야기라고,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혼자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문득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이야기의 운을 떼었다. "벽 위는 춥지" (p. 309)
망가진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느꼈을 때, 그 앞에 닥친 현실은 더 망가진 세상이 보이고 더 잃을 것이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알면서도 뒤돌아가는 길은 없었고 그저 앞으로만 계속 앞으로만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꾸 더더더 잃어버리다가 그럼에도 남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