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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투표할 수 없다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할 수 없다
하루에 100단어 이상 말할 수 없다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 우리는 '순수'라는 이름 아래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표지 中
언어학과 음성학 교수이면서 짧은 단편소설들을 꾸준히 발표해 온 저자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차라리 SF소설이었으면 좋았을껄 싶을 정도의 현실감을 지닌, SF가 아니라 현실에서 있을법한 가상이라 더 공포감을 주는 소설이었다.
정치에 관심없고 선거에 감흥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새 세상은 여성의 손목에 카운터를 채우고 하루에 100단어 이상 말하면 전기충격을 가하는 세상이 되어 있다면? 여성의 모든 권리를 빼앗은 것을 전통을 되살렸다 말하고 여성의 모든 것을 억압하는 것을 순수하다 라고 말하는 세상이 되어 있다면?
하루 100단어를 체크하는 전기충격기를 손목에 차고 있지 않을지라도 지금 현실 곳곳에서 소설속 '순수운동'의 작은 형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소설에 대한 몰입감은 남달랐다.
진은 인지언어학 박사였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1년전까진 그랬다. 손목에 카운터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사춘기의 큰아들과 장난꾸러기 쌍둥이 아들 그리고 막내 여섯살 소니아 4남매의 엄마이자 패트릭의 아내로 살고 있는 지금 진 에게 과거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살림에 소질이 없건 토론을 좋아하건 책을 좋아하건 연구를 좋아하건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다. 문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재산과 여권도 가질 수 없고 최대한 입다물고 지내야 하는 지금은. 진 이라는 존재는 없어졌다.
순수운동은 흔히 바이블 벨트라고 알려진, 종교의 지배를 받던 남부 지역 어딘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벨트는 코르셋으로 변형되어, 나라의 '팔다리'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곳을 뒤엎었다. 민주주의의 유토피아였던 캘리포니아, 뉴잉글랜드, 태평양 북서부, 워싱턴 DC, 텍사스의 남부 관할 구역과 플로리다까지, 바다와 가까운 지역까지는 순수운동의 스펙트럼이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코르셋은 곧 전신 수영복으로 변했고, 결국 하와이까지 닿았다.
우리는 그것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p. 35)
단 한번의 대통령 선거로 미국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새 대통령이 당선 후 시행한 제도들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탄탄하게 서서히 착착 진행되고 있던 것들이 새 대통령과 함께 가시화된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진과 같은, 사회외 정치에 무감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처절한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제일 열 받은 게 누구인 것 같아? 이 나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다시 맞춰봐"
"게이?"
"아니, 이 멍청아. 바로 정통 백인 남자들이야. 아주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지. 자기들이 무기력한 기분이 들거든" (p. 40)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정치적 부족주의> 라는 책이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이 처한 혼란을 명확하게 분석한 이 책에서 트럼프 당선의 뒷배는 바로 백인노동자층이었다. <정치적 부족주의>에서는 그동안 이민자와 유색인종과 성소수자들을 포용해오던 미국에서 정작 소외된 층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백인노동자들이었음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었다. 미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을 직시하는 미국인의 책을 읽고, 어쩌면 지금 미국의 상황을 극대화한 가상 현실을 배경으로 한 미국인의 소설을 읽으니, 지금 미국에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잘못된 현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충격이나 고통 따위가 걱정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술과 말로 감각을 마비시키기라도 한 듯 분노를 터뜨리며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전기가 온몸에 흐를까? 그게 나를 뻗게 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낙태를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필요악이니까. 이용당하면서도 잠자코 있어야 하는 물건이 되었으니까. (p. 53)
진 은 하루하루가 버겁다. 하루가 다르게 순수운동에 물들어가는 큰아들을 보는 것도 그 어떤 일에도 묵묵히 감내할 뿐 나서지 않는 남편을 보는 것도 순수운동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이웃집 여자를 보는 것도...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건 막내딸 소니아 가 말을 하지 않는 것, 100단어는 커녕 하루 한 단어도 말하지 않았다고 학교에서 상을 탔다고 자랑하는 그 자랑도 말로 할 수 없어 처음엔 아이가 왜 신이 난건지 알수 없던 그런 순간들이다. 그렇게 책이 사라진 학교에서 가사실습만 배우다 이 아이가 커서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었을때의 미래...
"일종의 전통이에요, 엄마. 옛날처럼요"
"옛날? 대체 어느 옛날? 고대 그리스? 수메르? 바빌로니아?"
"음, 글쎄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관한 개념이 있긴 했지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수렵 채집 시대를 생각해봐요.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르니까요"
"우리?"
"남자와 여자잖아요, 엄마" (p. 87)
남자아이들의 학교엔 책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책에서 가르치는 것이란,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고 역할이 다르므로 차별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내용은 종교와 결합되어 교육이라는 이름아래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졌을때 큰아들 스티븐은 우유를 사오라는 엄마의 말에 '그건 엄마 일' 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진 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들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통령의 형이 스키사로로 뇌를 다쳐 말을 못하게 되자 고위관료가 진 을 찾아온다. 진 이 그 분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매클렐런 박사님. 첫 번째 기능은 예의 범절 추적기에요"
"뭐라고요?"
"우리는 카운터가 부드럽게 주의를 환기하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그냥 건전하게 지낸다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작동할 겁니다. 난잡한 언어도 없고 신성모독도 없다면요. 실수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위반할 때마다 할당량이 10개씩 줄어들 거에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두번째 기능은 박사님의 협조가 좀 더 필요해요. 하루에 한 번, 박사님이 원하는 시간에 이 버튼을 눌러 팔찌에 대고 말하면 됩니다. 여기 마이크가 있어요. 새로운 기능이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하고 기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p. 136)
진 은 거절 했다. 딸아이의 카운터를 제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모델의 카운터를 들고 다시 진 을 방문 한다. 그 카운터의 기능은 더 악랄했다. 진은 딸아이가 그들이 말하는 그 예의범절(여자란 어때야 한다는..)을 하루에도 수시로 외워야 하는 새 카운터를 자신과 딸아이 손목에 채울 수는 없었다. 끔찍했다. 진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다.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진은 이 연구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들을 비난하고 싶은 적도 너무 많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괴물은 절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잘못 인도된 프랑켄슈타인처럼, 그들은 하나하나씩 천천히, 항상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미치광이의 인위적인 창조물로 만들어진다. (p. 342)
"당신 잘못이 아니야"
로렌조가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었던 그때부터였다. (p. 348)
목소리를 내지 않는 다는 것이 어떤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지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진은 처참하게 깨달았다. 점점 더 변해가는 아들을 보면서 그렇게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그냥 이대로 있을 수 만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을때 자신보다 먼저 '저항' 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판 바벨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TV 출연을 즐기고 맹목적인 추종자들과 함께 권력의 맛을 봤으면서도 여전히 더 많은 걸 원하는, 사람들의 눈에 아주 잘 보이는 그 남자의 손에 의해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곧 자기 손에서 지옥이 시작될 거라는 걸 전혀 모르는 남자. (P. 405)
소설속에 등장하는 새 대통령의 이미지는 정말 트럼프의 이미지와 굉장히 흡사하다.(선동적인 언어부터 모델와이프까지) 남자는 일을 하고 여자는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며, 남자는 말을 하고 여자는 묵묵히 들어야 하며, 남자는 한발 앞에 나서고 여자는 두발 뒤에 병풍처럼 웃고 있어야 하며, 남자는 재산과 자유를 갖고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신의 뜻이며 자연의 섭리라는 순수운동은 능력있고 가부장적인 남자와 모든 것에 순종적인 아내가 있는 가정을 원하는 백인노동차층의 요구와 굉장히 흡사하다.
이 소설은 내게 미국의 현실비판서로 읽히는 동시에 영화 인디펜더스 데이 처럼 그려졌다.
실어증을 앓고 있는 사회처럼 되버린 미국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실어증을 치료하는 연구 에서 시작된 (실어증을 유발하는 생화학 무기가 만들어낼) 미국이 세계의 목소리를 덮는 미래를 막는 영웅이 등장하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를 판단할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이 책을 재밌게 즐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여러분을 조금은 화나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분노가 여러분에게 여운을 남겼으면 좋겠다. (p. 511)
저자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적어도 내게는 ㅎㅎ
나는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게 이 책을 읽었고 읽고 나서 화가 났으며 그 분노가 남긴 여운에 아직도 책의 내용을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현실을 보는 중이다. 침묵은 부당함을 용인하는 것으로 탈바꿈하곤 한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한다. 누구의 목소리도 함부로 묻혀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