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 사회의 여성과 인권, 비주류, 공동체, 계급에 관한 거침없는 제안

세상이 챙겨 주지 않는 나의 권리를 직시하자

 

 

표지만 빼놓고 전부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이었다.

진중하지만 시원스런 내용에 상응하는 멋진 표지 뭐 없었으려나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 ㅎㅎ

김지윤 저자를 방송에서 몇 번 본 적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자주 등장했었고 그외에도 강연이나 인터뷰등 다른 코너를 통해서도 봤었는데, 볼때마다 어쩜 그렇게 똑부러지게 말씀을 잘 하시는지, 냉철한 판단과 정리된 언어가 볼때마다 멋지다 생각했었다. 그러니 저자가 낸 책에 대한 기대가 없을 수 없었고, 저자를 똑닮은 이 책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사실 기대를 안했다면 모를까 기대하고 읽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책들이 은근 많다;;;)

책은 두껍지 않아서 부담없이 읽히면서도 간결하게나마 그동안 굳이 들여다보려하지 않았던 어려운 곳들을 하나하나 드러내준다. 직설적인것 같으면서도 과하지 않게 적절한 부드러움은 예민한 문제를 읽을때도 편안하게 여길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저자는 말도 잘하는데 글까지 잘쓰네~!!

당신의 방 안에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큰 덩치 때문에 코끼리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모를 수 없는 당신은, 코끼리를 방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것이다. 먹이를 줘서 유인해 보기도 하고, 힘껏 밀어 보는 발칙한 행동도 할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가 마음이 동해 알아서 움직이지 않는 한, 사실상 그 거대한 초식 동물을 방 안에서 내쫓을 방법은 없다. 결국 내쫓는 것을 포기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코끼리가 방 안에서 움직이다 건드려서 부순 물건을 정리하거나 그 큰 덩치가 남긴 배변을 재깍재깍 치우는 일 정도이다. 그렇게 좀 귀찮아진 주변 정리를 하면서, 마치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은 듯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p. 4)

'애써 피하고 싶은,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을 뜻하는 '내 방 안의 코끼리' 라는 표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고한다. 어렸을 땐 커다란 코끼리를 방에서 내보내는 것을 꿈꾸고 살았으나 나이를 먹고 하루하루가 피곤해지면서 코끼리로부터 눈을 돌리면 편하다는 것을 알게됐다는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를 직시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사회라는 '방'안에 존재하는 '코끼리' 같은 안볼래야안볼수없는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모든 이들이 '주류'라는 안전망을 좇지만, 사실 우리는 대체로 '비주류'이다. 나는 남이 믿거나 말거나 '비주류'라고 말한다. 잘난것보다 못난것이 많은 인간이었기에, 비주류 속에서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비주류'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비주류들과의 교류와 공감을 통해, 코끼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길 원한다. (p. 10)

저자도 책 속에서 인정하듯이 객관적인 조건들로 봤을 때 저자를 비주류라고 보긴 어렵다. 부유하게 자랐고 해외유학과 다양한 곳에서의 이력은 어려움 없이 많이 배운 지식인 으로 손이 닿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속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지만, 그녀의 국제정세 및 한국사회에 대한 식견을 읽다보면 적어도 주관적인 그녀의 견해는 비주류의 정서와 닿아있다. (그 정서가 공감으로 연결되길 나또한 바란다.)

<1장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 에서 저자는 여성의 참정권 역사를 살펴보면서 여성의 권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되짚는다. 한국의 경우는 광복과 동시에 새로운 체제 속에 당시 선진국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타한 여성 참정권 운동 없이 바로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었지만, 서양의 경우 여성의 참정권 획득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의 페미니즘이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한계도 직시하면서 과거에 저질렀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염려하고 있었다.

원래 차별은 취약 계층에게 더 잔혹하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많은 진보 단체와 학자들이 유리 천장을 외치며 이를 깨뜨리는 이들에게 환호하는데,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훨씬 더 심각한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주목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불만이다. 이 사회는 성공에 핀 조명을 맞추고 이를 몇 백배 빛나는 스토리로 만든다. 왜 그러냐고? 알파걸의 성공은 화려한 승전으로 남지만, 취약 계층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여봐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눈부신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p. 50)

나는 이미 기득권 구조에 속해 있는 여성이다. 그리고 나의 '기득권'의 정체성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한다. 그래서 여성 단체나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들이, 대기업 여성 CEO비율이니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과 같은 기득권에서의 평등보다 취약 계층에서의 평등을 더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솔직히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목소리는 아닌가 하는 못된 의구심도 든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창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p. 52)

중요한 것은 좀 더 많은 여성이 기득권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몇몇 알파걸들의 유리 천장 깨기가 아니라 수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를 위해서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여성계와 정부, 정치 엘리트들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저 한 표를 얻기 위해 뻔하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p. 70)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으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 국회의원의 수와 여성 CEO의 수가 증가했다고해서 여성 인권이 향상됐다고 말하기도 찜찜하다. 소수의 성공사례로 위안삼고 살기엔 일반적인 여성의 처우조건은 그닥 나아진 것이 없다. 상징적인 성공사례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저자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장 나는 약자인가, 강자인가?> 에서는 장애인, 성소수자 관련하여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약자와 강자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음을 그리고 소수자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당연한 명제가 당연하게 통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며 새삼 깨닫게 한다.

 

사회적 소수자가 '소수자'로 남거나 불리는 것은 그들을 제외한 이른바 '다수'집단이 그들의 탈소수자화 내지는 주류로 편입되어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별로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p. 94)

국가나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를 나서서 먼저 보호해 주지 않는다.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다양성이란 골치 아프기만 한 것이다. 우생학이 저명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효율적으로 사회를 컨트롤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우수한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알차고 똘똘하게 문제 없이 살아가 주는 것만큼 국가에게 좋은 것이 없다. 평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챙겨 가며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p. 99)

내가 좋고 싫음의 선호도가 다른 이의 삶을 이등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인권 침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p. 118)

대체로 인간은 '우리'라는 집단에 속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소속감'은 '안정감'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우리' 집단에 속해 있을 대에는 '그들'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p. 124)

 

'우리' 라는 말은 우리가 아닌 '당신들'이라는 상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구분은 누군가를 제외시키고 소외시킨다. '우리'안에 들어가 있을때는 편안하지만 밖으로 한발자국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우리'였던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장애인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순간이 온다면? 나의 가장 절친이 알고보니 동성애자였다면? 우리는 손쉽게 우리 였던 사람들을 내칠 것인가?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나름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3부 공동체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에서는 공동체의 신뢰도에 대해 이웃, 국가, 국제 사회로 범위를 넓혀 가면서 어떻게 신뢰도가 무너지고 분쟁이 발생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공동체의 배타성을 상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게 한다.

같은 지역에 사는 데도 왜 어떤 사람은 이웃과 지역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걸까? 이웃에 대한 신뢰 수준에 강한 긍정적 영향력을 가진 변수는 무엇일까? 소득수준? 교육수준? 연령? 정답은 지역 주민이 자가 自家 에서 사는지 여부였다. (p. 136)

'집'은 사유 재산에 따른 권리 및 의무를 챙기면서 자연스럽게 주거의 목적을 넘어서 정체성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비슷한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만고만한 동네에서는 서로 정체성을 나누는 '이웃'이라는 막역한 정서가 생성된다. 그런데 이웃끼리 공유하는 '사회적 자본'은 배타적 성격을 가지기 쉽다 단순히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착을 넘어, '우리동네에 사는 이웃'에 대한 검열까지 시작한다. (p. 141)

 

다른 다양한 예들 보다도 '자가 소유' 에 대한 구분으로 공동체적 신뢰도가 좌우된다는 분석은 왠지 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수긍하게 됐다. 아파트 단지 혹은 아이의 학교 등 묶이는 동시에 배타적이 되는 경험을 안가져본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부족 간의 분쟁은 400여년간 아프리카 대륙에서 진행된 노예 무역에 기인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백인 노예 상인들이 붙잡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선에 태워 가는 장면만 상상해 왔다. 그런데 그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누가 노예 상인에게 넘긴 것일까? 당연하지만 노예 상인에게 건장한 아프리카인을 제공한 것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p. 147)

 

아프리카에서 지속되고 있는 내전을 보면서 서구열강에 의해 잘못된 국경선 때문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벌과 납치로 동족을 팔아넘기고 누린 댓가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더 많은 무기였고 서로에게 그 무기를 겨누는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400년간이나 됐다는 것이... 자신의 가족 외에는(때로는 가족조차도 믿을 수 없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간을 400여년간 지속한 곳에서 부족 민족 국가 그렇게 공동체로 엮이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선택인가...

연합군의 승리는, 미국은 명백히 강한 연방으로 묶여 있는 국가이고, 주는 연방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을 만천하게 명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 탓에 진정한 미국의 건국은 남북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주 정부에 대한 충성도보다 미합중국에 대한 애국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진정한 연방 국가로 탄생하게 된 남북전쟁 이후였다. (p. 153)

미국의 남북전쟁 하면 흑인노예해방이 전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전에는 복수형으로 쓰였던 미합중국이란 단어가 이 전쟁 이후에야 단수형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북전쟁 이후에야 연합체가 아닌 하나의 미국이 된 것이었다.

사실 '민족주의'와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계에서 '민족'은 '민족주의'가 탄생시킨 개념이고, '민족주의'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편이다. 절대 왕조의 시대가 끝나고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주던 종교의 힘마저 쇠퇴한 근대 시민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이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p. 160)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무너지면서 신분 사회가 해체되고, 이 과정에서 등장한 외부의 억압적 정치 세력인 일본이라는 존재가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키고 공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출발한 민족주의 정신은 한국 전쟁과 분단 이후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독재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훌륭하게 활용되었다. (p. 164)

함께 하나의 국가를 구성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이 결연한 민족적 의지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뒷목을 잡고 있는 일제 강점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지킬 수 없었던 하나의 국가, 지킬 수 없었떤 하나의 민족,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한 치욕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서 '통일'이 꼭 필요해진다. (p. 170)

강한 민족주의가 만든 가장 큰 부작용은 배타성이다. 강한 '우리'의 관계는 악의적인 '그들'이 있어야 정당성을 가지고 더욱 공고해진다. 특히, '그들'이 '우리'에 비해 열등하거나 비열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우리'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계망에서 선한 당위성을 가진 집단으로 승화된다. 선한 당위성이 강해지면 내가 속한 '우리'는 정의로워진다. '우리'집단의 존재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마련이고, 집단 공동체의 자긍심은 절대적인 것으로 완성이 된다. (p. 179)

 

민족주의 에 대한 부분은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반만년을 이어온 한민족 이라는 개념에 상당히 익숙한 우리의 민족성이 실은 태동한지 얼마 안된 것인데 한반도에서 있었던 수많은 전쟁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도, 왕도 종교도 사상도 힘없어진 시대에 왜 민족주의는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것인지도, 통일의 당위성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위치인가 하는 의문도 모두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생각하더라도 '배타성' 에 가로막힌다. 이 배타성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균형을 맞춰나갈 것인가...

<4장 계급이 쏘아올린 빈곤 곡선> 빈부격차의 배경과 현상 그리고 비만과의 관계성과 계급 사다리 현황을 살펴본다.

소득 불평등이 심할수록 계급 간 이동이 어려워지는 패턴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불평등하고 계급 이동도 안 되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p. 213)

지금의 시골 생활은 소싯적 물장구 치고 개구리 잡으며 노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청소년에 비해 농어촌 거주 청소년의 비만율이 오히려 높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변화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비만의 사회 구조화이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수록 아동 청소년 비만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p. 222)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기회균등과 성공신화로 장식됐던 나라였다. 그러나 (과거에도 과연 그 장식이 맞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가장 불평등하고 계급간 이동도 어려운 나라인 것이 여러가지 통계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국은 겉모습과 너무나 다르다.

한국의 도시와 농어촌 소득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 격차는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환경도 바꾸고 있다. 비만율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 국방부는 군인 후보군이 고갈되지 않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비만이 국가 안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제대로 된 식습관과 의무 교육을 마치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비만 여부가 갈리는 것처럼 미국도 사회 구조적 이유로 비만 여부가 결정된다. (p. 224)

인종 장벽이 낮고 안정적인 삶을 제공하는 덕에, 군대는 많은 저소득층의 유색 인종 젊은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가 어이없게도 비만에 발목이 잡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비만은 또다시 경제 소득에서 기인한다. 또 다른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p. 226)

 

미국은 성인 비만율이 40%, 과체중까지 포함하면 70%가 넘는다고 한다. 비만인구의 증가는 보건국이 아닌 국방부에 가장 위험신호였다. 징병제인 한국과 달리 모병제인 미국은 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지원해야 한다. 따라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엄청 많다고 한다. 문제는 비만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군인의 체격요건을 갖춘 성인비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속도라면 군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모자르게 될지도... 미국의 군인지원자 감소 이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빈부격차가 커지고 저소득층의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이 총알받이 군인을 뽑지 못하게 되어서야 문제점으로 인식하게 된건가 하는 안타까움...

이른바 '강남좌파'가 그것이다. 노동자와 약자의 권리에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한국의 강남좌파는 '정의'나 '공정' 같은 가치에 방점을 두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고, 환경 문제, 동성 결혼 합법화와 여성 인권, 이주민 문제와 같은 소수자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거대 담론을 펼친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 집단이 생겼다. 바로 전통적으로 진보 좌파가 대변해 왔던 노동자, 농민,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이다. 좌파고 우파고 모두 천상계에서 노닐고 있고,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환경 이야기, 동성 결혼 합법화, 이주민 인권 이야기나 하고 있다. 우파야 원래 있는 사람들 편이었다손 치더라도, 내 편에 서 있다고 하니 그동안 표를 줘 왔던 좌파 정당 마저 그러는 것은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갈 길 잃은 표심을 잡은 사람의 대표주자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p. 245)

변해가는 세계로 인해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을 대변해 줄 사람이 없으니, 불평등은 해결될 수 없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무기력해지고 분노만이 쌓인 대중들을 트럼프를 비롯한 포퓰리스트들은 그렇게 휘어잡은 것이다. (p. 246)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왜 소외된 약자층에서 부자들 입장을 대변하는 편에 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얕은 선동인것을 알면서도 포퓰리스트들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속내를 생각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감대와 간극이다. 간극이 계속 벌어지면서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토대를 잃어간다. 산업 재해로 젊은 청년이 화학 발전 공장에서 쓰러져 갈 때, 공장에서 일해 본 적 없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정심 외에 다른 감정을 느꼈을까? 안타깝다는 인간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 동정심은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기억 밖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극을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p. 250)

늘 그렇듯 작은 희망은 남아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손놓고 있을 게 아니라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하고 우리와 당신들의 구분이 아닌 간극을 좁힌 공동체를 위해 멀기만 한 이상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부터 관심을 가벼보는 것이 어떨까.

ps. 책속에 나온 한 논문의 제목에 눈길이 꽂혔다. <21세기 자본론> 을 펴낸 토마 피케티 교수가 2018년에 낸 논문 이라는데,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 불평등의 증가와 변화하는 정치 갈등의 구조' 가 그 제목이다. 브라만 좌파 와 상인 우파라... 어울릴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는데 너무나 잘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서 이 논문의 내용이 궁금하지만 영어무식자라서 안타깝지만 패~스하는 걸로;;;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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