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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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팽팽한 긴장감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의 새로운 세계

 

 

정혁용 ... 처음 듣는 작가 이름이다.

하드보일드 소설... 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러면에서 처음 경험하는 소설의 세계였다.

한마디로... 매력 있었다.!

손에 잡자마자 빨려들어가 중간에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내렸다.

마주하고 대화하는 상대가 소설속 인물의 말투를 가졌다면 빈정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소설로 읽으니 그 말을 어떤 생각으로 하는지 알 수 있어서 그 삐딱하고 비꼬는 말투가 멋지고 찰지게 다가왔다. 고급진 취미를 숨긴 삐딱한 태도와 따스한 인정을 숨긴 빈정거리는 말투를 가진 슬픈 택배기사 라니... 게다가 비밀스런 과거까지. 매력쩌는 택배기사 K.

"사실 이 바닥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죠"

남자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악의는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일 뿐, 그래도 약간 기분은 상했다.

"바작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죠" (p. 16)

 

마흔 다섯의 남자가 텅빈 시간과 얄팍한 지갑이 전부인 채 고속버스터미널에 서있다. 구인광고에서 숙소제공 택배원 모집을 읽고 전화를 건다.

"말해줘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말해주려 해도 말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개에게는 불성이 있죠"

"무슨 뜻이죠?"

"말해줘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말해주려 해도 말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자존심이라 이건가요?"

"그런 건 평생 가져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상대가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고" (p. 32)

 

이 남자의 대화법은 그 누구와도 다르다. 정말 독특하다. 그런데 나는 이 삐딱한 유머코드가 정말 마음에 든다. ㅍㅎㅎ

이놈의 나라는 저마다 행복에 겨운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에 겨워하며 자랐는지, 아니면 형 동생의 관계가 나빠서 밖에서라도 구해 볼 요량인지, 아무튼 형 동생을 못 해 안달 난 사회 같아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걸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못해서 얼떨결에 응,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p. 41)

"로드 독스? 엘모어 레너드? 무슨 내용이에요?"

"하드보일드 소설이야. 펄프 픽션이고. 감옥, 죄수, 돈에 관한 이야기지. 여자와 탐욕은 덤이고"

나의 말에 주창이는 내가 영어를 들을 때 짓는 표정을 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 (p. 42)

 

매사에 이런 식의 사고방식(삐딱하게 굴지만 결국 허락하고 마는)을 가진 중년의 남자. 택배사무실에 딸린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한지 한달이 되가도록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일이 없을땐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남자. 가는놈 잡지 않지만 오는놈 막지도 않는 남자.

대개 이름보다는 별명이나 자기가 맡은 동 이름으로 호칭을 하는데 정말 친해지지 않는 이상 이름은 부르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게 이 동네의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행운동 형님이나 행운동으로 불렸다. (p. 65)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안다. 지금은 행운동 이라 불리는 모양인데 봉천동이라 불리던 동네였다. 동네마다 택배기사가 만나는 경험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읽다보니 행운동이 그닥 행운을 가진 동네가 아닌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봉천동이 신림동 보다는 나을껄 하는.

이름이 있으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경우는 은근히 많다. 시집을 가면 부산댁 전주댁 이라고 불리는것이 너무 오래된 예라면, 형동생 하기 시작하면 광명형님 서울동생 하는 식 혹은 회사에서 대리님 과장님 처럼 직급으로 부른다거나 아이를 낳으면 아이이름을 붙여 누구엄마 하는 등등... 이름은 대체 언제 써먹나?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꽃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 참 많은 세상인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코알라의 수면 부족을 걱정하고 있는 나라도 욱, 하고 화가 치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p. 70)

"아니 무슨 택배가 태도가 이래? 너 이름이 뭐야? 당장 콜센터로 전화해서 클레임 걸어야겠어. 너 같은 인간은 다른 고객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택배하게 놔두면 안 돼. 이름이 뭐야? (p. 71)

"저기요? 그냥 입구에 두시면 어떻게 해요? 저기 안쪽 창고에 둬야 할 것 아니에요" (p. 73)

"아니, 여덟 시 이후에 배송하는 택배가 어딨어요? 오전에는 갔다줘야지. 제가 택배 때문에 하루종일 기다려야 해요? 오늘 약속 다 취소했잖아요. 거기다 박스도 다 젖었잖아요. 안에는 괜찮은 거에요? 아 몰라, 됐고요, 저기 베란다에 갖다놔요? (p. 77)

 

처음엔 읽으면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책이 생각났었다. 홍세화님이 빠리 망명시절 생업으로 택시운전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일상들에 대한 감상을 쓰셨던 에세이 는, 이 소설이 택배기사로서 K가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한다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극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무심하게 살고 싶던 K는 정말 원치 않았는데, 새로운 관계들에 자꾸 엮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등장하는 엿같은 인간들에게 되받아치는 반격이 색다르게 매력적이다.

"이 아저씨가 정말, 고객이 베란다까지 갖다 놓으라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이 왕인 거 몰라요?"

"자본주의라고요? 고객님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 논리로 해보죠. 이 택배 배송비가 천백원이에요. 아침에 분류 작업하는 노동비, 배송 노동비, 차량 유지비, 유류대, 보험료, 전화비, 클레임과 분실 비용, 제 이윤 등을 빼고 나면 여유분은 아예 없거나 많으면 일 원이나 이 원 남을지 몰라요. 택배 하나당 말이죠. 그럼 설명 좀 해주세요. 도대체 일 원이나 이 원의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케인즈 관점의 거시경제학으로? 아님,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설마 마르크스의 잉여노동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혹은 애덤 스미스의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어떤 논리로 저를 설득시키실 건가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베란다에 옮겨주길 원하신다면 여기 제가 십 원을 드릴 테니 본인이 직접 하시죠. 거스름돈은 안 받을 테니 말입니다" (p. 79)

 

푸하하하하 정말 배꼽 잡고 웃을 뻔 했다. 이런 식의 통쾌함이 얼마만인가 ㅋㅋㅋ 십원짜리 동전을 손에 든 싸가지없는 고객의 얼굴이 눈에 그려진다. 갑이 을에게 갑질 하는 것도 문제지만, 병이 정에게 갑질 하는건 정말 더 웃기는 일이다.

"얼음도 없이 마셔요?"

"귀찮아서요"

"알코올 중독자 같네요"

"맞아요, 기분 좋은 알코올 중독자죠.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까지는 아니고"

"무슨 차이가 있죠?"

"종이 한 장 정도? 잠시 삶을 잊으려고 마시느냐 잃어버리려고 마시느냐 차이겠죠. 보통 잊으려나 잃어버리게 되지만" (p. 124)

 

택배기사로서의 애환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로맨스 비스무리 한것도 등장한다. 음... 로맨스라기 보다는 상처의 연대감이라고 해야하려나... 그런... 한 여자를 만난다.

사람이 쓸쓸한 얼굴로 얘기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무리 아프고 서러운 얘기라도 세상사에서는 흔한 얘기일 테지만, 그 사람에게는 유일한 얘기일 거니까. 그게 예의다. 그런 장점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단점만 185,403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가끔이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들었다. (p. 165)

이 남자는 모든 것에 무심하고 모든 것에 일단 삐딱하고 보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그에게 속내를 자꾸 털어놓는다. 그러면 또 이 남자는 거절도 못하고 듣는다. 괜히 들었어 후회하면서.

하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되도록 사람과 연은 맺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이 맺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편해지는 성격이다. 이상한 데 결벽증이 있고 역시 다른 성격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p. 184)

숙소로 돌아와 이언 플레밍의 단편 <Quantum of solace>를 다시 읽었다. 한 줌의 위로, 먼지만 한 한 줌의 위로만을 원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어둠이 내린 숲에서 간혹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의 소리였다. (p. 193)

 

그렇게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은근 세심하게 마음 쓰는 이남자, 어떤 관계든 가느다란 실 같은 인연일지라도 절대 먼저 끊고 도망가지 않는 이 남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꽤 여러명에게 한 줌보다 큰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누구에게서도 먼지만 한 위로조차 받지 못한채...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p. 205)

어쩌면 본인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내뱉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 대한 위로도 조금은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때 전화가 울렸다. 먼 육지에 있는 친구의 전화.

"아직도 사막에서 집을 짓고 있나?"

"그러려고 했죠"

"이봐, K, 우리는 지옥에 빠진 인간들이야. 지옥에는 입구만 있지 출구는 없어" "이제 돌아올 건가?"

또다시 침묵, 하늘을 올려다 봤다.

제길, 더럽게 맑은 하늘이었다. (p. 338)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건에 휘말려 폭력배들에게 얻어터지는 순간에도 그 누구보다 맷집이 좋았던 남자, 형사가 찾아왔을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답변으로 맞대응할 수 있는 남자, 대기업 회장 면전에서 일관되게 삐딱한 대화법을 고수할 수 있는 남자, 건장한 보디가드에게 멱살잡혔을 때도 보디가드의 넥타이를 감쪽같이 자를 수 있는 남자. 이 택배기사 정체가 뭘까? '설계자들' 이라는 소설속 킬러가 떠오르는 분귀기의 마무리는 아무래도 이 작품의 속편이 나와줘야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속편이 나온다면 바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일상은 사막이다. (p. 11)

이 작품의 첫 문장이다.

이 작품은 사막에 집을 지으려던 K 가 만난 침입자들 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K 가 돌아간 지옥의 이야기일까?

아마도 그 이야기가 진짜 하드보일드 소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죄와 탐욕과 응징이 넘쳐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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