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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ㅣ 창비세계문학 68
제임스 조이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9년 5월
평점 :
20세기 현대소설의 문을 연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그려낸
음울하고도 매력적인 더블린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1882~1941) 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소설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 현대의 모든 예술 분야에 큰영향을 끼친 모더니즘 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독자들에게도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진 못했지만, 영문학 연구 분야에서는 필수코스라 할 만큼 활발히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더블린 사람들] 책에는 열다섯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1904년에서 1907년 사이에 개별적으로 집필, 출간된 것을 모은 것으로 원래의 집필순서와 별개로 화자 혹은 주인공의 나이순으로 작품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단편들임에도 화자가 바뀌는 장편으로 읽혀질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더블린 사람들] 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아일랜드에 대해 조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당시의 아일랜드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대한 역사적 상식이 살짝 도움이 된다.
작가가 태어난 아일랜드는 영국이 아니다. 사실 나는 영국과 아일랜드을 구분하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영국과 아일랜드와의 관계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영국이 연합국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 같다. 영국하면 떠오르는 그 섬이 그냥 영국인줄 알았다. 하지만 영국은 브리튼 본토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지역으로 크게 나뉘는 연합형태의 국가다. 영국 옆 커다란 섬이 아일랜드인데 그 중 북쪽 부분만 영국이고 아래쪽 아일랜드는 엄연한 독립국이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연합국이었으나 사실상 식민지취급을 받았고 끊임없는 갈등 끝에 1922년 독립했다. 식민지라고 해도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착취당한 것 같은 식민지는 아니었으나, 아일랜드 출신에 대한 무시가 공공연히 이루어져서 나름 설움이 많이 쌓였던 관계라고 한다. 이 책속의 단편들이 쓰여진 시기는 아일랜드 독립전이라서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내에 퍼진 반영vs친영 감정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작가는 아일랜드 출신이면서도 평생을 해외를 떠돌며 살았고, 그가 떠돌던 시기의 해외는 대부분 전쟁상황이라서 그런지 조국에 대한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 분명히 드러나진 않는다.
화자의 나이순으로 배열된 작품이다보니 첫 작품의 화자는 어린 소년이다. 당시의 교육은 종교기관이나 성직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소년을 가르쳐주던 신부의 장례식을 보는 소년의 시점인 <자매>,
엄격한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고 두 명의 소년이 일탈의 외출을 하는 <어떤 만남>,
사춘기의 소년이 짝사랑하는 소녀에 대한 마음이 보이는 <애러비>,
이제 막 여학교를 졸업한 소녀티가 남아 있는 아일랜드 처녀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다룬 <이블린>,
대학교를 다니는 아일랜드 청년의 소외감을 다룬 <경주가 끝난 후>,
서른 안 팎의 건달청년의 불안함이 보이는 <두 건달>,
직장에서 자리잡아 갈때 하숙집 딸과의 결혼에 몰리는 남자의 이야기 <하숙집>,
한 가정의 가장이 겪는 어설픔에 대한 <구름 한점>,
가장으로서 지치고 알콜중독자가 되가는 <대응>, 친자식처럼 기른 양아들의 집에서 겪는 죽음의 그림자 <진흙>,
독신남의 사랑에 대한 오해 <가슴 아픈 사건>,
중년 남자들의 선거 이야기 <선거사무시리의 아이비 데이>,
딸의 공연비를 제대로 받아내려 노력하는 <어떤 어머니>, 은혼식까지 치룬 남편의 종교에 대한 <은총>,
노할머니자매가 연 크리스마스파티의 여흥과 추억속 첫사랑의 죽음에 대한 <죽은 사람들> 을 차례대로 읽다보면
소년이 자라서 첫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도 하다가 결혼도 하고 삶에 찌들어 알콜에 기대가는 남자가 보이기도 하고, 꿈이 있는 소녀였지만 가족의 옆을 지키고 아들딸을 억척스럽게 키워내고 가정을 잘 간수하며 음악을 즐기고 품위를 지키며 늙어가는 여자가 보이기도 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의미없이 시간을 죽이고 겉모습에 보이는 품위를 따져가며 음악과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같다. 특히 화자가 남자일때는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부분이 많았다. 이어지지 않는 단편들임에도 비슷한 남자들이 자꾸 묘사되는 건 결국 작가 자기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하숙집> 이라는 단편에서 하숙생과 딸과의 은밀한 관계를 눈치챈 엄마와 하숙생과 자신을 결혼시키려 하는 엄마의 생각을 눈치챈 딸의 생각을 묘사한 부분이 나는 작가가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를 생각하는 양가감정을 묘사한 것처럼 읽혀졌다.
그녀는 솔직하게 질문했고 또 폴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둘 다 어색하긴 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 소석을 너무 대범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알고도 묵인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서 어색했고, 폴리는 그런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늘 자신을 어색하게 할 뿐 아니라, 순진하면서도 알 건 다 아는 자기가 엄마의 관용 뒤에 도사린 의도를 벌써 감지하고 있었다고 엄마가 생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도 어색해졌던 것이다.
더블린 에 대한 작가의 감정은 <구름 한점> 이라는 작품에서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나름 안정적인 직장과 신혼생활에 갓난아기를 둔 챈들러는 런던에서 활동하다 잠시 고국을 방문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생각한다.
성공하고 싶으면 떠나야 했다. 더블린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그는 런던에 더 가깝게, 자신의 맨숭맨숭하고 비예술적인 삶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하지만 기대를 품고 만난 런던에서 활동중인 기자 친구는 다른 말을 한다.
고국에 돌아오니까 굉장히 좋다. 정말이야. 다정하고 더러운 더블린에 발을 딛는 순간 훨씬 기분이 좋아졌어
자신을 런던으로 줄을 이어줄 친구는 쓸데없는 소리만 하다가 약속이 있다며 가버렸다. 챈들러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삶과 친구의 삶의 대비가 뼈저리게 느껴졌고, 그게 그에게는 부당하게 보였다. 갤러허는 출신이나 학력이 그보다 열등했다. 그는 기회만 주여진다면 자기 친구가 해낸 것보다, 혹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겉만 번지르르한 기자 생활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무엇이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그의 안타까운 소심함!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사내다움을 주장하고 싶었다. 그는 갤러허가 자신의 초대를 거절한 배경을 알 수 있었다. 갤러허는 선심 쓰듯 아일랜드를 한번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우정을 은혜로 베푸는 거였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며 든 생각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고는 하나 노예와 같은 착취를 당한 것은 아니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을 가진 사람들인데 사는 처지의 차이로 인한, 다시말하면 아일랜드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사이의 심리는 번영에서 밀려난 도시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번영에 번영을 거듭하는 도시 사이에 느껴지는 위화감 같은게 아닐까 싶었다.
이 책에서 가장 길어서 단편 보다는 중편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사람들> 에서 잘 나가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 게이브리얼 하는 말은 꼭 작가가 하는 말 같았다.
새로운 세대가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죠. 이 세대는 이 새로운 사상의 열기에 대해 진지하고 열광적이며, 그들의 열정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조차도 대체로는 진정성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적인, 또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사유로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저는 이 새로운 세대가, 교육받은, 혹은 과잉교육을 받은 세대이지만, 그 이전 시대에 속했던 그러한 인간미, 환대, 다정한 해학 같은 자질들을 결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저어됩니다. 오늘 저녁, 과거의 그 모든 위대했던 가수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고백하건대 저는 우리가 그때보다 덜 넉넉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시절들은 과장해서 말하지 않고도 넉넉한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돌이킬 수 없이 가버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오늘 같은 모임에서 우리가 그런 시절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은 죽고 없지만 세상이 그 이름을 선뜻 죽게 만들지는 않을 그런 훌륭한 사람들의 기억을 여전히 가슴에 간직할 것이라고 희망해봅시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아일랜드는 수백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아오고 있었고, 지속적인 차별로 가난에 허덕였는데, 저자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다. 조선후기 실학파처럼 조선말 개화파처럼 일제치하초기 신흥사상가들처럼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국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갈등이 짐작되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무기력하면서도 아일랜드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는 모습과 가난하면서도 여흥을 즐기는 모습과 끈끈한 가족애의 모습이 우리네 정서와 흡사하여 외국작품임에도 게대가 장편도 아닌 단편임에도 큰 거리감 없이 읽혀졌다. 그나이에 가졌을 법한 감정들도 공감되고 현실상황에 바탕을 둔 감정들도 백여년의 시간차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죽은 사람들>이란 작품은 아일랜드 인으로서의 양가감정이 가장 많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어서 여운이 긴 작품이었다. 작가가 봤을 때 더블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 일까, 작가 자신이 아내의 추억속에 죽은 첫사랑처럼 '죽은 사람'일까, 죽은 사람은 한 명인데 왜 제목이 복수형일까...
장편과 달리 단편을 쓸 때는 클라이맥스에서 갑자기 뚝! 끝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현대소설의 문을 연 작가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러한 작법이 두드러진 작품들이었다. 기존에 나왔던 작품들이지만 새롭게 번역해서 나온만큼 매끄러운 번역도 좋았고, 개인적으로 단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장편을 선호하는데, 한국작가들의 단편보다 더 공감이 잘되는 외국단편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