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왕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레미제라블>과 <양들의 침묵>의 환상적인 만남

인간의 탐욕과 원초적 본성을 파헤친 스웨덴판 셜록 홈스



프레데릭 배크만의 작품들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가 극찬한 놀라운 데뷔작 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던 책이다.

저자의 소개글을 보니 1979년생인 작가가 2017년 발표한 데뷔작인데, 출판되자 마자 흥행한 책이라고 한다. 후속작인 <1794> 또한 2019년에 출간되자마자 여러나라에 판권이 팔렸다는데, 책을 읽고나니 왜 그런지 알수 있었고 후속작도 어서 번역본이 나왔으면 바라게 되었다.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사족으로... 저자의 이름이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인데 '밤과 낮'이라는 의미를 지닌 '나트 오크 다그' 는 현존하는 스웨덴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이 성은 가문의 문장인 금색과 푸른색으로 위아래가 나뉜 방패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저자소개에 함께 씌여 있는 것을 보고 굳이 이 부분을 알려야 했을까? 싶으면서 유럽에서 귀족가문이란 여전하구나 싶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여하튼, 귀족가문에 걸맞은?! 품격?!있는 작품이긴 했다.


이 소설의 원제인 <1793> 년은 유럽에서 혁명의 시기였다. 귀족에게나 서민에게나.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혁명이 없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때 스웨덴은 주춤했던 왕정이 복구되었고, 제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권력이 재편될때 스웨덴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권력재편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국가로서, 대세에 따라 왕이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역사가 뒤집어진 것은 아님을 이 책을 읽은 후 이런저런 검색을 하면서 알았다. 스웨덴의 역사를 조금 알고 나니 작품 속에서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던 정황이 좀더 복합적은 의미로 다가왔다.


책의 시작에 앞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지도가 나오는데, 지도를 보고 있자니 정유정 작가가 생각났다. 지도로 시작하는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는데, 이 소설도 그런 면에서 비슷했다. 프레데릭 배크만의 책을 읽으며 스웨덴 소설 정서가 한국인 정서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니 서양소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위화감 없이 읽히는 것이 점점 더 스웨덴 소설에 흥미가 생긴다.


소설은 총 4부로 구성되는데 1부 1793년 가을 살인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2부 1793년 여름 사건 전의 시점으로 갔다가 3부 1793년 봄으로 더 거슬러가서 사건의 외적인 상황들을 서술하면서 여름 가을을 거쳐 자연스럽게 4부 1793년 겨울로 이어진다.

출판사의 홍보문구 처럼 혁명의 기운을 품은 시절 빈민촌, 경찰, 가짜이름 등은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하고, 감금, 폭행, 살인, 싸이코패스 등은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게 하며, 두 명의 남성이 주체적으로 사건해결에 나선다는 점에서 셜록 홈스를 생각나게 하지만, <늑대의 왕> 은 그 작품들과 달랐다. 매번 예상을 뒤엎는 독특한 추리소설이었다. 역사소설이 아닌데 역사를 알게하고 로맨스 소설이 아닌데 사랑의 감정이 내내 흐르는 묘한 스릴러 였다.


1793년 스톡홀름의 온갖 쓰레기가 떠다니는 호수에 팔다리가 절단된(심지어 혀가 잘리고 눈까지 파내어진) 시체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찰청의 사정상 청장의 친구인 변호사 세실 빙에 에게 의뢰된다. 그리고 세실 빙에는 시체를 건져낸 방범군 미켈 카르델에게 공조할 것을 요청한다. 모든 것에서 이성적인 빙에와 달리 카르델은 모든 상황에서 주먹이 먼저 나가는 타입이었다.


시계를 완전히 해체한 뒤, 그는 모든 작업을 역순으로 반복했다. 손을 떼자 익숙한 째깍째깍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그 순간 지난 여름 이래 백 번째로 그는 생각했다. 세상은 바로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 이성적이면서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모든 부품들에 제자리가 있고 그 부품들의 궤적은 어떠한 영향을 남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p. 21)


세실 빙에는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현재 페결핵 환자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고 아내가 있는 집을 떠나 혼자 병증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었다. 그래서 삐쩍 마르고 창백한 그는 '인데베토우의 유령'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인데베토우는 치안본부다. 우리네 경찰청)


빙에는 마음을 다스리려 눈을 감았다. 잠시간 그의 의식은 완전한 침묵 속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는 정신 속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그는 오비디우스의 책 한권을 뽑아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었다.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인헤리트' 모든 것이 변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없다. 위로를 주는 말이었다. (p. 24)

"빙에 씨, 혹시 '호모 호미니 루푸스 에스트' 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플라우투스가 포에니전쟁에서 남긴 말이지요. '사람은 만인에게 늑대다" (p. 92)

"한때 저에게 그리스 고전에 정통한 개인교사가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아주 교묘하게 쓰는 바람에 저는 아이스킬로스를 탐구하며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냈지요. 에우메니데스라는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비로운 이들' 입니다. 신화에서는 현명한 자들이 복수의 세 여신인 에리니에스의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그들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p.123)


서양인들의 작품에서 그리스로마고전이 인용될 때마다 얘네들은 기원전 것을 대체 얼마나 우려먹는 건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인용될 만큼 완성된 작품들을 그 옛날 부터 익혀온 것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리스고전을 좋아하다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또한 서양역사를 순차적으로 읽는 중이다보니 라틴어 고어와 역사에 대한 인용에서도 역시나 반갑다. 왠지 그냥. ㅋㅎㅎ


당신이야말로 진짜 늑대입니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당신이 늑대인 건 분명하지만, 만에 하나 제 짐작이 틀렸다 해도 당신은 조만간 완연한 늑대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늑대 무리와 함께 달리려면 늑대들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송곳니가 생기고, 포식자의 눈빛을 띠겠지요. 피에 굶주린 본능을 거부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 주변에서 피 냄새가 악취처럼 피어오를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당신의 이가 피로 벌겋게 물들고 나면 당신도 내 말이 옳았단 걸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의 송곳니는 깊이 파고들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 둘 중 더 힘이 센 늑대가 될지도 모르지요. (p. 96)


수사하면서 만난 한 영국상인은 빙에를 보고 늑대라고 말한다. 힘센 늑대같은 살인범보다 어쩌면 더 힘센 진짜 늑대라고.

소설속에서 늑대같은 야만성과 폭력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나오지만, 그 어떤 폭력적 수단을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냉철한 이성으로만 판단하는 빙에를 보고 소설 초반에서 이미 진짜 늑대라고 한다. 읽는 내내 빙에는 늑대같은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지만, 영국상인의 말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묘하게 실현된다.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운수가 좋을 것 같더라니" (p. 150)


크리스토페르 블릭스는 17살의 청년이다. (이 시절 유럽에선 이 나이면 군대도 갔다오고 결혼도 하는 그런 나이였다;;;) 왕이 벌인 명분없는 전쟁의 참상에서 살아남아 스톡홀름에 온 이 순진한 시골청년에게 친구인 쉴반 은 빚으로 빚을 갚는 사기꾼으로서의 삶을 알려준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운수가 좋을 것 같던 그날부터 둘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그날의 행운으로 쉽게 번 돈은 나중에 목숨빚으로 돌아오게 된다.


'돈을 좀 꾸어주십시오' 그말에 나는 당황했지. '여윳돈이 있기는 하지만 왜 하필 나를 찾아왔지?' 그러자 청년이 이러더군. '유태인이시니까요' 블릭스, '유태인' 이란 수백 년 전부터 고리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지. 그전까지 내가 살면서 단 한번도 남에게 돈을 꾸어준 적 없다는 사실은 그래서 아무런 상관도 없었어. 내가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구든지 나에게 돈을 꾸러 왔고, 돈을 빌려주는 게 유태인의 본성이라고 믿었기에 감사조차 표하지 않았어.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재빠르더니 내가 동정심으로 빌려준 돈을 갚을 땐 그렇게 굼뜰 수가 없었어. 그러다 이게 내 직업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p. 187)


사기는 사기에 의해 망하고, 엄청나게 불어난 빚 때문에 청부업자에게 쫒기다 잡혀 간 곳에서 채권자는 블릭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서양소설에서 유태인에 대한 묘사는 이상할정도로 한결같다. 잔혹한 고리대금업자. 그런데 이 고리대금업자의 운명론적 직업론은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통한다. 그들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묘한 논리랄까. 이 논리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딱 셋인데 빙에, 카르델 그리고 안나 다. 채권업자에게 잡혀 팔려간 곳에서 블릭스는 괴물의 지시를 받아 괴물같은 짓을 하게 된다.


이 저주받은 시대에 그녀는 아이를 낳을 것이고,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모르는 이 아이를 그녀는 길러낼 것이다. 이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다. 건강하게 자라서 세상을 불의도 악의도 없는 곳으로 만들 것이다. 이 아이가 자라서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대를 이어 어려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증오로 가득한 이 세상을 향한 그녀의 복수가 될 것이다. 사내아이라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칼 크리스토페르 라고 이름을 붙일 것이다. 여자아이라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으나 영영 잊히지 않을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나 스티나 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p. 329)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지만 깨끗하게 살아온 안나는 열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범하려던 청년의 부모에 의해 창녀로 고발된다. 당시는 동전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가 넘쳐났고, 그 창녀들을 잡아다가 교화소에 넘긴다는 명목으로 폭력이 횡행했고, 그렇게 잡혀간 교화소에서 또다시 매춘과 폭력에 짓눌리다 삶을 마치게 되는 인생이 흔한 시대였다. 안나는 매춘을 하지 않았으나 매춘을 한다는 명목으로 고발당했고 교화소에 넘겨졌고 폭력에 내몰렸다. 끝까지 지켜온 순결을 결국 교화소에서 잃었고 그렇게 잉태된 아기를 그녀는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했고 블릭스를 만났다.


세실 빙에는 몇 시간 전 카르델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현장에 빙에가 나타났을 때 화를 낸 것은 그가 아니라 아내였다. 빙에는 오로지 하염없는 슬픔밖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그 사실이 아내의 화를 더 돋우는 것 같았다. 당장 하사를 침대에서 끌어내리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두들겨 패면서 격한 감정을 드러냈어야 했을까? 그러나 빙에는 폭력이 이성에 앞서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어쩌면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폭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빙에가 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저 멀리서 달을 보고 울부짖는 외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지프 대처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라 빙에는 몸을 떨었다. '당신이야말로 진짜 늑대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당신의 이가 피로 벌겋게 물들고 나면 당신도 내 말이 옳았단 걸 알게 될 겁니다' (p. 390)


빙에는 카르델과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와중에 다양한 것을 알게 된다. 귀족들의 추악한 습성과 군인들의 의미없던 죽음과 왕정에서 벌어지는 숨겨진 권력다툼과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그가 범인을 찾아갔을 때 범인은 빙에를 환영하며 자백한다. 넓다 못해 광활한 영지위에 쓰러져 가는 저택에서 철저히 혼자 살던 괴물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늑대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당신만큼은 예외입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우월한 종류의 인간이지요. 누구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와중에 당신은 정의와 이성을 수호하고자 하니까요. '엑스트라 포스텐'에서 당신의 이름을 맞닥뜨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 제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제 여정이 끝나는 자리에 당신을 데려다놓은 것은 신의 섭리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피고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에서 진술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니 제가 진술을 마친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은 제 책임인 동시에 당신이 이룬 일이기도 합니다. (p. 438)


나는 범인에게 속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예상은 매번 틀렸다. 귀족들의 음탕하고 잔혹한 사건인가 싶다가 아니었고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데 도와줬고 이사람들이 이렇게 살수 있나 싶은데 살았다. 범인은 자신의 괴물적 범죄를 시대적 혁명의 불씨로 만들고자 했다. 감히!. 하지만 빙에는 진실을 꿰뚫었고 범인에게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묘하게 기쁘지가 않다.


북쪽 광장은 눈에 덮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새 동상이 꽝꽝 언 덮개로 감싸인 채, 완성되어 공개되기를 이 년째 기다리고 있었다. 이 동상이 왕조의 첫 기마상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빙에는 멈춰 선 채 덮개에 가려져 형체를 알기 힘든 이 동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령 같은 윤곽선을 가진 이 동상은 마치 요한테스 발크가 감라스탄에 풀어놓고자 하는 죽음의 신이라도 되는 듯 광장 한가운데 위협적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p. 451)


역사에서 혁명이 항상 올바른 불씨로 시작됐던 것은 아니다. 역사는 우연적 발화로 필연적 사건이 만들어지곤 했다. 유럽 대륙이 혁명으로 들끓을때 스웨덴의 기울어져 가는 국력과 처참한 국민들의 생활 사이에는 혁명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 성냥불만 켜도 산불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불씨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신을 불러들이는 것이 옳았을지 아니었을지 빙에는 선택했지만 나는 여전히 선택할 수가 없다. 무엇이 더 나았을까...


'난롯가의 불빛 속 미켈 카르델을 돌아보며 미소 짓는 빙에의 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이 작품의 가장 뒤통수치는 격의 반전 문장이었다. 자신의 피로 물든 늑대는 과연 늑대인가? 이 소설 속에서 진짜 늑대의 왕은 누구였을까? 세실 빙에였다고 확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 중 한가지다. 이 작품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하기 어려운 의문들을 남기는 기묘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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