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8 대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대표작

"정확하고 압도적인 문장, 인간의 연대와 따뜻함에 대한 희망"

 

 

2018년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었다.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한림원에서 성추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9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두 명이긴 했다. 이 두명 중 한명에 대해서도 또 논란이 일어서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여하튼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한 문학단체들이 한시적인 상을 마련했고, 그 수상자가 바로 이 소설의 작가인 마리즈 콩데 였다.

마리즈 콩데는 1937년 프랑스령 과들르프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다. 흑인이었으나 부유하게 자란덕에 프랑스 유학을 가서야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현실과 떨어져 자라왔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유학생활 중 미혼모가 되자 집안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긴 후 흑인/여성/미혼모/가난 이라는 온갖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뼈저리게 겪게 되면서 작가적 양분을 체득하게 된다. 프랑스어 교사 자격으로 아프리카로 들어가 13년간 살면서 '검은 백인'으로 자랐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아프리카를 깊게 알아가게 된다. 이때의 아프리카 체류경험이 남은 일생동안 작가의 문학적 바탕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세일럼 마녀 재판' 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역사소설인 것은 아니다. 1692년 시작된 이 마녀 재판은 20명이 처형됐고 50여명이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중 티투바 라는 앤틸리스제도 출신의 흑인노예여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과 맹목적 광신이 희한방 방식으로 드러난 상징적 사건으로서 온갖 연구 대상이 되었던 이 사건에서 티투바 라는 흑인노예여성에게 주목한 사람은 마르지 콩데 뿐이었다.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티투바에 대해 작가는 소설적 삶과 생명을 부여한다.

1690년대 노예선이 수시로 왕래하던 남미대륙 위쪽에 있는 작은 섬 바베이도스.

노예선에서 강간당한 여성이 섬에 내려 낳은 딸 티투바. 자신을 낳아준 엄마 아베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딸을 품에 안아준 양아버지 야오. 노예의 삶일지언정 세식구가 각자의 처지를 조금씩 받아들이며 적응해가던 때 농장 주인에게 아베나가 겁탈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인해 아베나와 야오는 죽는다. 일곱살 어린나이에 잔인하게 부모를 잃은 티투바를 숲속에 살던 만 야야 라는 노파가 거두어 들인다. 만 야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흑인여성이었고 티투바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배워나간다.

그녀는 모든 것이 살아 있음을, 모든 것에 영혼이 있고 숨결이 있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도. 인간은 말을 타고 자신의 왕국을 돌아보는 주인이 아니라는 것도. (p. 22)

티투바가 자연을 배우고 영을 만나게 되면서더 큰 배움이 필요해지려 할때 만 야야는 생이 끝난다. 티투바는 아직 열네살 소녀였을 뿐인데..

죽은 자는 우리 마음에서 죽어야만 죽은 거다. 우리가 망자를 소중히 여기면, 우리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존중하면, 우리가 망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무덤에 갖다 놓으면, 우리가 규칙적으로 망자를 추모하고 망자와 교감하기 위해 묵상을 한다면, 망자는 산다. 망자는 관심을 갈망하고 애정을 갈망하여 여기저기,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망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육신을 우리의 육신에 바싹 갖다 댄 채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고 안달이 나 있으니, 망자를 불러내려면 몇 마디 말이면 된다. (p. 23)

어린 소녀 티투바는 숲속에서 혼자 배운 그대로 자연을 집 삼아 살아간다. 영으로 존재하는 세명의 귀한 어른 들과 함께.

하지만 몇 발짝만 숲을 나가면 농장과 사람들과 노예들이 있었고, 어느날 한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에게 처음으로 '마녀' 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만 야야 와 아베나가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 농장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스스로 노예의 삶을 살게 된 티투바가 만난 백인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 말을 하는 동시에 나를 무시했다. 인간 지도에서 나를 말소해버렸다. 나는 비존재였다. 보이지 않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들보다도 더 보이지 않는 존재. 적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능력이라도 갖추고 있지 않는가. 티투바, 티투바는 그 여자들이 허용하는 꼭 그만큼의 실재감밖에 없었다. 그건 끔찍했다. 티투바는 추하고 뚱뚱하고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 그 여자들이 그러기로 결심해서였다. (p. 46)

농장에서 지내는 노예의 삶은 힘들었다. 하지만 농장주인이 자신을 새주인에게 팔아버리고, 새주인을 따라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면서 더 끔찍한 삶을 만나게 된다.

노예의 삶으로도 모자라 혹독한 마녀재판을 겪고 새롭게 유대인 주인을 만났을때 이제 좀 행복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줬던 유대인 가족도 다른 이들에겐 낯선 이방인들이었고 배척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이 가족이 자기 자신의 불행이 아닌 모든 것에, 세계를 떠돌며 겪는 유대인들의 시련이 아닌 모든 것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줬다. 어쨌든, 그 슬픈 사건에 대해 알게 됐을 때도,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잔인함이 특징이라고 그들을 탓하며 내 죄를 완전히 사해줬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이보다 더 잘 맞는 주인을 만날 수 없었으리라는 소리다. (p. 200)

평온한 시간도 잠시뿐... 마을 사람들이 유대인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아홉명의 아이가 모두 죽고 만다. 아이들을 잃은 남자는 모든 것을 잃은 곳을 떠나며 티투바에게 자유를 준다. 그렇게 티투바는 자신의 고향 바베이도스로 돌아오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십년만에 돌아온 바베이도스는 여전히 노예들의 비참한 삶이 우글거리는 곳, 그러나 조금씩 잔란의 새싹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다.

티투바는 숲속의 은신처에 돌아오고 근처의 농장 노예들은 그녀를 반기며 의지한다. 티투바는 노예들을 치료해주고 노예들은 돌아온 마녀에 대한 헛된 신화를 꿈꾸고 싶어한다. 그리고 티투바가 살려낸 한 소년이 신화를 벗어나 움직임을 시도한다.

티투바... 치유사로서의 재능은 존중해요. 내가 이렇게 태양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여전히 살아 있는 게 당신 덕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사양할래. 미래는 그 미래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거니까. 날 믿어요. 주술과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 거기에 도달하는 게 아니에요. 행동을 통해서입니다. (p. 261)

하지만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발각됐다. 마녀재판에서도 살아남았던 티투바는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죽음이후의 존재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들은 티투바를 잊지 않았다. 티투바의 노래를 불렀다. 티투바의 노래가 불리는 한 티투바는 아마도 그들 곁에 내내 머무를 것이다. 그들을 치유해주기 위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아님에도 아프리카적 신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이었다. 주술사 와 마녀의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신앙과 광신이 믿음의 차이인 것처럼. 하지만 그 믿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술이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순수한 믿음은 인간을 구할 수 있으나 순수하지 못한 믿음은 파멸을 가져올 뿐인것을...

세일럼의 검은 마녀, 바베이도스의 주술사, 티투바는 온전히 그녀만의 존재성을 강하게 각인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녀가 흑인이고 노예이고 여성이라는 것이 티투바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다 가리는 것이 아니라서 이 소설은 1986년 작품임에도 시대를 떠나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흑인노예와 마녀재판과 여성의 성적차별이라는 큰 시대적 화두가 아니어도 티투바 라는 캐릭터가 여전히 생생하게 읽히고 있기에 그저 인간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마리즈 콩데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상을 받은 대가는 역시 상을 받을 만한 뭔가가 있긴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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