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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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전쟁의 단면과 이면,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포착해낸 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

"그날,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식당에서 나는 히틀러의 시식가가 되었다"

 

 

히틀러의 시식가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던, 실존인물 마고 뵐크의 고백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이탈리아에서 출간 즉시 1개월간 3만부 이상이 판매되었으고, 현재까지 전 세계 46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5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한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동안 이 작품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갔다는 소개글을 보며,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곳곳에 퍼져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여전히 히틀러 라는 이름은 그냥 스쳐지나가지지 않는 이름이고, 그를 소재로 한 글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왕을 대신하여 음식을 먹어주던 시녀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알고 있다. 그런데 독재정치하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왜 여태 못해봤을까 싶다. 한 사람의 지배자, 그를 위한 많은 준비들, 그를 향한 많은 위험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히틀러라는 인물에게는 그의 음식을 먼저 먹어보는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전쟁터에 보내야 하니 음식을 먹어주는 일은 남아도는 여자들이어야 했을 것이다.

로자는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댁이다. 그런데 신혼생활을 1년도 못하고 남편은 나치군에 입대했다. 함께 살던 베를린은 폭격을 당했고, 시부모가 살고 있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로 내려가 남편을 기다리며 지내던 중 갑작스레 군인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곳엔 다른 여성들도 있었고, 그녀들 앞에는 음식이 놓인다. 그 마을엔 히틀러의 비밀벙커가 있었고, 그가 먹을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미리 먹어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을 10명의 여성이 끌려왔다. 전쟁중이었고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그 음식들은 쉽게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들이었지만, 먹고싶은 욕망과 살고싶은 욕망은 갑자기 충돌하게 된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는데,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 혼란.

여자들은 배부른 악어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어쩌면 그것도 소화 과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p. 15)

악어가 먹이를 먹기전 눈물을 흘린다는 '악어의 눈물'은 사실 악어의 생리적 현상일 뿐인데, 위선적 거짓된 눈물로 자주 인용된다. 배고프지만 자신이 잡아놓은 먹이를 위해 애도의 눈물을 먼저 흘려주고 먹이를 먹는 것 같은 악어, 그 악어의 눈물.

그런데 식당에 끌려온 여자들은 음식을 먹고 배부른 악어처럼 눈물을 흘렸다. 먹고나서 흘리는 그 눈물부터 이미 욕망이었던 것일까?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자신을 위한 애도? 먹은 것에 대한 두려움? 과연 그녀들이 악어들이긴 한걸까?

그렇다. 나는 딱 봐도 전쟁에 길들여진 순수 아리아 혈통의 젊은 여인이었다. 100퍼센트 순수 국산물이니 그들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임이 틀림없었다. (p. 21)

히틀러를 위해 일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모든 독일인의 의무였다. 하지만 요제프는 내가 총이나 폭탄이 아니라 독이 든 음식을 먹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개 같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여자에게 영웅적인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p. 22)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위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p. 71)

 

시식용 여자들도 순수한 독일인이어야 했다. 개죽음만도 못한 죽음을 맞게 될 지라도, 독이 든 음식을 먹게 될지라도, 그러한 죽음이 용인되는 조건은 오직 하나, 순수혈통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라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한다. 순수혈통 독일인 젊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히틀러 대신 미리 음식을 먹는 여자들도 저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로자는 죽을 때까지 나치를 반대했던 아버지를 생각했고, 폭격으로 숨진 어머니를 생각했고, 나치군이 되었으나 후회의 편지를 보내는 남편을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하나 없는 외지인으로 갑자기 병영에서 히틀러의 음식을 먹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 무엇도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것과 매번 음식을 먹을때마다 느껴야 하는 공포는 생존본능과 죽음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일상이 되어 갔다. 혼돈이 일상이 되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전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총통은 그뿐 아니라 가축을 도축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행위라 고기를 먹을 수 없대 (p. 81)

히틀러의 요리사가 이야기하는 히틀러의 모습은 인간적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 파이를 좋아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변비를 걱정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사람이다. 요리사는 그를 위해 요리하고 그가 한 요리를 먹는 여자들에게도 친절하다. 하지만, 로자가 여자들 무리에 친구로서 자리잡기 위해 우유를 훔치고 군인에게 들키고 요리사가 자신이 준것이라 말해주어 구해준 뒤부터 요리사는 그녀들에게 등을 돌린다. 생과 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인간관계는 맺어지지만 쉽게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끊어진다. 하지만 쉽게 끊어지는 인연일지라도 끊어질때는 다 아프다.

내겐 그 몇 달간의 기억이 별로 없다. 어느 날 크라우젠도르프로 향하던 버스 차창 너머의 잔디밭 사이로 솟아나온 보라색 토끼풀 빼고는. 보라색 토끼풀을 보는 순간 나는 수도승 같은 일상에서 깨어났다. 봄이 온 것이다. 나는 그리움의 대상이 없는 향수병을 앓았다. 그레고어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나는 삶이 그리웠다. (p. 130)

남편이 실종됐다는 통지서가 오고부터 로자는 더욱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사망통지서가 아닌 것으로 위안 삼으며 시부모님을 부모님처럼 여기며 가까스로 친해진 동료들을 친구처럼 여기며 매일 병영으로 출근해서 음식을 먹고 퇴근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계절은 바뀌었고 누구를 기다려야할지도 모르면서도 기다리며 사는 삶 속에 정작 로자가 기다렸던 것은 자신의 삶이었고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인지 욕정인지 모를 관계를 갖게 된 한 남자로 인해 혼란은 가중된다.

그레고어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몰라도 내 삶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학교에 내버려두고 집으로 가버렸을 때도, 어머니한테 선물로 받은 새 만년필을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랬다. 그때 나는 누군가 내 만년필을 훔쳤거나 실수로 자기 필통에 집어넣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동무들의 가방을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가 사준 놋으로 만든 새 만년필을 잃어버렸는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까많게 모른 체 내 침대를 정리해주고 스웨터를 개주었다. 나는 내 실수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다.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조금 덜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p. 242)

로자에게 비밀이 생긴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었다. 그 괴로움을 견디는 방법은 그 비밀을 지키는 방법은 배신하는 것이었다. 로자에게 히틀러의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실종된 남편외에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배신해야 자신을 덜 사랑할 수 있었다. 삶을 덜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비밀스런 관계에 로자는 자신의 삶을 의지했다. 결국 살기 위한 배신이었다. 어떤때는 맹렬하게 삶을 놓고 싶다가 어떤때는 도저히 삶을 놓을 수 없는 본능 속에서 로자는 결국 욕망에 순응했다.

우리는 무기 없는 군인이자 신분 높은 노예였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었고 실제로 라스텐부르크 밖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몰랐다. (p. 301)

지난 몇 년 동안 내 눈에는 모든 영웅적인 행동이 어리석어 보였다. 나는 신념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앞에 나서는 모든 사람들이 창피했다. 특히 정의를 위해 나서는 이들을 볼 때는 더 그랬다. 그것은 낭만적인 이상주의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과는 동떨어지고 순진해빠진 거짓 감정이었다. (p. 322)

 

히틀러에 대한 폭파사건이 있고 전투에서의 패배가 늘어갈수록 시식하는 여자들에 대한 환경도 옥죄어 들어왔다. 그녀들의 존재는 애매했고, 애매한 상황속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건은 정의롭지 않았다. 친구의 행동은 어리석어 보였지만, 그 친구를 잃었을때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로자였다. 다들 한 사람의 부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고 로자에게는 그 상황조차도 상처였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넘기는 것을 로자는 당연하게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드러낼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로자는 비밀에 묻었고 비밀이 늘어날 수록 배신도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기자신도 배신하면서 로자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로자에게 배신과 욕망은 어쩌면 같은 이름이었다.

나를 제외한 전 인류가 정말로 죽음 대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선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목에 바위를 매단 채 모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는 대신 궁핍하고 외로운 삶을 선택할지는 모르겠다. 나를 제외한 전 인류가 전쟁을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인간은 미친 종족이다. 그런 종족의 본능을 충족시켜서는 안된다. (p. 359)

전쟁은 인간을 미치게 하고, 미친 인간의 본능은 파괴시켜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로자는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남았는데 전쟁이 끝나고서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로자를 보면서 전쟁이 그녀를 미치게 한 걸까? 아니면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게 한 걸까?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고통은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감정이다.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보고 다시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생각을 못 견디는 자기 자신 때문에 힘든 거다. 고통은 이기적인 감정이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p. 402)

나는 지금껏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살면서 유일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하는 방법뿐이었다. (p. 405)

 

로자는 실종됐던 남편이 돌아오자, 죽어가던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결국 살려놓고 헤어졌다. 남편이 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늙어가는 내내 로자는 혼자였다. 이기적 고통을 자신만의 비밀로 만들고 그 비밀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면서도 로자는 그저 살아남았다.

나는 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해자가 아님에도 가해자로 살고자 하고,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아닌 삶을 선택했다. 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나눌 수 없게 만든다. 로자도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진실이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었을지 이해와포용으로 상처를 아물게 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로자는 끝까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저 생존한다. 그렇게까지 살아낸 인생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화가 나기도 했다.

로자의 선택이 주는 혼란은 본능과 욕망사이에서 더욱 혼잡해진다. 무엇이 본능이고 무엇이 욕망인지 구별할 수 없어진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음식에 대한 욕망은 히틀러의 음식이라는 것과 독이들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사이에서 배치되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친구의 실체에 대한 무지는 관계의 진실성에 대해 알수 없게 하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다른 남자에 대한 욕정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헤깔리게 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로자는 그저 침묵하고 생존한다. 답답하다고 욕하기엔 전쟁의 참상이 공포스럽고 용기내보라고 응원하기엔 현실의 잔인성이 충분히 두렵다. 독일인은 나쁘고 유태인은 불쌍하다는 간단한 명제는 사실 참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짓이랄 수도 없다. 그 참과 거짓 사이에 로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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