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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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이 친숙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라는 그림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선명한 그림들이 좋아서 그의 작품 여럿을 보다가 이 그림도 종종 보긴 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얼마전 어떤 강연에서 듣고 아~! 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던 때의 나이는 칠십이다. 그림에서도 머리가 허옇다. 그런데, 그의 신체는 젊은이의 매끈한 근육질 몸매였다. 진리는 영원불멸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렇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오~! 그렇다. 손가락을 위로 치켜드는 것만 생각했었다. 저 손가락 모양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이라는 그림에서 플라톤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상적인 이성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같은 곳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을까? 크게 보자면 그럴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이상과 플라톤의 이상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이 한권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책의 원저자는 플라톤이다. 그리스어로 쓰여진 원전을 번역한 책이다.

플라톤의 책들은 서양철학의 기본서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의 모든 것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국내에 원전 완역본이 유통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명한 것들 몇 가지 외에는 다 번역되어 있지도 않다. 플라톤의 책도 그러할진데 다른 고대철학자들의 저서들은 원전 완역본이 더 흔치 않다. 체계적으로 원전 완역본들이 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플라톤 책들을 읽었던 경험이 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편은 아닌데, 다른 번역본으로 보니 새로웠다.

처음엔 숲출판사에서 나온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본들을 읽었었다. 고대철학 원전번역본 중 대중서로는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이 가장 술술 잘 읽힌다.

그러다 정암학당을 알게 되서 단행본들로 나온 플라톤 원전 번역 시리즈를 몇 권 읽었다. 철학 전공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해가며 번역하여 주석이 본문의 양과 비슷할 정도로 해석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을 읽게 됐다. 천병희 선생님의 책이 시처럼 읽히고 정암학당 책이 사전처럼 읽힌다면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힌다고나 할까.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되었고, 주석도 같은 페이지 하단에 위치한데다 비교적 상세한 편이라 초보자가 읽기에도 편하게 읽을 만한 책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변명' 이란 단어에 담긴 부정적 뉘앙스로 '변론'으로 옮길 때가 많다. 어떤 역자는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고발된 혐의 내용을 반박하면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 '변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발에 함축된 자기 삶 전체를 향한 물음과 도전에 '항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삶의 방식, 그러니까 철학과 철학적 삶 자체에 관한 '변명' 인 셈이다' 라고 주장한다. '변명' 이나 '변론' 둘 다 일리가 있으나 역자는 오랫동안 다수의 독자에게 익숙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제목을 정했다. (일러두기 中)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제목에 대한 역자의 당부가 써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변론' 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천병희 선생님은 '변론' 으로 제목을 정하셨고, 정암학당 본은 '변명' 으로 제목을 정했다. 정암학당 강의를 들은적이 있는데, 거기서 '변명' 으로 정한 이유는, 변명 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뜻 풀이하면 의견은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 이라서 원래의 의미를 살려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일본에서 외국 번역 책들이 들어오던 시기에 '변명'으로 들어와서 대중적인 제목이 '변명' 이 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의미상 변명은 핑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에, 나는 '변론' 이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 감옥 - 사형집행일 이라는 사건 순서로 연결된다. 이런 연결성을 보자면 사실 뒤에 '향연' 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동떨어져 있긴 한데, 소크라테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라 함께 한 책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며 그 논리적 맥락에 다시한번 감탄한다. 당시 민주정은 제대로 된 민주정이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자꾸 되묻는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재판정에서 '변명'을 하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 그렇게 진실만을 말해서 유죄판결을 받는다. 재판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답정너였다.


설마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라면, 나는 내가 말 잘하는 웅변가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그들이 말한 것 중에서 진실은 거의 없거나, 실질적으로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러분은 나에게서 오직 진실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p. 11)


진실을 듣는 것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는 위험하다.


그러자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이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청년들입니다. 그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종종 나를 흉내 내면서 자신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화하곤 합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했던 수많은 사람이 사실은 거의 또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 드러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들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소크라테스라는 아주 무서운 전염병 같은 자가 있는데, 그자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말하며 내게 화풀이를 합니다. (p. 23)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뭔가를 많이 알아서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 아니라고 여러번 이야기 한다. 오히려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배워보려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하고 대화하다 보니 상대방은 지혜롭지 않은데도 본인이 지혜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적어도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다. '무지의 지'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하고 다닐수록 그에게는 적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하는 소크라테스가 어찌 편하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곧 여러분이 내게 사형을 평결함으로써, 신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에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웃겠지만,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이르게 한다면, 그런 후에는 내 역할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데다가 힘이 있긴 하지만 몸집이 크고 다소 둔하고 느려서 등에를 붙여 정신이 번쩍 나게 해야 하는 말 같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나 같은 사람에게 등에의 역할을 하라고 이 나라에 꼭 붙여놓으시고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옆에 꼭 붙어서 종일 끊임없이 설득하고 책망하여 정신이 번쩍 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p. 39)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등에를 떼어내버렸고, 바로 후회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역사에 깊이 각인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까지 등에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총 3차로 이루어져 있다. 1차는 고발된 혐의에 대한 변론이고 이 변론 후 아테네 사람들인 배심원 500명이 유죄 판결을 내린다. 이 판결을 듣고 2차 변론을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유죄인정은 커녕 자신에게 상을 줘야 하는 거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2차 변론에서는 본인이 생각하는 형량을 제시할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2차 변론을 듣고 배심원들은 그냥 유죄가 아닌 사형을 선고해버린다. 3차 변론은 사형선고를 알게 된후 마지막으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여러분을 비판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해서, 자기 삶이 올바르지 않다고 누군가가 비판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비판을 모면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고상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고상하고 쉬운 길은 여러분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직접 관심을 갖고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내게 사형을 선고한 여러분에게 해주는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p. 55)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을 살면 안된다고 끝까지 강조한다. 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귀를 막았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아테네 민주정은 무너졌다.


[크리톤] 은 몇 페이지 안되는 짧은 분량이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리톤이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아마 여기서의 내용이 왜곡되어 '악법도 법이다' 라는 소크라테스가 하지 않은 말이 소크라테스의 명언인 것처럼 퍼진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으면 악법도 법이라서 지키려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 에 대한 철학적 결론도 그러한 선택을 뒷받침 했다.


[파이돈] 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 에 대한 철학적 생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사형집행일이 되자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헤 친구와 제자들이 모였다. 자신을 걱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에게 죽음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설명한다. 이승에서의 삶이 얼마나 철학적이었느냐에 따라 영혼의 길과 저승에서의 시간은 희망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나오는 '영혼' 에 대한 논증과 '저승' 에 대한 논증은 죽는날까지 제자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논리를 입증시키는 소크라테스식 교육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면서, 나중에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상기설' 에 대해 나오는데, 우리가 배워 알게 되는 것들이 실은 단지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이론은 플라톤의 <국가> 에서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체계를 잡게 된다.


[향연] 은 '에로스' 에 대한 대화로 유명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에로스' 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에로스가 아니다. 시작은 에로틱하게 출발하지만, 마무리는 진정한 지혜로 매듭지어지면서 '향연'이니만큼 취객의 난동으로 마무리 된다.


'향연' 의 화자는 아폴로도로스 인데, 아가톤의 향연에 참석한 소크라테스 와 함께 있었던 아리스토데모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즉 직접들은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들은 것을 다시한번 간접적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결국 정말 그런 대화가 있었는지 알수 없다는 말이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을 거쳐가다 보면 바뀌는게 일반적인데, 소크라테스의 말을 아리스토데모스가 듣고 아리스토데모스의 말을 아폴로도로스가 듣고 아폴로도로스의 말을 친구들이 들었을때,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어느정도 그대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단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책으로 남기면 읽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직접 대면하고 일대일로 대화하면서 제대로 깨우치게 되는 것만을 중요시 여겼다.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의 지혜들은 다 플라톤의 책들에서 시작된다. 플라톤의 책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대화체로 서술되지만 진짜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과연 소크라테스일까 플라톤일까? 게다가 '향연' 은 이 복잡한 건넘건넘과 술자리 라는 이중의 장치로 인해 그 진의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래서 플라톤의 재치가 돋보이는 문장들도 많긴 하다. 취중진담일까 취중농담일까?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플라톤의 철학이 아직도 연구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가톤이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지인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푼다. 그런데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제의 과음으로 또 술을 먹는게 힘드니 재미난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한다. 바로 에로스에 대한 예찬

파이드로스는 에로스 신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공경받아 마땅한 신이라 하고, 파우사니아스 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구분하여 천상의 에로스를 예찬한다. 의사인 에릭시마코스는 건강에 빗대어 조화로움을 강조하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작가라서 그런지 남녀추니를 등장시켜 원초적 본성에 대한 본능으로서의 에로스를 강조한다. 아가톤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으로서의 에로스를 극찬하자 소크라테스는바로 에로스에 아름다움이 결핍되어 있음을 아가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수긍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은 예찬은 할줄 모르고 오직 진실만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인지라 에로스에 대한 진실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여기서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등장한다. 에로스 신에 대한 기원에서 시작하여 범속의 에로스보다 천상의 에로스를 높게 보고 본능의 에로스도 인정하지만 에로스의 아름다움이 진리추구 인 것으로 정리되는 대화의 연결은 술자리에서 나온 논증들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쳤을 즈음 술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와서 애처로운 시비를 건다. 아테네 최고의 미남이자 아테네 최고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향연]을 읽으면 플라톤의 풍자를 더욱 웃으며 읽게 된다. 술주정인듯 질투어린 시기인듯 알키비아데스의 넋두리가 끝나기무섭게 다른 취객들까지 들이닥쳐셔 향연은 그야말로 거나한 술판이 되고 만다. 앞서 이야기 했던 에로스의 진리는 어디로 갔나 싶지만, 마셔도마셔도 취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 단 한사람,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구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전은 정말 고전의 매력이 있어서인지,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으로 구성된 책을 다른 판본이긴 하지만 이 책으로 3번째 읽은 것인데, 그래도 재밌다. 참 신기하다. 읽었던 것이기에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주석들이 많아서 더 좋았다.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 철학의 책 구성을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 과 <향연-메논-파이드로스> 로 하면 어떨까 싶다.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기다리면서 에우튀프론과 '경건함' 에 대해 나눈 대화인데, 저술시기와 상관없이 배경시간이 연결되고, '탁월함' 에 대한 대화인 메논 과 '미와 사랑' 에 대한 대화인 파이드로스를 향연과 함께 읽은 후 <플라톤의 국가> 를 읽으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대화편들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국가' 에도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지만, '국가' 는 플라톤 철학의 결정체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서 읽은 대화편들이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넘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충해준다. 무엇보다 플라톤의 '국가' 는 공부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보니 다른 대화편들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어차피 원전을 그대로 읽을 수 없기에 번역본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원전번역본의 완성도는 본내용의 이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소설을 읽듯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과 친절하면서 충실한 주석들이 마음에 들었다. 저자의 다른 번역본도 출판사의 다른 고전 시리즈도 왠지 기대가 된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고전을 읽은 기분이 뿌듯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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