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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오늘은 소설을 읽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서 소설을 골라들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권지예 10년 만의 소설집' 이라는 띠지의 홍보문구에서, 아...상을 탄 작가구나... 아... 10년만에 이면 신인작가는 아니겠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이름이 낯설까 싶었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는편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나는 아마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 위주로 읽어왔나 보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가장 편안하고 무난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좋아하게 된 작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되곤 했다.
이 책은 6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린 소설집인데 대부분의 단편집들이 그러하듯 문예지들에 발표됐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내가 문학전공도 아니고 문예지를 구독할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니 이렇게 소설집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 정말 글 잘쓰는 작가들이 많구나!
처음 들어본 작가였지만, 이름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을만큼 자기색깔도 뚜렷하고 글도 무난하게 잘 쓰는 작가였다. 1997년에 등단했다는데.... 아이쿠 이런 너무 오랫동안 모르고 있어서 괜시리 미안해진다.;;; 표지 그림 속 럭셔리해 보이는 저 여인은 누구일까... 일단, 베로니카는 아니었다. ㅎㅎ
첫번째 작품은 [베로니카의 눈물] 은 쿠바를 배경으로 한다.
한국인 작가인 모니카는 쿠바로 여행을 떠난다. 몇달 묵으면서 글을 쓰려고 아파트를 빌렸다. 그 아파트 관리인이 베로니카였다. 일흔이 넘은 쿠바할머니 베로니카는 쿠바와 쿠바인을 대표하는 성격들을 드러낸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하지만 가난해서 의기소침해지는...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베로니카와 글을 쓰기는 커녕 삼시세끼 먹는 것부터가 문제인 모니카의 좌충우돌 엮이는 시간들은 모녀인듯 모녀아닌 모녀같은 남남 사이다.
모니카! 슬픈 얼굴 하지마! 돈이 다가 아냐. 난 아침에 눈 뜨면 정말 행복해서 노래해. 우리도 사는 데 물론 스트레스 많이 받아. 어느 곳에서든 인생이 늘 행복한 건 아닐 거야. 모니카! 봐봐, 돈은 중요하지만 인생은 돈이 다가 아니잖아. 그럼 어찌 사는가가 중요해. 사랑이 제일 중요하지.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거든.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구. 오오! 미 꼬라손! 미 아모르! 미 비다! (오오 내 심장, 내 사랑, 내 인생이여!)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에 물기가 돌았다. (p. 60)
모니카, 중요한 일이라고 너무 집착하고 애쓰지 마. 그런 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아. 인생은 그저 흐르는 거야. 그냥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실어. 춤을 출 때처럼. 우린 그래서 모두 츰을 잘 추지. 여긴 쿠바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그냥 파도에, 리듬에, 인생의 시간에 몸을 실어. 긴 걸레로 거실을 닦던 베로니키가 갑자기 걸레를 팽개치고 신나는 노래를 부르며 살집을 출렁대며 춤을 추었다. (p. 77)
하지만 쿠바도 사람 사는 곳이었고, 쉽게 맺어진 관계는 쉽게 비틀어졌으며,가난에 익숙한 사람과 가난이 불편한 사람은 진심이 닿지 않았다.
그동안 여행중에 5성급 호텔에 머문 적도 있었는데 뷔페 식당에 그런 과일들이 나왔었다. 그런데 파인애플은 너무 작고 시었고, 멜론은 푹 무른 늙은 오이처럼 전혀 달지 않았다. 열대과일에 대한 나의 기대는 그때부터 깨졌다. 그런데 이젠 오렌지마저도.
"아, 오렌지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맛있고 시원하다. 아 행복해! 정말 맛있지? 모니카, 응? 쿠바 과일이 최고라니까."
그녀는 세상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지금 그녀가 맛나게 먹는 초록 오렌지가 그녀에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렌지다. 나는 세상의 많은 과일을 맛보았고, 비교할 수 있는 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혀를 장착하고 현재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나는 불행하다. (p. 67)
쿠바에서의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2년이 지난 후 서재를 정리하며 쿠바에서의 시간을 베로니카의 눈물을 떠올리는 모니카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동안 쿠바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무심코 펼친 책 속에서 모니카는 발견한다. 베로니카의 눈물이 무엉이었는지...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 에서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이번엔 파리다.
누구나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생각해버린다. 파리는 낭만의 상징이고, 또 파리의 상징은 에펠탑이니까. 쯧! 에펠탑 밑에만 있으면 무조건 낭만적이 되는 줄 아나. 그런데 상징이란 무서운 거다. 에펠탑이 눈에 보임으로써 비로소 파리에 있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그것도 왠 뜬금없는 낭만적 존재감? (p. 112)
재이는 이런저런 일로 근근이 생활을 꾸려야 한다. 모든 것이 생존모드다. 8년전 파리에서 시작은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키스하는 연인들 사진을 찍는 중이다. 파리에서 키스를 부를 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검색하다가 '낭만적 삶의 박물관' 이라는 곳을 알게 된다.
낭만적 삶의 박물관이라니. 도대체 낭만의 삶이란 뭐야? 그 박물관에는 낭만적 삶을 죄다 수집해서 진열하고 있는 걸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세기의 낭만적 커플이었던 작곡가 쇼팽과 작가 조르주 상드의 유품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더 유명했다. (p. 120)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손을 본떠 조각한 작품을 보니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 조각작품처럼 기다랗고 하얀 손을 가졌던 남자가 생각난다. 그리고 키스의 사처도.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낭만을 파괴당했던 기억.
재이는 아파트를 나와 강변도로를 걸어 미라보 다리로 향했다. 가을이 깊어가는지 바닥에 떨어져 뒤구는 플라타너스 낙엽이 꼭 썩은 손처럼 보였다. 우울하게 안개비가 내리는 전형적인 파리 날씨다. 재이는 진봉에게 이렇게 물어볼 작정이다. 아직도 로맨티시스트야? (p. 141)
낭만은 무슨 얼어죽을. 낭만이 밥먹여주냐 하며 재이는 살았지만, 재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낭만적 삶의 박물관' 에 가보고 싶어지는 걸 보면, 파리에 낭만이 있기는 있는 것 같기도. ㅎㅎ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은 한 여자의 독백이다. 대학때 만나 선배를 형이라 부르던 그대로 부부가 되어 늙어서도 형이라 부르는 부부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신선했다.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뜨고 아내는 함께 가려했던 쿠바에 혼자 여행을 떠난다. 남편이 남긴 유품을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그 겨울은 어찌나 눈도 자주 오고 추웠던지. 봄엔 꽃무늬 조각보, 여름엔 초록 조각보 였던 땅의 풍경이 군데군데 눈 녹아 더럽고 때 탄 무명 조각보처럼 보이는 게 안타까웠어요. (p. 147)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없는 곳, 쿠바에서 수현이 알게 된 진실은 한국땅에서 봤던 더럽고 때 탄 무명 조각보 같은 것이었다.
파라다이스 빔이라고요? 내게 그 말을 가르쳐준 건 당신이었어요. 마시란 해변의 낙조를 바라보며 형이 묻곤 했잖아요. 좋아? 응, 좋아! 내가 대답했고, 얼마만큼? 천국처럼? 형이 또 물었죠. 내가 금방 대답을 못하면 당신이 말했죠. 생에서 만나는 이런 빛나는 순간을 파라다이스 빔 이라고 한대. 수현아.(p.182)
쿠바에서 돌아온 후 강민수 없는 한수현은 잘 지내고 있다. 지금은.
혼자라도 행복하다 가 아니라 혼자라서 더 행복하다고 깨닫고 있다. 지금은.
그리고 이제 뒤늦게라고 유품을 전달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파라다이스 빔을 알려주었던 그 사람에게.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대를 잇는 모녀의 불행을 다루면서도 왠지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은 느낌적인 느낌을 준다.
돈 많은 일해과 비교당하는 가난한 모녀의 신세. 여행을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눈치만 보며 주눅 든 엄마를 볼 때마다 조롱당하는 기분. 가난이 익숙해서 두렵지는 않지만... 그건 냄새나는 낡은 신발 같은 것. 어쩔 수 없이 신고 다니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쾌적하고 디자인도 예쁜 새 신발을 신고 싶은 욕망. 서은은 자신 안에서 자라는 욕망의 싹을 냉정하게 자를 수 없었다. 오늘도 새벽이 되도록 노트북 앞에 앉아서 커서만 바라보았다. (p. 218)
친구의 부탁으로 우연히 가게된 미국세미나. 미국에 간 김에 하기로 한 여행. 서연(딸) 과 현주(엄마) 는 서로 다른 생각으로 여행지에서 서걱거리지만 곧 알게 된다. 같은 상처를 갖게 됐다는 것. 서연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진실을 알게 된 현주의 선택이 어두운 현실을 밝혀주는 것인지 현실성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도 응원하고 싶다. 서연은 미투를 하게 될런지.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에서 말하는 카이로스는 아마도 기회나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고대그리스의 신을 말하는 듯 하다. 기회의 머리카락이라... 기회를 움켜 잡았다는 것일까 잡지 못했다는 것일까.
로크룸섬의 누드비치를 지날 때였다. 갯바위에 누워 선탠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벌거숭이들이 언뜻 군집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일행들은 누드 남녀들을 찍으려고 모두 뱃전으로 몰려 난리법석을 떨었다. 찍은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보며 노골적으로 품평을 하는 나이 든 남녀들의 모습이야말로 노골적으로 옷을 입은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p. 240)
결혼25주년을 기념하며 12박13일의 발칸 9개국 여행이라는 패키지 여행을 간 부부는 함께 여행간 사람들의 면면 들을 통해 여행의 피곤함과 여행의 신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부부끼리 온 3커플의 관계는 비슷한 연배에서 나눌법한 대화들로 자신들이 어떤 기회를 잡아오며 살았는지 되뇌이게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좋았던 부분은 이 커플이 사는 법이었다.
'따로 또 같이' 이것이 그들 부부의 공존 스타일이다. 돈독하게 우정을 나누는 오랜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사업 동반자처럼, 애증과 연민이 공존하는 모자처럼 그들의 삶은 공동운명체로서 그럭저럭 굴러가는 듯 했다. 그 거리감이 깨질때, 오히려 더 가까워질수록 문제가 생긴다. 여행이 위험한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p. 265)
그래서 여행은 아무나하고 같이 가면 안된다. ㅎㅎ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 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앞선 작품들은 다 여행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장소도 다 외국이었는데, 이 작품만 그렇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다른 소설집을 낼때 묶었어야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굳이 인생을 여행으로 비유하자면 못 엮을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인생에서, 그는 실패에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희망은 헛되어 보이고, 그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p. 293)
한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나 싶으면서도 그런 인생들이 있다. 그런 인생들은 단 한번의 실패에 바로 무너져 내린다. 그들에게 그런 인생은 여행같은 것이었을까? 마음먹으면 떠날수 있는?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말에서 편안하게 속을 드러내는 작가도 있고 넘치는 의욕을 내뿜는 작가도 있는 반면 작가의 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 소설집의 저자는 후자 쪽이다.
작가가 제일 쓰기 싫은 글이 책 말미에 붙은 '작가의 말' 이다. 작품으로 말하면 되었지, 사족이란 생각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우주에서 한세상을 생생하게 살았던 이야기를 인간 세상으로 내보내며, 나는 책의 운명을 속으로만 잠깐 빌어줄 뿐이다. 책도 인생처럼 나름대로 생로병사를 겪을 거고, 비문을 새기는 건 어쩌면 독자들의 몫이기에. (p. 330)
하지만 나는 '작가들의 말' 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쓸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계기로 쓰게 됐는지 알고 싶고 궁금하다. 내가 읽은 느낌과 작가의 마음이 같을 수 없다. 같아지려고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더욱 온전히 느끼기 위해 나는 때로 작가의 말이 필요하다. 작품속에서 내가 읽어내지 못했던 작가의 생각을 콕 집어 이야기해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작가들은 너무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넘기곤 한다.
표지속 여인은 누구였을까
쿠바의 베로니카도 모니카도 아니고, 파리의 재이도 아니고, 영종도의 수현도 아니고, 플로리다의 서연이나 현주도 아니고, 발칸반도의 이복순도 아니고, 원룸의 이름없는 여자도 아닌것 같은데, 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여하튼 저 여인은 여행을 떠나는 자가 아니라 돌아온 자다. 선글라스를 낀 뒷모습에서 저 여인이 정면에 마주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여행지가 아니라.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누군가는 이 책을 보고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고 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그렇게 나는다시돌아온, 꽤 괜찮은 작가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