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 파란만장, 근대 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
김소연 지음 / 효형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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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근대 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

그들이 자신으로 살기까지 그리고 그 자신이 이름이 되기까지

 

오래전 신여성에 관한 글을 읽다가 눈에 번쩍 들어온 구절이 있다. "미치거나 죽거나"

글쓴이는 신여성의 운명을 그렇게 단칼로 표현했다.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100여 년 전 신여성의 대명사로 통한 그들은 여성의 인격과 개성을 화두로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결국 '미치거나 죽거나' 했던 그들. 그때 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신여성은 어땠을까? 이를테면 그들을 자유주의 신여성이라고 할 때 사회주의 신여성 허정숙, 주세죽이나 개신교 민족주의 신여성 김마리아, 김필례는? 의문은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던가. 나라가 무너지고 전통적인 경제 기반과 신분 질서가 흔들렸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전통적인 경제 기반과 신분 질서가 흔들렸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이쪽은 신여성, 저쪽은 구여성으로 흑백처럼 선명한 구분이 가능했을까... 그러다 한참을 잊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 '건축과 젠더' 에 관한 글을 제안받고 나서 불현듯 떠오른 것이 다시금, '미치거나 죽거나' 홀린듯 나는 원래 의도와 달리 옆길로 새고 말았다. (프롤로그 中)

 

저자의 소개글이 짧아서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건축과 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글을 청탁받고 예전에 가졌던 의문이 떠올라 자료를 찾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옆길로 샛다고 말했지만 이 책은 나름 '공간' 과 '건축' 을 기초로 두고 그 위에 당시 여성의 삶을 소설형식을 빌어 재구성한 책이었다. 소설인듯 아닌듯 술술 읽혀지는 내용속에 등장하는 여성마다 생애가 하도 사연이 많아서 삶 자체가 그냥 소설같기도 했다.

space #1 이화학당 woman #1 메리 스크랜턴 - 사람대접을 받게 해주고 싶어요

1885년 스크랜턴 가족과 아펜젤러 부부는 뉴욕을 출발하여 조선을 향한다. 여성 해외 선교회가 조선 여성을 주목하게 되면서 처음 출발한 선교단 이었다. 여성을 중심에 둔 선교를 목적으로 했던 스크랜턴은 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을 모집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시도끝에 고종에게서 이화학당 이라는 여학교 이름을 하사받은 이후에야 학생이 늘기 시작했고 이후 걸출한 여성 선각자를 다수 배출하게 된다. 하란사, 여메례, 박에스더 등 여성운동과 여성의학에 있어서 굵직한 인물들이 후처, 청상과부, 버려진 딸에서 교육자, 의사 등 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space #2 보구여관 woman #2 로제타 셔우드 홀 & 박에스더 - 여성이 여성에게 의술을 전한다

조혼 풍습때문에 여학생을 구하기 어려웠던 여학교에 비해서 여성의료원은 초기 오해를 딛고 이용자가 급격히 늘었다. 여성의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교단에서 파견된 여성의사 로제타를 돕던 이화학당 학생 김점동은 이화학당 구내에 준비된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여의사의 꿈을 키웠다. 당시의 병원은 전도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병원에 오기 전에는 신앙이 없던 사람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는 신앙인이 되어 돌아갔다. 작은 병원을 통해 신자가 많아지면 그 병원을 헐고 큰 서양식 병원과 예배당을 세우는 의료 선교였다. 김점동에서 박에스더가 되기까지 미국에서 아이도 잃고 남편도 잃고 병까지 얻어가며 마침내 의사가 되었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이자 후배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었다.

space #3 상동교회 woman #3 차마리사 -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1893년 남대문 시약소 예배처소는 상동교회로 승격되었지만 초기 신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이화학당을 후임 여선교사에게 물려준 스크랜턴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남대문 시병원을 세우고 여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매일여학교와 전도부인 양성학원도 만들었다. 상동교회는 당시 최대규모의 신자가 예배 볼 수 있는 교회건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힘들게 살았던 한 여성이 상동교회를 나가며 여성운동가 차미리사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난한 여성에게 복음을, 포로된 여성에게 해방을, 억눌린 여성에게 자유를, 고통 받는 여성에게 평안을' 차미리사는 청상과부 섭섭이의 삶을 살았기에 신여성보다 구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모든 섭섭이들이 교육으로 눈을 뜨고 자립할 직업을 가져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어렵게 유학하며 목격했던 외국생활에서 인종차별과 선교사의 우월의식과 차별적 언사를 본 경험은 주체성과 자립정신을 강조한 여성운동을 앞장서 이끌게 했다.

space #4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양성소 woman #4 정종명 -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과 단결을 주장하오

보구여관은 감리교, 세브란스병원은 장로교로 교파는 달랐지만 전문성과 넓은 경험을 위하여 수업과 임상 실험, 수술실 등을 공유했는데, 1903년 보구여관이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한 후 1906년 세브란스병원도 간호부 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회 졸업생은 김배세 단 한명이었는데,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의 동생이었다. 1917년 정종명이 간호부 양성소에 입학했을 때 아들하나를 둔 지독하게 가난한 스물두살의 청상과부였다. 3.1운동때 간호부 양성소 학생이었던 정종명은 투옥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사회운동의 의지는 강해져갔다. 졸업후 산파 면허를 딴 후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192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말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space #5 조선일보 & 동아일보 woman #5 최은희 & 허정숙 - 당당해야 삶이 바뀐다

이광수의 추천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조선일보에 발탁된 최은희 여성의 교육과 권리 등에 대한 다수의 기사를 썼으나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지식인들이 친일의 행보를 선택할때 사회활동을 접고 잠적한다. 동아일보에 발탁되기 전부터 유명했던 여성 논객 허정숙은 자유연애로 인한 이슈메이커였으나 개의치 않고 혁명가의 길을 걸어갔다.

space #6 조지아백화점 & 화신백화점 woman #6 송계월 & 임형선 - 내 밥벌이는 내 손으로

북촌에는 한국인 사업가의 백화점 화신백화점이 남촌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조지아백화점을 비롯한 여러개의 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은 휘황찬란한 신천지였고 그 안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고학력에 외모가 출중해야 했지만, 그렇게 일하는 현실은 엘리베이터걸 데파트걸 로서 성희롱과 노동력 착취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많은 여성들에겐 꿈의 직장이었다. 데파트걸에서 신여성 이라는 잡지의 기자가 된 송계월은 여성해방이론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전개해 나갔다. 학업에 대한 열정은 넘쳤으나 가난에 발목이잡혔을때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선생님이 소개시켜준 곳이 화신백화점 내 미용부였다. 기술은 역시 밥벌이를 가능케 했다.

space #7 평원고무공장 & 대동방적공장 woman #7 강주룡 & 강경애 - 죽을 각오로 싸운다

1931년 5월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은 을밀대 용마루로 올라갔다. 열악한 환경의 여공들의 처우를 알리고 임금 삭감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벌인 첫 고공농성은 '체공녀 강주룡' 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1934년 8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인간문제는 강경애가 자신의 험난했던 경험들을 토대로 쓸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당시 작가들이 지식인은 노동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와 선구자의 이미지로 그린데 반해 강경애의 소설속 지식인은 전향자였다. 현실속에서 볼수 있었던. 죽을 각오로 싸웠음에도 강주룡의 외침은 통하지 않았고 강경애의 소설은 주목받지 못했다.

소설이 뚝 끊겼다 싶게 맺어진 마무리 뒤에 '그후, 그 장소, 그 사람' 이라는 글로 각각의 장소들과 주인공들이 이후에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짧게 요약해 준다. 그런데 이 요약은 소설처럼 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운이 있다. 아마도 앞서 읽은 파란만장한 삶들이 마지막마저 해피엔딩은 없어서였을까...

이 책은 100여 년 전 전통 사회가 강요했던 삶을 떨치고 일어난 여성들과 그들에게 새 삶을 열어준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다룬 여학교, 여성 병원, 간호원 양성소, 교회, 신문사, 백화점, 공장 등은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을 사회적인 존재로 나아가게 했던 공간이다. 이제는 남녀공학이 대부분이며 교회든 어디든 남녀를 구분하는 출입문이나 가림막은 없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벽과 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예저에는 두꺼운 콘크리트처럼 실체가 보였지만, 지금은 투명한 유리처럼 실체가 잘 안 보인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성이 장벽을 돌파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 여성들이 스스로 남성화하여 전투력을 높였다면, 요즘은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고 '나답게' 를 외치며 연대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진보는 언제나 반동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이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이다. 하루아침에 뒤집어지는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일상을 바구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는 오랜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설령 잠시 멈추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자.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으면 한 달을 포기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일년, 십년...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삶이 된다. 인생이란 원래 숱한 실패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결국은 너나 차별 없이 서로 존중하며 인간답게 살자는 문제가 아닌가. (에필로그 中)

공간에서의 여성 점유율은 어쩌면 여권 확대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다. 어떤 공간에 갇혀 있느냐 나오느냐 부터 자기만의 공간이 생기기까지 여성의 활동에서 공간의 의미는 남성보다 뭔가가 더 있는 느낌이다. 백년 전에 두드러진 여성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간 여성들은 얼마나 됐을까... 그들은 미치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냈을까... 지금은 과연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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