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 국선변호사 세상과 사람을 보다
정혜진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법과 현실 사이에서 변방에 선 이들을 변호한다는 것

국선변호사 세상과 사람을 보다



저자는 국선전담변호사 이다. 기자로 15년 일하다가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하던 2009년에 법공부를 시작하여 졸업 후 서울고등법원 재판연구원을 거쳐 수원지방법원에서 6년째 일하고 있다. 기자로 오래 일했던 경력이 있어서인지 이야기 풀어내는 솜씨가 자연스럽다. 그냥 국선변호사도 아니고 국선전담변호사 로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들이기도 하다.


국선전담변호사는 국선 사건만 하도록 각극 법원장이 위촉하는 변호사로, 원칙적으로 일반 사건을 수임할 수 없다는 게 일반 국선변호사와 다르다고 한다. 이 직업은 2004년에 생겼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 자격증만 있으면 사건이 굴러들어오던 때라 국선 사건은 변호사들이 당번처럼 돌아가며 담당하다보니 변론을 무성의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피고인 사건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가 위태롭게 되자 대법원은 국가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주면서 국선변호만 전담하는 변호사를 따로 선발하기로 했고, 2006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 이 제도는 그 도입 취지에 걸맞게 국선변론의 수준을 대폭 올렸다고 한다. 이 제도가 어느정도 정착되었을 시기인 2014년 저자는 국선전담변호사가 되었다.


이 직업은 국가에서 월급을 받지만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상대로 서는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당사자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 덕분에 당사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취했다. 이 '이중적 독립성'이 변론의 수준을 높인 핵심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선변호인으로 일할 때는 객관적으로 유죄가 확실해 보이는 사건이라도 받은 돈(수임료)때문에 자백을 권유하기가 어렵고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할 때가 많았는데, 국선전담변호사는 법률 전문가로서 냉정하게 수사 기록을 평가한 의견을 피고인에게 먼저 말해주고 그 의견을 기초로 재판 진행에 관해 논의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었다.(사선변호인이 의뢰인에게 다 휘둘린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선변호인은 국선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당사자와 소통하며 사건을 연구하기에 변론의 수준이 국선보다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p. 5)


국선변호사 라는 말을 들으면, 몇몇 영화들이 각인시켜 놓은 마지못해 하는 봉사 수준의 변론이 예상됐었다.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 국선변호사에게 매달려보지만 국선변호사는 그야말로 해도되고 안해도되는 일이다 보니 마지못해 그냥 대충 뭐 그런...

그런데 국선전담변호사는 좀 다를 것 같긴 하다. 변호인이지만 유죄가 확실할 경우 형량을 감형받을 수 있도록 자백을 권유할 수 있기도 하고 무죄가 확실할 경우 제대로 된 변론준비를 할 수 있기도 하고... 물론 전담받는 사건수가 워낙 많다보니 시간상 한 사건 분석에 많은 연구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봉사수준에서 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법학전문대학원 이 생겼기에 가능한 직업이 아닌가 싶다. 몇년을 고시공부하던 사람이 변호사가 됐을때 과연 국선전담을 하려고 했을까?


국선전담변호사가 맡는 사건들은 절차상 변호인없이 재판할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인데, 피고인이 사선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을 때 재판장이 국선전담변호사를 지정해준다. 거의가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피고인인 경우가 많지만, 사선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는 제도 이기에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젊었을 때 사고로 뇌를 다쳐 7살의 지능을 갖게 된 남자가 시설 안에서 조현병 환자와 싸우다 상대방이 사망하는 사건에서 그남자가 저자와 동갑이라는 것을 알고 저자가 살아온 만큼 그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그 세월에 무감할 수가 없었고,

마약중독으로 구속수감된 남자의 변호인으로서 알코올중독자 엄마의 폭력아래 신음하며 아빠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편지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성희롱 문자를 보낸 노인의 변호인으로 유순하고 무지한 노인의 말을 믿었다가 거짓임을 알았을때 분노했지만 치매로 인한 증상이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치매걸린 노모를 생각하며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기억할 수 있던 때를 그리워 하기도 한다.


끔찍한 성장기를 거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구속된 사이 조폭이 된 아들의 폭력사건, 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대대로 선택하는 징역살이, 북한에서 어렵게 탈출해 왔으나 알콜중독에 빠진 청년, 아이를 버린 미혼모대신 아기의 출생신고를 해주던 일 등 저자가 말하는 사건들은 정말 어쩔수 없는 범죄자의 길이 사회 도처에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사연들이었다.


저자는 일명 '장발장법' 헌법소원 위헌판결로 유명해진 국선변호사이기도 하다. 단순절도와 특가절도의 가중처벌의 위헌성을 인정받은 사건은 분명 훌륭한 일이었지만 저자는 많은 우연이 합쳐져 자신을 찾아온것이라고 말하면서 '재심'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를 한다. 어찌되었건저찌되었건 장발장법의 폐지는 박수받아야 할 일이다.


그 무렵 조현병 증상을 가진 이가 환청이나 망상에 사로잡혀 저지른 끔찍한 범죄 소식이 잇따랐다. 사람들은 저렇게 위험한 환자를 왜 사회에 방치하느냐고, 강제입원을 시켜서 사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있는 정신질환자들을 국가는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가족조차 그들의 폭력이 무서워서 혹은 평생 짊어져야 할 그 짐이 너무 무거워서 도망갔다. 긴 세월 버려지고 방치된 그들의 증상은 계속 나빠졌다. (p. 125)

그에게 왜 술을 끊지 못하느냐고 비난하며 더 엄격하게 처벌한들 술을 부르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그의 재범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상처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범죄가 해결될 수 없는 사람을 두고도 우린 범죄만 보고 있다. (p. 139)


조현병이나 마약중독, 알콜중독등 중독환자들은 필요에 따라 재판시 정신감정을 받고 치료감호 명령을 받기도 한다. 치료감호소는 범죄자의 정신건강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향후 사회 복귀 시 재범을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로 세워진 교도소 병원인데, 여러 여건상 인력 및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클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한다. 정신건강보건법은 입원환자 60명당 정신과 의사 한 명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치료감호소에서는 정신과 의사 한 명당 맡은 환자 수가 135.75명이니 치료는 커녕 인권침해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는 곳이다. 그나마 그런 치료감호소 마저 퇴소하고 사회에 다시 나오면 상담받으러 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저지르는 재범... 악순환...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가 많기는 하지만, 꼭 그런 계층이 아닌데도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국선전담변호사라는 직업의 특징 같달까? 그런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저자가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소통' 의 중요성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저자의 조언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저자는 그들에게 좋은 국선이 되기도 하고 나쁜 국선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그저 객관적이고자 할 뿐인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저자는 자신의 부끄러웠던 경험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처럼, 자신이 소홀했던 일들에 대해 자신이 잘못한 거라고 그때의 부끄러움은 두고두고 약이 되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실수를 드러내고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런면에서 박수 ㅎㅎ


국선변호는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비용이다. 형편이 되는데도 변호인을 굳이 선임하지 않는 이들에게 국선변호인을 붙여주는 건 공동의 비용을 늘리는 일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분명 '빈곤 기타 사유' 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지 법원에서 좀 더 엄격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p. 261)


저자가 국선변호를 했던 사건의 피의자 중에는 사업가, 대학교수, 유력집안 부인 등 부유층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은근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국선변호인에게 사건변론을 의뢰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직업상 그들의 변론을 해주긴 하지만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저자의 뼈있는 한마디가 제도의 공정성을 위해 저~위에 좀 들렸으면 좋겠다.


경찰의 '채증' 활동에 대한 것도 처음 알았는데, 시위가 있을때 '채증' 활동원들이 시민들의 사진을 찍고 프로그램을 통해 SNS를 뒤져서 그 시민을 찾아내 죄를 구형한다는 것이 참 너무 어이없었다. 합법적으로 신고된 시위에 나갔는데, 그 수천수만명을 어떻게든 한사람이라도 더 찾아내서 교통방해죄로 기소를 한다는 것이 거참... 그래도 과거에 비해 무죄로 판결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니 다행이긴 한데, 그런 경험을 한 시민들이 과연 국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를 좀 저~위에 있는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선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작고 분절된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만, 우리들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은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내 그 안에서 우리 사회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경계를 조금씩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p. 274)


저자는 늘 새로운 사건을 만난다. 비슷한듯 다른 그 사건들은 작고 분절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매달 새로운 사건을 25건 내외로 배당받는 시간 속에서 눈코뜰새 없이 바쁠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의뢰인과 변호사로서의 관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재판이 있는 동안 잠깐 만났다가 재판이 끝나면 대부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기억하고 사건들을 기록한다. 그렇게 분절된 듯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흐름이 자신을 지나 독자에게 흐르고 사회에 흐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도 그 흐름속에 이야기의 힘을 믿고 싶다. 세상과 사람이 연결되는 이야기의 힘이 어떻게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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