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변호사 라는 말을 들으면, 몇몇 영화들이 각인시켜 놓은 마지못해 하는 봉사 수준의 변론이 예상됐었다.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 국선변호사에게 매달려보지만 국선변호사는 그야말로 해도되고 안해도되는 일이다 보니 마지못해 그냥 대충 뭐 그런...
그런데 국선전담변호사는 좀 다를 것 같긴 하다. 변호인이지만 유죄가 확실할 경우 형량을 감형받을 수 있도록 자백을 권유할 수 있기도 하고 무죄가 확실할 경우 제대로 된 변론준비를 할 수 있기도 하고... 물론 전담받는 사건수가 워낙 많다보니 시간상 한 사건 분석에 많은 연구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봉사수준에서 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법학전문대학원 이 생겼기에 가능한 직업이 아닌가 싶다. 몇년을 고시공부하던 사람이 변호사가 됐을때 과연 국선전담을 하려고 했을까?
국선전담변호사가 맡는 사건들은 절차상 변호인없이 재판할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인데, 피고인이 사선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을 때 재판장이 국선전담변호사를 지정해준다. 거의가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피고인인 경우가 많지만, 사선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는 제도 이기에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젊었을 때 사고로 뇌를 다쳐 7살의 지능을 갖게 된 남자가 시설 안에서 조현병 환자와 싸우다 상대방이 사망하는 사건에서 그남자가 저자와 동갑이라는 것을 알고 저자가 살아온 만큼 그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그 세월에 무감할 수가 없었고,
마약중독으로 구속수감된 남자의 변호인으로서 알코올중독자 엄마의 폭력아래 신음하며 아빠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편지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성희롱 문자를 보낸 노인의 변호인으로 유순하고 무지한 노인의 말을 믿었다가 거짓임을 알았을때 분노했지만 치매로 인한 증상이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치매걸린 노모를 생각하며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기억할 수 있던 때를 그리워 하기도 한다.
끔찍한 성장기를 거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구속된 사이 조폭이 된 아들의 폭력사건, 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대대로 선택하는 징역살이, 북한에서 어렵게 탈출해 왔으나 알콜중독에 빠진 청년, 아이를 버린 미혼모대신 아기의 출생신고를 해주던 일 등 저자가 말하는 사건들은 정말 어쩔수 없는 범죄자의 길이 사회 도처에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사연들이었다.
저자는 일명 '장발장법' 헌법소원 위헌판결로 유명해진 국선변호사이기도 하다. 단순절도와 특가절도의 가중처벌의 위헌성을 인정받은 사건은 분명 훌륭한 일이었지만 저자는 많은 우연이 합쳐져 자신을 찾아온것이라고 말하면서 '재심'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를 한다. 어찌되었건저찌되었건 장발장법의 폐지는 박수받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