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행방 새소설 3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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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볼 수 있는 안테나이자 안내자인

신비한 나뭇가지 '반'이 마주친 무수한 손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들에 대한 단단한 응시

우리 모두가 기억하게 될, 슬픔에 대한 묵직한 기록

 

 

자음과 모음 <새소설> 시리즈의 3번째 책인 이 작품은, 현재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 라는 점에서 창작과 비평의 <소설Q> 시리즈와 대비된다. 소설Q 시리즈 또한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 이라는 기치아래 젊은 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경장편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작은 크기의 하드커버라는 외적인 모습도 비슷한데, 국내 소설 출판의 쌍두마차격인 두 곳에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내주고 있으니 독자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작가는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 만들어진 죽음에 대해 쓰고자 했다고 한다. 인재가 불러온 참사가 어디 한두건이었나... 저자가 고3때 뉴스로 접했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죽음들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지만 눈돌리지 못하도록 저자는 읽는이의 시선을 단단이 고정시킨다.

지워진 것에는 지워질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사라진 기억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p. 8)

주혁에겐 근래 십오년간의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마지못해 살아있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을 존중해주기 위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 끊긴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그 연결이 두려울뿐... 그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속에 어느날 주혁의 손에 나뭇가지 하나가 들려온다. 그런데 이 나뭇가지가 예사롭지 않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누나의 집에서 이상하게 생긴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누나는 정리정돈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 적절치 못한 형태로 놓인 물건들이 수도 없었다. 부모는 그런 누나를 평생에 걸쳐 한심해했다. 부모가 누나에게서 손을 떼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어린 시절에는 누나의 가방과 서랍 속을, 누나가 성장함에 따라 옷장과 방과 학교생활을 차례로 포기해나가는 식이었다. 누나가 성인이 되자 부모는 그녀의 이력과 인생 전체를 포기했다. 누나는 꾸준히 엉망이었고 부모는 일관성 있게 냉정했다. (p. 27)

소설에서 누나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주 드물다. 그런데 이 부분, 누나에 대한 서술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꾸준히 포기해나간다는 것... 그게 대체 어떤 걸까...

벌써부터 몸이 시렸다. 전단지를 받기 싫어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는 사람들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상인들, 혹시 아이가 지나쳐 간 건 아닐까 온몸이 송곳처럼 예민해지는 순간들을 다시금 견뎌야 했다. 아이가 사라진 뒤 우철과 그의 아내는 너무 쉽게 무시당했고 너무 자주 조롱당했고 이 모든 걸 너무 오래 견뎌왔다. (p. 58)

우연찮게 신점을 봐주게 된 주혁은 열여덟살 딸이 가출하고 5년째 찾아해매는 부부를 만난다.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때 누군가의 죽음이...

매일 야근을 강요당해도 괜찮았습니다. 직장인 대부분이 그러고 사니까요. 오히려 집에 전화를 걸어 야근이야, 라고 말할 때의 온당한 피로감이 좋았습니다. 제가 비로소 사회인이 된 것 같은, 사회 중심축의 절묘한 조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p. 82)

물론 알고 있습니다. 주연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선의로 가득 찬 사람이죠. 저를 위해서 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더 괴로웠습니다. 다 포기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열일 제쳐두고 저를 위해 뛰고 있는 주연 누나가 원망스러울 때마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인간인지 깨달았니까요. (p. 94)

지독한 선의로 무장한 그 입을 영원히 막아버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다 너를 위한 행동이었따고 말하는 그 혀를 잘라버릴 수만 있다면. (p. 96)

 

직장내 성희롱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된 강연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고 싶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동료의 선의아닌 선의로 어느순간 성희롱 피해자로 둔갑되 있는 자신의 존재가 버거워졌다. 주혁에게 찾아왔을때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대답에 오히려 절망한다...

어린애가 태어나. 작고 귀중하지만 아직은 쓸모없지. 어린애는 아주 사소한 점 같은 거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점. 어른들이 그 점을 이어서 선을 만들지. 대개는 부모가 하는데, 형편없는 부모는 비뚤어진 선을 그어 (p. 109)

사실 선이라는 게 원래 그래. 삐죽빼죽하고 아무 데나 부딪히고 구부러지거나 부러지기도 쉽고, 다 나름대로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거지. 팔뚝에 힘이 붙으면 애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선을 몇 개든 그려낼 수 있어. 그럼 어엿한 면이 되는 거지. (p. 110)

면은 선보다 크고 넓지만 불안정한건 마찬가지지. 그럼 또 미숙한 단면인 채로 이리저리 부대끼는 거야. 입체감이 생길 때까지. 원뿔이 되거나 정육면체가 되거나 구가 되거나 할때까지. (p. 110)

도형. 삼십대엔 입체도형을 하나 갖게 돼. 근데 그게 참 보잘것없거든. 가까스로 세워놔도 쉽게 찌부러지는 애물단지지. 그래도 노력해온 게 있으니 다들 그걸 지키고 싶어 해. 인간으로서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봐야지. 지킬 게 생기면 인간은 끈질겨지거든. (p. 111)

사십대엔 말이야.... 입체도형 안에 자기가 원하는 걸 넣을 수 있지. 가족이나 직장처럼 구체적인 것도, 의지나 희망처럼 추상적인 것도 전부. 도형안엔 가장 소중한 걸 넣어야 해. 그래야 여생 동안 그걸 지키면서 도형을 늘려나갈 수 있거든.

그런데, 어떤 인간은 도형을 망가뜨리고 말아. 터지고 납작해진 것을 움켜쥐고 죽을 때까지 살기도 해. 자신의 도형뿐 아니라 타인의 도형까지 짓밟고 망가뜨리면서 죽지도 않고 뻔뻔하게 살아. (p. 112)

 

태어나선 점이었다가, 십대엔 선이었다가, 이십대엔 면이 되고, 삼십대엔 입체도형을 만들고, 사십대에 그 입체도형안에 소중한 것을 채워넣기 시작하지만, 모든 인간이 다 그 입체도형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비유가 멋지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도형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도형 자체도 없다는 주혁의 독백이 소중한 것을 잃은 채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속내를 숨기며 내뱉는 한숨처럼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열한 명의 아이들을 불러 괴롭힘을 책망하는 일은 별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괴롭힘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른의 것이었다. 아이들은 영주가 지적한 다음에야 자신들의 행동이 괴롭힘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정의되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에 더 몰두한다. 아이들은 당연히 괴롭힘의 이유를 아이에게서 찾으려 할 테고, 이후 벌어질 일은 불 보둣 뻔했다. (p. 118)

새로 이사간 곳 유치원에서 기존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여섯살 딸을 위해 주혁의 아내인 영주는 아이들의 엄마들을 포섭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기존 엄마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욕심나는 사람이거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편리한 사람이라도 되고자 바쁘게 움직였고 그런 영주를 주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1박2일의 캠프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등떠밀어 보냈다. 그런데...

동생은 늘 남들보다 한마디가 많은 사람이었다. 해원은 동생을 떠올릴 때마다 동생의 얼굴보다 저 문장이 먼저 떠오르는 게 못내 아쉬웠다. (p. 147)

무리 안에 포함되는 것. 모두와 같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 어른이 되는 과정은 그처럼 간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원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P. 156)

 

해원의 동생은 해원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땐 미술특별활동 시간에 미술대회 나가는 아이들에게만 신경쓰는 미술선생님한테 항의하고, 해양단 학생단체에서 6학년 조장이 역할을 잘 못한다고 4학일때 조장을 맡는가 하면, 고등학교땐 전교1등에게 몰아주는 수행평가결과에 시위를 하고, 대학교땐 모피입지말자며 대학로에서 나체시위를 했다. 간호사로 첫 출근한 직장에서 병원비리와 선배간호사들의 태움을 내부고발하여 쫒겨나고 겨우겨우 취직한 요양병원에서도 내부비리를 캐내다 화재사고로 목숨을 잃는데 화재범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해원은 동생을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늘 말했다. 그런데 동생의 죽음이후 해원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동생이 화재범이 아니라 불법감금되 있던 환자를 구하다 죽었다는 주혁의 말을 듣고 더이상 동생의 말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길 위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장소인 길 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황량하고 쓸쓸한,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없는 형벌의 장소로. (p. 171)

그래선 안 됐다. 주혁은 깨끗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밝은 곳도 평평한 곳도 싫었다. 주혁은 거친 길 더러운 길만을 골라 거리를 떠돌았다. 더 불편하고 더 지저분한 곳, 더 끔찍한 곳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p. 186)

 

본의아니게 신점을 봐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지독한 죽음들이다... 그 지독함을 벗어나지 못해 자신을 내몰고 있던 주혁의 시간들도 처절하기 그지 없었다. 무심코 알려준 아기의 죽음을 겪은 서연의 동생 주경에게 주혁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존재였다. 이혼으로 버려진 집에서 아빠의 알콜중독과 폭력에 내몰렸던 시간에서 구해주고 키워준 누나 서연의 상처를 그렇게 무심히 말해준 주혁으로 인해 주경은 서연을 잃을뻔 했다. 그리고 그런 주경이 찾아온날 그런 주경의 주먹을 받으며 주혁은 그냥 그렇게 끝나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한테서는 뭐가 보였어? - 아저씨요? 별로요 - 별로? -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아저씬 그냥 파랗던데요. (p. 103)

십오년만에 아내였던 영주를 만나기로 결심하고 주혁이 간 곳은 제주도로 출발하는 배를 기다리는 인천의 선착장... 책의 중간에 나왔던 파랗고 파랬던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당연스레 연상이 되어서 마음아팠다...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은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벚꽃향이 지독한 사월이었다" 로 시작한다. 그 사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당연스레 알게되는 것이 정말 지독히도 끝까지 죽음을 응시하게 만들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 설명해두고 싶은 게 있다. 죽음에는 본디 독립된 형체가 없다. 죽음은 세상 모든 것의 이면이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형태도 갖지 못한다. 무언가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숨소리 하나 걸칠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스럽지도, 불가사의하지도 않다. 사신이라니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죽음은 일종의 결과값이고, 그것은 논리의 영역이지 신의 영역이 아니다. ... 죽음은 형체도 근원도 없으므로 막아설 수도, 밀어낼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을 불러내는 자들이 있다. (p. 220)

죽음을 불러내는 자들.... 그들은 인간이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들어진 죽음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그 죽음을 누가 만들었는지 등장하지 않은 원인제공자들이 누구인지 알게 한다. 작품속에 나오는 죽음들은 우리가 몰랐던 죽음들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은 죽음들이다. 가정내의 문제, 이웃과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 원인제공자들의 시작은 무심하고 소소한 행동들이었다.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행동들이었다고 말한다면 저자는 되물을 것이다. 정말 몰랐냐고. 그렇게 소설속에서 내내 묻고 있었다. 이 죽음들을 정말 계속 모른채 할 것이냐고.

<새소설> 시리즈로 알게된 작가였는데, 기억에 남는 수작이었다. 앞으로의 작품들도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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