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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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여러모로 스티븐 킹 답지 않은 작품이다.

짧은 편이고 범죄 스릴러도 아니고 빨리 해결을 하고 싶은 빨리 끝을 보고 싶은 긴박함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스티븐 킹 다운 소설이기도 하다.

짧은 내용이기에 더 단숨에 읽어가게 하는 몰입력과 끝이 다가올수록 끝이 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반대적 긴박감이란 스티븐 킹 같은 대작가의 능수능란함이 없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47년생의 우리나라 나이로 일흔세가 넘은 어르신이 그 어떤 편협함도 갖지 않고 인간애와 인류애를 보편개념으로 인식하고 계시다는게 존경스러웠다.

여름에 읽었던 '아웃사이더' 에서 미국내의 진통제 중독으로 인한 마약중독에 대해 거침없이 표현했던 부분들을 기억한다.

길게 이어지는 작품목록에서 어떻게 그토록 끊임없이 작품을 상상하고 작품속에 현실을 녹아내는지 새삼스럽게 감탄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짧고 굵게 마음을 훅 치고 간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스콧은 이달 초만 해도 마침내 체중계 위에 올라갈 용기가 생겨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아주 기뻤다. 그런데 그 이후로 꾸준하게 체중이 줄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불안하긴 해도 그냥 약간 걱정스러웠을 뿐이었다. 불안이 공포로 바뀐 건 옷 때문이었다. 이 옷 문제는 이상한 차원을 넘어 엄청나게 기괴했다. (p. 18)


스콧은 42세의 중년 싱글남이다. 아내와 이혼후 고양이 한마리와 사는데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라 환경이 좋은 택지지구에 산다.

195센티미터의 큰 키에 허리벨트위로 툭 불거진 배는 109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게 하는 큰 덩치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몸무게가 줄어든다. 그것도 매일매일 딱 0.5킬로그램씩.


딱히 활력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무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평범하던 일상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적응하기 혼란스러웠을때 옆집에 새로 이사온 커플의 개 두마리가 자꾸 스콧의 마당에 와서 똥을 싸고 간다. 그런데 그 이웃은 자기네 개는 그럴리가 없다고 항의한다. 스콧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을때 그 이웃은 여전히 냉랭하다.


"당신이 이겼어요"

"이건 정말이지, 누가 이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

"개가 똥 몇 번 쌌다고 동물 관리국 사람한테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매콤씨. 이봐요. 난 단지 서로 좋은 이웃으로 지냈으면 해요.."

"아, 좋은 이웃이라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이 동네에서 말이에요"

......

'이 동네에서 좋은 이웃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 '대관절 그게 무슨 뜻이지?' (p. 42, 43)


자신에게 벌어진 문제만도 머리가 복잡할 때 스콧은 이웃에게 벌어진 문제를 갑자기 알게 된다.

자신만의 문제에 매몰된다 해도 답이 없어 더 답답해졌을 수 있을 상황에서 이웃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오히려 자신의 할일 과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정작 나서서 뭐든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점에' 대해서.

왜지? 왜 이웃들은 이 커플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거지?


스콧이 내년에 붉게 표시해 놓은 일정은 딱 하루였다. 5월3일. 마찬가지로 붉은 글씨로 된 한 글자가 보였다. '0'. 그가 글자를 지우자 5월3일은 다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스콧은 3월31일을 선택하고 직사각형의 일정란에 '0'을 써 넣었다. 감소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예상하기로 몸무게가 바닥 나는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속도가 빨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콧은 그 와중에도 인생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도리라고 느꼈다. 어쨌든, 가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 중 전적으로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그리 흔할까? 스콧은 이따금 노라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배워 온 어느 격언을 생각했다.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그의 현재 상황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p. 97)


예전에 티비 방송에서 탤런트 김자옥이 자신의 암 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은 '암'이라는 질병에 대해 감사하다고. 교통사고처럼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것보다 '암' 처럼 병에 걸려 세상을 뜨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고.

그 말에 나는 굉장히 공감했었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 아닐까?!

스콧은 자신의 체중이 '0' 이 되는 날을 표시한다. 그런데 그 날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이유도 모르고 정확한 마지막 날도 모르지만 여하튼 얼마 안 남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의외로 덤덤하다. 환상적인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새롭게 뭘 하려고 들지도 않고 침울하게 날짜만 세며 집안에 박혀 있지도 않고 그저 일상을 산다.

일상.

일상을 망가뜨리지 않는 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의미 깊게 다가온다. 아무렇지 않지 않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저 일상을 산다는 것. 내 마지막을 생각하기에 좀더 제대로 일상을 산다는 것. 하루하루의 시간을 차곡차곡 잘 쌓는다는 것. 몸무게가 주는 만큼 시간의 무게를 늘린 다는 것. 일상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렇게 일상이 주는 감동이 의외로 찐...했다.


스콧은 컴퓨터를 켜고 '0'의 날'을 3월15일로 앞당겨 놓았다. 두렵지 않다면 어리석은 것일 터. 그는 두려웠다. 한편 궁금하기도 했다. 다른 감정도 느꼈다. 행복? 이 기분이 행복일까? 그렇다. 미친 소리일지 몰라도 그건 분명 행복이었다. 확실히 그는 어떤 연유에서건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닥터 밥은 그거야말로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콧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뭐 하러 괴로워하랴? 그걸 받아들이면 어때서? (p. 105)


스콧은 자신의 '0의 날' 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름 즐긴다.

그리고 그동안 무심하게 봐왔던 이웃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야 이웃들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온 동네가 거부한 레즈비언 옆집커플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웃들의 왜곡된 시선이 의아하고 아쉽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옆집 커플에게 관심이 간다.

남들이 이해 못하는 그 커플을 이해하고 싶고 자신에게 벌어진 이해못할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생전 처음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한다. 온동네가 주시하는 레즈비언 디어드리, 레스토랑 주인 디어드리, 한때 육상선수라서 동네마라톤 1위 후보자인 디어드리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그래도 우리가 진짜 이웃이 될 수는 있겠죠. 제가 당신에게 설탕 한 컵 빌릴 수 있고 당신도 우리 집에서 버터 한 덩이 빌릴 수 있는 정도만요. 혹시 우리 둘 다 우승을 못하면 무승부예요.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p. 113)


"이 일을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거죠? 제가...... 우리가 당신에 남성성을 위협하기라도 하나요?"

'아뇨, 이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내년에 죽기 때문이에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죽기 전에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잡고 싶으니까.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이 나서 바로잡기 어렵고, 백화점 웹사이트 일도 영 가망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네 사업이 자동차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던 공장들과 똑같다는 걸 모르거든요' 스콧은 그런 내막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스콧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디어드리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냥 중요하니까요" 마침내 스콧이 대답했다. (p. 115)


스콧은 마라톤을 처음 뛰어 본다. 겉보기엔 덩치가 산만한 비만하저씨가 마라톤을 뛴다는 것 자체가 완주불가능성을 확신하게 한다.

하지만 스콧은 마라톤을 뛰며 경험한다.

바람도 아니고 희열도 아니다. 고양이었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더 멀리 상승하는 감각.

책의 원제이기도 한 Elevation 의 뜻은 고도 이다. 높은 곳이란 말이다. 상승 승진 뭐 이런 뜻이기도 하다. 위 문장을 읽으며 '고양' 이라는 번역에 대해 원서에는 Elevation 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콧의 감정을 이해하며 더 나은 한글표현이 뭐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안타깝고 아쉬웠다. 뭔가 더 적절한 단어가 있었다면 스콧의 감정을 저 느낌을 뭔가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번역자의 고뇌가 새삼 느껴지는 부분이었달까;;; 알것 같은데 느낄 수 있는데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네~


스콧은 그의 삶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행복'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스콧은 자신이 가진 체력의 극치를 경험했다. 신세계였다. 그는 만사가 다 이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고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 136)


죽음의 문턱에서 느끼는 행복

어쩌면 죽는 다는 것을 알게됐기에 행복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늘 있었던 행복인데... 네잎 클로버만 찾다가 세잎 클로버에서 갑자기 의미를 찾게 되는 건 죽음이라는 자극제가 꼭 필요한 걸까...

나보다는 더 죽음에 가까워보이는 노작가가 말하는 죽음은 왠지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한번 곱씹게 된다. 나도 모르게...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게 말이죠." 스콧이 대답했다. "무섭지는 않아요. 아주 초반에는 겁이 났죠.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디어드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그말도 이해가 되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죠" 그가 말했다. "분명 그럴 거에요" (p. 160)


"우린 말하지 않아요.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스콧?"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

"어떤 느낌이야, 스콧? 자네는 어떤 기분이 들어?"

스콧은 헌터 힐을 달려 내려갈 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 그의 몸이 일단 최대 능력을 발휘하자 모든 세포에 산소가 채워지던 그 순간을.

"고도에 오른 기분이 들어요." 마침내 스콧이 말했다.

그는 디어드리 매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왜 그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아는 것이 분명했다. (p. 182)


서로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 유대감이 생기고 연대감으로 연결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분명 글로 읽고 있음에도 글이 아닌 글로 쓰지 않은 그 너머의 무엇으로 이해하게 되는 기분은 뭐랄까... 좋았다... 내가 소설속 인물들의 친구가 된것 처럼...


스콧에겐 '0의 날' 이 왔다. 그것도 생각보다 빠르게.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이웃이 있었다.

공동체 문화가 부서진 현대에 가족마저도 갈등의 관계가 되버린 현대에 '이웃' 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근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회적 변화일까? 내 개인적 관심일까?

'오베라는 남자' 소설에서 오베 할아버지의 츤데레 매력에 이웃들이 퐁당 빠져들었었는데, '고도에서' 작품에서 스콧의 평화로움에 이웃들이 흠뻑 젖어든다.


드론이 찍은듯한 잔디밭의 사람들이 보이는 표지에서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겉지를 벗겨보니 하드커버에 가득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딴 세상 같다.

그 딴 세상속에 스콧이 살고 있기를, 고도에서 우리를 보고 있기를, 스콧이 보면 미소지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래본다.



뿌리깊은 차별과 혐오를 넘어,

화해와 포용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대작가의 통찰이 담긴 신작 경장편소설. (표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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