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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이제껏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매너'의 역사
놀라운 시각과 흥미로운 디테일로 무장한
똑똑하고 유쾌한 문화사를 선보인다! (표지 中)
역사서술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학문으로서의 연대기적 역사서술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주제를 잡아서 주제에 맞는 역사만을 선별취합하여 서술하는 방식도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쉽고 가볍게 읽기에는 좋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근래 무거운 책을 좀 읽었더니 쉬어가는 페이지로 읽은 이 책은 후자의 방식이겠거니 예상했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냉철한 시선과 예리한 분석이 술술 읽히면서도 비판적 문화사의 장점을 갖춘 책이었다.
이 책은 유럽인의 미덕이라 여겨져 온 것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럽을 마치 '매사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클럽' 처럼 여기는 고정관념에 흠집을 낼 것이다. (p. 13)
중국 역사가인 쑤 지유는 1848년 출간한 책에서 이른바 '서쪽 대양의 사람들'은 세계를 몇 개의 서로 다른 조각, 즉 대륙으로 나눈다고 전했다. 이 대륙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였다. 그는 또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중국은 아시아에 속한다면서, 그렇다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는 어디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눈에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달린 반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지유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누구도 유럽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또한 합리적이다. 유럽은 따로 독립된 단독의 대륙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판 한구석에 놓인 지역일 뿐이다. (p. 14)
문명화된 대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계몽시대 유럽의 철학자다. 유럽은 정신세계의 발전을 선도하는 북극성으로 여겨지며, 세련된 문화로 세계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었다. ... 이전에는 '유럽적인 것'을 규정하는 토론은 모두 '유럽적이지 않은 것'을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p. 16)
이 '유럽적인 것'을 정의하는 작업은 더욱 복잡해진다. 오늘날 '유로-피어니즘'은 그 어떤 무언가가 집약된 민족 정체성의 모자이크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무언가를 선뜻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p. 19)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너라고 생각하는 행동 중 상당 부분이 중세 유럽의 궁정 귀족과 교육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당위성을 한 번쯤 의심해볼 만하다는 것을 풍부한 예시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 (p. 21)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방향성이 무척 맘에 든다.
유럽은 뭔가 선구적이고 선도적이며 고급진 고유한 문화를 가진 것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주지만 유럽은 아시아와 떨어져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고대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시작되며 전파되었고 지리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는 붙어 있는데, 유럽은 근동아시아 중앙아시아 극동아시아라고 지칭하며 어떻게든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지으려고 항상 애써왔다. 왜?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와 달리 유럽과 아시아는 한 몸으로 역사를 만들어 왔다. 서로 주고받은 것이 늘 있엇고 엎치락뒤치락 하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아시아는 민족의 혼합이 덜되어서 국가별 민족성이 동일한 편인데 유럽은 고대부터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여 왔다. 처음 뿌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유럽은 유럽만의 무언가를 늘 찾아 고집한다. 왜?
유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미개하다는 시선에서 자신들만의 매너에 대한 우월감을 가진 것처럼 해동해온 것을 조롱하는 이 책이 주는 재미는 은근히 통쾌하다.
이 책이 주는 풍부한 예시들은 유럽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더러웠는지 다양하게 알려준다. 그들도,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지역의 사람들처럼 아니 오히려 더많이 미개했다.
아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오른쪽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는데, 이 습관의 원래 주인은 로마 군인들이다. 그들은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악수도 근본은 같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서 손에 칼이나 비슷한 무기를 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악수가 인사법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부터다.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적 제스처로 활용됐다. 싸움이나 협상이 중재됐다는 의미로 악수를 한 것이다. (p. 47)
원래 인사는 안전장치이자 폭력방지책 역할을 했다. ... 인사는 항상 불확실성의 순간과 깊이 연결돼 있다. ... 예의범절과 인사법은 위험 사회에서 폭력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이러한 규칙들은 국가가 폭력을 독접하기 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서 비롯됐다. (p. 49)
거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유럽사회는 오랫동안 혼돈시대였다. 국경도 국가도 정확한 경계가 없었고 영토전쟁은 늘 있다시피 했다. 이러한 시대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자기자신의 무력밖에 없었으므로, 적인지 친구인지 구별짓기 위한 행동은 중요했다. 지금은 예의와 인사 라고 여겨지는 행동들의 시작은 폭력방지책이었던 것이다.
문명인의 예절처럼 보이는 건배 뒤에는 문명이라고 말하기 힘든 역사가 숨어 있다. 원래 건배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잔뜩 취하도록 만드는 것 뿐이었다. 건배를 하고 나면 술잔이 경쟁적으로 비워지기 때문이었다. ... 중세에는 음주가 영적 생활에 속했다. ... 수도원에는 술타령이 넘처났고 사람들은 이기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다. ... 프랑스 수도원에서는 15세기 중반까지 '술통 축제'가 열렸다. 2월에 시작해 5월까지 계속되는 축제였다. 매년 100일 이상 축제가 열렸던 셈인데, 그동안에는 언제라도 술을 마실 핑계가 생겼다. 알코올음료가 이토록 사랑받은 데에는 깨끗한 식수가 부족했던 상황도 한몫했다. (p. 65)
만취는 오랫동안 유럽의 도시 거주자와 군인이 가장 선호하는 오락이었다. ... 알코올 중독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말 무렵이다. ... 노동자 계급의 음주 행태가 변한 것이 이러한 인식 변화에 한몫했다. 독주 한 잔에 고단한 삶의 걱정을 잊는 습관을 노동자의 전유물로 고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이 유포한 프로파간다의 문제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음주 습관에 알코올 중독이란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체의 도덕성 상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p. 70, 71)
중세시대엔 길거리에 주정뱅이가 넘쳐났다. 술을 마시다 아무데다 뻗어 자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비틀거리다 진창에 넘어지면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 누워잤다고 한다. 중세가 신앙의 엄격한 시대인줄 알았더니 읽을 수록 방종의 시대인 것에 놀랍기도 했다. 지나친 방종도 문제지만 차라리 모두가 다 술고래인 것이 평등했는지도 모른다.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자계급이 생겨나면서 과한 음주를 노동자층에게만 전유시키는 것은 결국 차별이 되었으니 말이다.
예절이란게 막 생겨나기 시작한 그 시절을 상상해 보자. 식기 도구가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전까지는 모두 손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로 음식을 먹었다. 혹은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포도주도 큰 잔에 담아 돌려가며 마셨고, 수프도 큰 대접에 담아 함께 먹었다. (p. 76)
포크는 사탄이 들고 다니는 삼지창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용이 금지된 도구였다. ... 한 독일 목사는 포크의 악마적 성격을 신이 인간에게 손과 손가락을 만들어준 이유와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에게 손가락이 있는 까닭은 포크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라는 신의 의도를 보여준다고 했다. (p. 79)
유럽에 예절이 생겨나기 시작한 무렵은 12세기 전후라고 한다. 예절이 생겨나고 있건 어쨌건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손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동대접에 담긴 수프를 한 개의 숟가락으로 돌려가며 사용하여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13세기 예법서에서는 "숟가락으로 먹을 때 숟가락을 쪽쪽 빨지 마라' 는 지침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포크는 16,17세기가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칼은 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꺼려졌다. 하지만 귀족문화가 발달하고 궁정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들만의 식사예법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중세시대 식사예절은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쓰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중세와 근대의 일반인들은 신호가 오면 그 자리에서 용변을 해결했다. 변기나 보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창문을 통해 길에다가 바로 노폐물을 버렸다. ... 안뜰처럼 길가의 후미진 곳도 장을 비우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일반인들은 물론 귀족의 집에도 그런 공간은 배설물로 질퍽거리는 게 정상이었다. 17세기 런던의 한 사업가는 낯선 집에서 요강을 찾을 수 없자 벽난로에 용변을 봤다. 귀족들 역시 억지로 참기보다는 궁전의 벽난로라도 찾아 소변을 봤다. 당시는 하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유럽 도시의 거리에는 어디나 똥이 넘쳐흘렀다. ... 18세기 에든버러의 행인들은 반드시 모자를 써야 했다. 어느 집이나 하루에 한 번은 창문을 열고 길에다 요강을 비웠기 때문이다. ... 어디에서 배설물이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배설물을 아무렇게 않게 다뤘다. ... 18세기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의 연회에는 식탁옆에 탁자가 하나 더 세워졌고 그 위에는 요강이 올라갔다. 그것이 식사를 마친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다. ... 결과적으로 위생 관념이 생긴 것은 유럽 도시들에 하나둘씩 하수도망이 깔리기 시작한 19세기부터다. (p. 99~103)
길거리 를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똥바가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몸서리쳐진다. 푸세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화장실이 있지 않았었나? 아무데서나 싸고 아무데나 버리고 어디서든 똥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면서 동양에 와서는 도로정비가 안되어있네 가묘제도로 인한 시취가 지독하네 했던 것이다. 똥을 안 밟기 위해 하이힐을 만들고 똥을 안뒤집어 쓰기 위해 모자를 썼던 것이 오늘날 패션이 된 것을 보면 유럽문화의 힘이 대단하긴 한 것일수도.
13세기 독일 기사들의 행동규정에 따르면, 오직 '경박한' 기사들만이 목욕을 했다. ... 그런가 하면 목욕을 부도덕한 육체적 오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비난이 전혀 뜬검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당시 기사들이 목욕하러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닌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을 마친 기사들은 규정에따라 어린 소녀들과 함께 목욕할 수 있었다. ... 기사들이 성적 동기에 이끌려 목욕을 좋아했던 반면, 일반 민중은 물을 기피했다. 13세기 프랑스의 농촌에서 자란 사람ㄷ르은 목욕을 아주 가끔했다. 대신 가까운 친구 사이임을 증명하는 행동으로 서로의 몸에서 이나 벼룩을 잡아주었다. ... 어쩌다 한번 씻을 때도 생식기나 항문 주변은 건너뛰었다. 물이 닿는 곳은 손과 얼굴, 입 등 음식을 나누고 준비하고 맛보는 신체 부위에 한정됐다. (p. 115)
유럽에는 사회 최상류층도 개인의 청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대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한 달에 한 번 목욕했는데, 그마저도 '필요하면 하고 아니면 건너뛰는'식이었다. 손과 얼굴만 매일 씻으면 그만이었다. ... 17세기 영국인들은 특히 생식기 주변을 씻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 의복이나 향수, 향수가 뿌려진가발 등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는데, 이를 활용하면서 씻어야 할 이유는 더 줄어들었다. 프랑스 귀족들이 '씻는다' 고 하면, 손만 물에 담갔다가 헹군 다음 얼굴에 향수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속은 거의 갈아입지 않았다. 불쾌한 냄새는 향수로 가리고, 얼룩은 파우더로 덮으면 되는 일이었다. ... 유럽인들이 개인의 청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부터다. (p. 116,117)
유럽인들이 안 씻고 더러웠다고 욕하려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다 더럽고 안 씻고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고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정도 인줄은 몰랐다. 유럽 사람들이 19세기 이전에 저렇게 더럽게 살았다는 것을.
영화에서 보면 중세 유럽과 근대의 유럽은 우아하고 고상하고 고급진 그런 문화로 그려내고는 하지 않나?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나 조선사회를 그릴때는 좀 더럽고 추하게 그린 영화들이 많지 않았나? 하지만 거기나 여기나 거기서거기 였던 것이다. 그들이 더 낫고 우리가 더 못한 게 아니라.
중세의 웃음은 투박하고 잔인했다. 사람들은 지능이 좀 떨어지거나 정상 기준에 못 미치거나 하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보고 웃었다. ... 때로는 비난이나 모욕, 조롱 등이 공개 형벌의 일부에 포함되기도 했다. 공동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에게 가하는 형벌 중 하나였다. ... 15세기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 지역 도시 주민들은 돈을 모아 강도 한 명을 보석으로 꺼냈다. 그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 옛날에는 동물이나 정상인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 다른 사회계층, 다른 종교의 신도 등 절대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없는 대상을 웃음의 원천으로 삼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람들은 귀족 관료들을 사형에 처하는 장면을 보며 웃었다. ... 남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과 궁정 광대의 전통은 서커스란 제도를 통해 민중을 위한 오락으로 살아남았다. (p. 139~147)
고대로마에서의 검투사경기나 황제들의 잔인한 놀이는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가 유럽사회에 내내 있었던 모양이다. 공개처형 구경하기를 즐겼고 고문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여주며 하다가 구경꾼들의 요청에 의해 고문을 더 오래 하기도 하고,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즐겁게 회자했던 사람들은 몇백년을 걸쳐 그 문화를 유지했다. 웃음의 의미는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웃음은 공격성을 가질 수도 있다. 내옆사람들은 웃는데 나는 웃지못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로부터 소외당한 것이다. 공포를 보며 잔인함을 보며 웃었던 분위기는 그저 투박했다고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때 웃음 유발시켰던 장면들은 정말 웃음이었던 걸까 공동체로서의 소속감이었던 걸까...
중세의 문화는 어느 모로 보다 오늘날보다 저속했으며 인간 간의 상호작용은 훨씬 직접적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다보니 무심코 던진 농담이 갑자기 피 튀기는 싸움으로 불거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1216년 피렌체 사람들이 연회를 열어 도시의 유력자들을 초대했다. 식사사는 동안 광대 하나가 부오델몬티 가문의 열쇠를 잽싸게 낚아챘다. 이에 젊은 부오델몬티를 제외한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그런데도 부오델몬티가 계속 고지식하게 굴자, 도시의 다른 유력자인 아리기가 이를 질책하며 부오델몬티 머리에 열쇠를 던졌고 부오델몬티는 그에게 칼을 던지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이 작은 소동으로 피렌체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문간의 싸움이 점화됐다. 가문끼리의 싸움은 교황파인 겔프당과 황제파인 기벨린당으로 나뉘는 정치싸움으로까지 비화해 그 정점을 찍었다. 연회에서 밥을 먹다가 시작된 싸움은 10년이 넘게 계속됐고, 그 여파로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에서 추방됐다. 겔프당에 속했던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기벨린당에 속한 자신의 정적을 지옥의 똥구덩이 속에 처박아 버린다. 작품 속에서 단체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베르길은 용감한 단테의 정당한 분노라며 이를 치켜세운다. 중세에 모욕이란 말 그대로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사회계층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명예를 훼손당하면 곧장 칼로 손을 뻗었다. (p. 157)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 중세에는 격투, 주먹질, 사냥이 일상이었다. 누구보다 귀족들에게 폭력은 삶의 즐거움이었다. ... 사람들은 종교와 관습이 다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못했다. (p.158)
여자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폭력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중세에 결혼한 여자들은 끊임없이 맞았고 농가는 물론 귀족 가문에서도 체벌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 남편이 부당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 16세기까지 남편의 폭력성은 결혼생활에 필수 요소로 여겨졌다. 그리고 서양의 예법서들은 그 폭력성의 발현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가 유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8세기 중반까지도 영국 법원은 아내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남편이 매질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p. 187~191)
폭력과 공격성에 대한 부분은 정말 너무 야만적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명예라는 것도 사실 무슨 거대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중세시대의 명예는 내가 봤을때는 기분이 나쁜것 일 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상대방의 행동이 내가 맘에 안들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싸우는 것이다. 맥락없이 싸우고 이유없이 죽었다. 노예, 아이, 여자 를 때리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어떤 중세기사는 세딸에게 여자로서 지침을 준다며 쓴 글에서 아내를 바닥에 눕혀 놓고 때리고 발로 걷어차서 코를 뭉개뜨린 후 일그러진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아내가 그나마 남편에게 복종한다고 가르쳤다. 기사도라는 말이 왜 그렇게 멋진 말로 둔갑되었을까? 폭력적 일상에서 기사도를 발휘하는 멋진 남성은 없었다.
중세사회에서 여자들은 기사들을 위해 준비된 상 이었다. 기사들은 결혼을 통해 성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두 가문이 결혼을 앞두고 협상을 시작해 합의를 이루면 결혼 당사자들이 승인하는 것으로 절차가 진행되었다. ... 당시에 결혼이란 딸을 다른 남자의 소유물로 이전하는 절차였다. ...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인도의 강제 결혼을 생경하게 받아들이지만, 한때 유럽 전역에도 그런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p. 197, 198)
중세와 근대에는 신혼부부의 사적인 공간이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첫날밤의 즐거움이 온 동네에 중계되도록 그들의 침대는 의전에 맞춰 공개된 장소에 놓였다. (p. 199)
중세엔 주거 공간이 좁은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침대 하나를 나누어 썼다. 가족들이 함께 자는 것은 물론이고 하인들이나 손님도 주인과 한 침대를 썼다. 16세기에 들어서야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유별함을 가르치는 지침서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로부터 2백년 후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p. 207)
중세의 성도덕이 순결한 사생활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정해진 사회적 관습을 따르고 공공연한 추문을 피하면 끝이었다. 당시에도 혼전 관계나 불륜은 다반사였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즐거움을 찾을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p. 212)
처음 만나는 여성의 가슴을 만져도 괜찮고, 처음 보는 여성이 맘에 들면 어떻게든 꼬셔서 성관계를 갖는 것이 당연하고, 강간이나 납치도 횡행했던 시대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심지어 뻑하면 맞아가면서까지. 읽을수록 기사도는 대체 언제쯤 나오나 싶었는데 결국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왜곡된 기사도정신에 대해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뽑내기 위해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을 만들어냈다. 왜 대체 왜일까?
마지막 9장에 이르러 저자는 '디지털 중세시대' 라며 현재를 이야기 한다.
" 사람들은 이제 SNS 공간에서 허세를 떨고 서로를 유혹하고 행패를 부린다. 중세 기사들의 무절제한 태도가 또다시 만개하고 있다" 면서 인터넷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중세시대 못지 않은 미개한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지금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자화자찬과 악플러들의 장황한 험담을 보고 있자면 중세의 통제되지 못한 행실이 가상세계라는 새집을 구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디지털 중세기에선 맞대응과 비아냥거림, 공격과 연민의 상실이 일상화 되어버렸다' 며 중세보다 더욱 한계가 없어지고 위험해졌다면서 현재를 비판한다.
1장에서 8장에 걸쳐 매너의 시작, 몸가짐과 바디랭귀지, 인사법, 식사예절, 자연 욕구와 분비물, 눈물과 웃음, 공격성, 성생활 에 대한 중세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뒤로 갈수록 중세시대에서 현대에 이어진 문화들을 점점더 많이 자연스럽게 확장해가더니 9장에서는 현재를 이야기 하며 중세와 비교한다. 결국 저자는 중세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야기하면서 현재를 다시 보게끔 하고자 했던 것일까? 중세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면서 더욱 야만적이 된 현재를 드러나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책은 결국 매너의 문화사가 아니라 중세적 인류사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풍속 문화에 관한 역사는 항상 훌륭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에서 위로를 얻을 수는 있다. 이제는 당연하게만 보이는 서양의 생활 방식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위대한 역사철학가인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새벽녘에 날개를 펼친다' 라는 말을 남겼다. 고대 사람들은 부엉이가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를 동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터넷 세계 속 시간에서 부엉이는 어디에 있는가. 짐작건대, 둥지에 앉아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것이다. (p. 252)
저자는 사회가 변했다고 행동양식이 변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일상적 환경에서의 폭력성은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지만 인간의 존재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에게 본래의 특성은 없다고 말한다. 문명화된 사회속 인간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듯 하면서 인터넷 공간 역시 이 사회의 하나라고 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다시말해 저자는 어떤 결론도 정확하게 내리지 않는다. 짧고 유쾌한 역사로 읽고 넘기기엔 저자가 숨긴 의도가 궁금해지면서 마지막장을 덮기가 아쉬웠다.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다양한 민족을 품어안으며 다양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던 유럽의 속살을 까발리는 듯한 관습들을 알려주면서 저자는 디지털현재에 대한 우려로 글을 마친다. 뭔가 더 필요한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나에겐 '디지털 중세시대' 라는 단어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과거의 관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는 질문에 '디지털 중세시대' 라는 단어에 대한 답으로 구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명과 문화에는 상하를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은 유럽 문화사에 대한 상위의 위치를 하위로 내리는 책이 아니다. (문화는 그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관습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면 더구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