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하면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를 많이 떠올릴 것 같다.
유럽 문화의 대부분은 고대그리스로마문화에 그 바탕을 두고 발전했다.
하지만 최초의 신화는 따로 있다.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 가 그것이다.
역사책을 읽다가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었던 수메르문명에 대한 책과 길가메시 서사시는 내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었다.
고대그리스로마 신화도 성경의 신화도 그 신화들이 기록되기 몇천년 전에 이미 수메르 신화들에 기록되어 있었다. 수메르 문명이 남긴 점토판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모든 신화가 수메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신화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 그또한 놀라웠다.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의외로 취사선택된 내용들인 경우가 많다. 수메르 점토판의 내용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의 신화적 내용들은 고대그리스로마문화의 위대함에도 성경의 신성함에도 상충된다. 유럽중심의 문명과 문화에 반갑지 않은 내용들이다...
저자는 영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은퇴한 노학자로 길가메시서사시를 번역하기 위해 설형문자도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기존에 수메르 토판들의 번역본은 많이 있어서 기존의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 30종도 참고하여 새로운 영어 번역본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 나름대로 원전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본을 기존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펴내고자 시도한 만화그림은 저자의 아들이 그렸다. 그림에 참고할 자료가 별로 없다보니 역사적으로 정확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얼마 못가 포기했다고 그린이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번역한 원전의 내용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 듯 하다. 만화적 대사표현과 특징을 잘 잡아낸 그림들은 위트있으면서도 진지해서 읽는 내내 놀랐다. 솔직히 만화라고 해서 가볍게 다룬 책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원전내용을 충실하게 옮기고 있어서.
대부분의 길가메시 서사시 토판 번역본들은 토판 XI까지만 옮기고 있는데, 이 책은 토판XII 까지 번역해 놓았다. 그래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처음 읽는 것이 아님에도 마지막장의 토판 번역내용은 처음 읽는 것이라 새롭고 좋았다. 저자도 토판 XII 는 후대에 덧붙여진 허구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학자들이 길가메시 서사시로 인정하지 않는 토판이라는 것까지 알려준다. 그렇게 허구적 결말로 마무리 하면서 어차피 온전히 남지 않은 토판의 없어진 부분에 대해 허구를 붙이면 또 어떻겠냐고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허구적 결말을 붙이는 것이 정말 뭐 어떤가? 신화는 어차피 지금 우리가 읽기에는 다 허구이자 상상력의 산물인 것을.

길가메시 서사시는 친구 엔키두와 함께 하는 여행이 주요 내용이다. 여성과 남성, 이성간의 사랑보다 남성과 남성, 동성간의 사랑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메르의 문화가 고대그리스문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신성한 여신이자 처녀의 몸에서 나온 아들인 길가메시에게는 인간의 왕인 루갈반다 아버지가 있다. 이러한 탄생설화 익숙하지 않은가?

화가 난 여신이 벌을 내리고 벌을 받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고 변한 동물의 몸이 인간이었던 자신이 아끼던 사냥개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악타이온'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악타이온은 아르테미스 여신을 화나게 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이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변신시키고 그렇게 사슴이 된 악타이온은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임을 당한다.


엔키두가 야생에서 동물처럼 살때 그를 인간처럼 살도록 지혜를 준 것은 샴하트 라는 여성이었다. 길가메시가 여행중에 머무른 여관에서는 여주인이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고대문명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의 궁극엔 여성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그리스의 신화에서 지혜의 신은 아테네 여신이었고, 고대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와 영감을 준 이는 디오티마 라는 무녀였다.


고대신화나 문명에서 열이틀 과 일곱째 날이라는 숫자의 날은 항상 특별했다. 수메르에서부터 이미.

엔키두를 잃고 죽음의 공포와 삶의 허무를 알게된 길가메시는 영생의 힌트를 얻기 위해 길을 떠나고 도중에 갖은 고난을 당한다. 사자와 싸워서 이기고 사자 가죽을 옷처럼 입고 다니는 길가메시의 모습은 고대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아마도 홍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신이 인간을 벌하려 홍수를 내리고, 홍수가 나기 직전 신을 따르는 인간커플에게 넌즈시 그 사실을 알려주고 배를 만들도록 하고 배에 동물들을 싣게 하고 홍수가 나고 잠잠해진 후 새를 날려보내 육지를 찾고 그 육지에 인간과 동물들이 다시 정착하게 되는 과정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성경이 쓰이기 전에 기독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수메르 신화에 홍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뱀의 행동은 사악하고 인간은 신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성경에서의 의미와 무척 흡사하다.


나중에 덧붙여져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적 내용이라고 볼수 없다고 알려진 토판 XII 의 내용에서 엔키두의 저승여행은 고대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영웅들의 저승여행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엔키두가 보고 와서 이야기 해주는 저승의 모습은 권선징악의 종교적 의미를 너무도 분명히 드러내고 있어서 이승과 저승의 연결 그리고 이승에서의 삶의 태도에 대해 신을 섬기게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성경의 핵심과 무척 닮아 있어 보인다.
노트크기의 큼직한 책에 빽빽이 들어찬 그림과 글은 가볍게 전달하면서도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 내용도 굉장히 잘 전달하고 있었다. 고전중에 시기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이렇게 만화로 보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와 종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기원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본다면 무척 좋을 것 같다. 문명은 우리가 밝혀내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알 수 없는 그 시절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는 또다른 꿈을 꾸게 만들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