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비판 경제학 -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경제 교과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이푸로라 옮김, 성일권 감수 / 마인드큐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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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경제교과서>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목과 달리 경제학!서 라기 보다는 경제현실분석서 로 읽혀지는 책이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는 무척 멋진 언론관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이자 국제관계 전문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가 기획한 책이라는데, 이 시사지는 국내에서 <르 디플로> 라는 애칭으로 발행되고 있다고 한다.

책은 서문부터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포문을 연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사회과학계를 장악하게 된 것이 주요 이유라 할 것이다. 이후 경제 현상의 해석에 있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입김은 더욱 세졌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 높은 방어벽을 세웠다. 문제의 원인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p. 9)

금융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에 있다는, 아니 그보다도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은 책 내용 여기저기서 자주 반복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이 쓰신 '감수자의 말'코너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연결된다.

국가경쟁력 지수는 한 국가의 경제 성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능력을 따지는 상대적 지표라고 하지만, 해마다 국제 민간포럼기구인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하고 있다. 개최지인 휴양지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는 WEF 회의장에는 세계의 유력 기업인들, 경제학자들, 정치인들, 국제경제기구 관계자들이 몰려든다. 공식적인 국제기구인 유엔이나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오랜 자료수집과 분석을 거쳐 국가경쟁력 지수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친화적인 민간 이익단체가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한 각 항목들을 점수화하여 이를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분찰하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안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따져보면 국부를 쌓은 국가경쟁력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업경쟁력인 셈이다. (p. 13)

이 대목을 읽고 기가 막혔다. 국가경쟁력 지수 가 기업인들이 만든 기업목표 성장지수 였다니 너무 웃기지 않는가? 국민들은 모른다고 치자. 국가정치핵심가들은 알 것 아닌가? 언론인들은 알 것 아닌가? 그런데 국가경쟁력지수 라는 표현에 대해 다들 동의하는 건가? 그래서 이 지수가 어떻게 산출되는 건지 굳이 알려주는 것없이 바로 지수를 수치로 사용하고 인용하는 것인가? 이건 거의 오보 수준 아닌가?

하긴 '4차 산업혁명' 몸살을 앓은 한국에서 그 용어가 세계적이지도 않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닥 회자 되지 않았으며 정식 명칭도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 이 '4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표현되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의 목표설정으로 만들어진 용어를 한국에서는 이것 아니면 죽을듯이 미래산업의 핵심으로 유행되었다. 왜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배운 '경제학 교과서' 는 우리 사회의 99%를 이루는 '우리의 것' 이 아니라, 1%에 불과한 '그들의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우해 쓰고, 말하고, 밑줄치고, 그럴듯하게 학문적 성과로 포장한 '허튼 이론들'을 마치 경전인양 받아들였다. 수적으로는 1%에 불과하지만 자본, 권력, 국제사회, 미디어와 여론을 장악한 그들은 때로는 동업자로서, 때로는 경쟁자로서 개방화, 자유화, 세계화, 규제완화, 자유무역의 가치를 설파하며 우리의 삶을 옥죈다. 그들이 은밀하게 곳곳에 살포한 '허튼 이론들' 은 마치 마약의 치명적 독성처럼 우리의 삶을 무한경쟁의 '성장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과 환경을 해쳐온 '그들만의 독점적인 성장모델'이 우리에게 그토록 깊이 파고든 까닭에서다. (p. 14)

'서문' 과 '감수자의 말' 이 어찌나 구구절절 옳은지 책의 핵심은 이 앞장 몇 페이지에 다 있는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이 제정된 해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69년에 처음 수여되었다. 이 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상이 아니다. 다른 노벨상들과 달리 이 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이 정식 명칭이다. 노벨은 유언을 통해 국적을 불문하고 '인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수여할 것이라고 정한바 있다. 그러나 스웨덴 중앙은행이 상을 수여한 사람의 상당수는 서양 출신이다. 게다가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경제모델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만큼 인류에 충분히 이바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경제학은 역사가 길지 않은 학문이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절반 이상이 현재 생존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경제학자의 82%가 미국 국적이다. 그에 반해 유럽 국적을 가진 수상자는 독일1명, 영국3명, 프랑스1명, 그리고 노르웨이인 1명으로 극히 낮은 비율을 차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노르웨이인 과 프랑스인 이 두 사람은 박사 학위를 미국에서 취득했다. 개발도상국 수장자는 인도출신 1명 뿐인데,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수상 후보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국적의 수상자 수가 증가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와 기술적 분석이론, 금융 분야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벨상을 통해서 경제과학을 표방한 이들은 금융세계화를 옹호하고 시장의 효율성에 관한 이론을 펼쳤으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권장하기도 했다. 반면 정부의 시장개입은 부작용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들은 과학계와 공공의 영역에서 서구 중심, 더욱 정확히는 미국 중심의 시장 경제를 집단으로 이상화했다. 그런 움직임은 198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국제기구(IMF)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p. 34)

노벨상이 서구 중심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이 노벨상도 아니고 90%가까이 미국 경제학자들이 받은 상이라는 것은 몰랐었다. 사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왜 우리나라는 노벨과학상이 없냐 하거나 노벨문학상을 노려봄직한 문학가들을 살펴보는 정도 외에 다른 내용은 국내에서 거의 회자되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사실 경제와 가장 크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 경제를 주무르는 세계의 분위기를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싶다. 대충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이 생각난다. 그때 왔던 IMF 관련자들은 경제사냥꾼들 같았다. 세계은행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니라 미국은행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닐지...

언론을 통해 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정부 정책에 자문을 제공하는 대학 교수들이 은행이나 대기업으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p. 45)

경제학 대학 교수가 자산관리 컨설팅기업의 자문위원이고, 경제학 교수가 주요기업의 경영이사로 있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겸직을 하거나 은퇴후 기업으로 보직변경을 하면서 상임고문료나 강연료를 고액으로 받고, 연구소 지원비를 받기도 한다. 이론이 뒷받침해주는 기업의 경영논리는 어느새 나라의 경제정책에 반영되기 일쑤이다. 우리가 배운 경제학 이론이 과연 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구에게 알맞은 경제학이론들이었던가?

 

 

이 책은여러모로 무척 시각적인 책이다. 경제학이론이나 마르크스경제학 등을 시각적으로 정리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정리 자료는 몇 가지가 더 나오긴 하는데, 이런식의 정리가 신선하게 읽혔다.

정치적 상상의 핵심부에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이념은, 부의 재분배 없이도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채질했다. 또한 누군가가 감수해야 하는 가난의 주된 요인은 다른 이들이 독점하고 있는 부에 있음을 망각하게끔 했다. (p. 127)

기업가에게 부여된 영웅적인 창조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질적인 고용을 창출해내는 것은 특정 주체가 아닌 전반적 경제의 활동, 즉 경기다. 이 같은 (이념적 이해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오해의 결과로, 지난 30년에 걸쳐 줄곧 경제정책의 초점은 경기 그 자체가 아닌 불량한 '창조의 대리인'인 기업에 혜택을 베푸는데 잘못 맞춰져 있었다. 거시경제 정책이 유럽연합의 규제라는 굴레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와중에 기업들은 부담금과 세금 감면 이라는 횡재를 누리기도 했다. 실업자가 계속 늘어만 가는 현실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p. 163)

이 책은 경제학 이론들을 설명해 주는 책도 아니고, 현실경제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하나 답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고 그저 다시 질문해 볼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다. 책은 내게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경제학은 무엇인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현실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몰라서 망각하고 왜곡된 정보로 오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읽으면서 뜬구름을 잡으려는 듯 답답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정리가 되질 않아 힘들기도 했다.

내가 읽으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시각적 자료들이었다.

책장 한두장마다 컬러판 사진들이나 그림들이 가득하다. 쉽지 않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책이 시각적 자료가 많은 것은 의외였는데, 그 시각적 자료들이 다 그 페이지의 내용들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건지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예를 들어 아시아경제개발을 이야기하면서 과거 한국이 국가주도 산업을 육성했던 내용을 말하는 도중에 들어간 사진이

 

 

 

이것이다. 이 사진이 한국의 경제개발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사진의 인용은 사실 표지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표지그림은 50페이지에 나오는데, 그 부분의 내용이 비주류경제학자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것과 종이가면은 무슨 상관인 걸까? 대부분은 내용상의 맥락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그림들이 많앗지만 때로는 내용 전체의 핵심을 은유하는 듯한 사진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 보고 바로 알아챌 수 없었다. 왜 이 사진이 인용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이 내용을 함축하는 건가? 하고 다시 생각해봤을때 꿰어 맞춰지는 느낌이었을 뿐...

나의 이런 느낌은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조금 이해가 되었다.

당초 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나 경제에 입문하는 대학생들을 겨냥해 출판됐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좁게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지침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p. 395)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에 나오는 철학적 질문은 유명하다. 온국민이 매년 그 문제를 궁금해하며 기다린다고 할 정도로 바칼로레아 에서 나오는 질문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굉장히 함축적인 질문들이라고 들었다. 혁명과 자유와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 언론기사의 문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바칼로레아 식으로 씌여진 경제비판서를 읽었으니 나한테는 영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어 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구체적인 학문서들이 적당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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