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6일, 아버지는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음이다. 그는 1950년 12월에 어머니와 남동생을 집에 두고 고향을 떠났다. 열다섯살 난 소년은 부산항에서 부두노동을 하면서 전쟁을 넘겼다. 가난한 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모질게 공부했고, 온전히 혼자 힘으로 훗날 대학교수가 되었다.
겨우 2년전에 눈치를 챘다. 그에게 무슨무슨 교회에서, 무슨무슨 단체에서 보내는 카톡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린다는 것을. 알림음이 나고 몇초 후에는 늘 대한민국을 빨갱이들로부터 구하자는 날선 웅변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슬그머니 방문을 당았다.
아버지가 의식없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의 핸드폰을 열어봤다. 그에게 지난 몇년 간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던 것이 그들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이 그들의 생경한 목소리로 채워진 것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그런데 그들에게 화가 나는 건지 나에게 화가 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생전에 남북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하지 않았다. ... 혹시라고 남쪽에 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 '월남자의 가족'으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걱정해서였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너무 오래 걸렸다. 70년 세월, 그건 정말 한평생이다. 많은 이들이 그 시간을 다 기다리지 못했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누가 '열일하는 대통령'이라고 썼다. 나도 내 몫의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게 뭘까?
저 멀리 있는 멋진 일을 꿈꾸면서 정작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은 소홀히 하는 것, 익숙한 함정이다. 그래,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한국전쟁 영국군 참전군인'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게 '한국' '전쟁' '영국' 을 조합했을 때 가장 쉽게 떠오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던 노인들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는 것이 종전을 염원하는 제 나름의 의식이라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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