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세계 사랑으로 어둠을 밝힌 정치철학자의 삶,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도서 누구나 인간 시리즈 1
알로이스 프린츠 지음, 김경연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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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사랑으로 어둠을 밝힌 정치철학자의 삶

지금은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할 시간

한나 아렌트의 삶과 작품을 처음 만나는 이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책! (표지문구 中)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읽어본 책이 없었다. 계속 이런 저런 책들에 밀려 관심책으로 찜해두기만 했을뿐 새로 나온 책들에 자꾸 순서가 밀려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책저책에서 조금씩 언급된 그녀의 책 일부분이나 생각의 일부분을 읽게 되고,

특히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썼다는 '악의 평범성' 은 심리서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해서,

점점 더 궁금하긴 했었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읽기전에 이 책을 읽게 된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통해 전기로 그녀의 삶과 생각을 읽게 된 것은 앞으로 그녀의 책들을 읽을 때 배경정보로 충분히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이었다.

이 책은 전기다. 저자는 전기작가다. 전기는 위인전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전기는 인물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있다. 마음에 든다.

한나 아렌트 라고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직업은 뭐였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곤 했다.

작가? 사상가? 철학자? 평론가? 교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에 써있던 '정치철학자' 라는 단어가 처음 보는 듯 눈에 들어온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철학자 였다.

내게 철학은 순수이론학문이라는 지배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던가 보다.

심리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고, 철학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고, 사회사상서에서 한나아렌트의 글을 보면서 그녀가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었다. 데카르트 나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사상의 처음과 끝을 잇는 사상의 체계가 그녀의 이론에도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어서 그녀의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하는데 하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을 알고 나니

1906~1975 이라는 시기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격동의 세월이었는지를 다시한번 알고나니

그 속에서 순수이론학문적 철학이 얼마나 무용지물이었을지 새삼 깨닫게 되고나니

그녀가 행동형 정치철학자 가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유복하고 전통종교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런 분위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자아이임에도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고 총명한 아이였다.

유태인과 독일인 사이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전쟁과 하이데거와의 불륜적 연애를 통해 평생 그녀의 자아를 따라다녔다.

전쟁을 밑천삼아 급격한 성장을 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본격적인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을 만들어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세계사를 현실에서 접하던 그녀의 지적호기심은 한분야로 점철될 수 없는 그녀의 책들을 쓰게 했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의 사상서들에 비교하면 현재 덜 읽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치즘과 유대인박해의 중심에 있는 독일인들과 반공 매카시즘의 중심에 있던 미국인들 사이에 있던 한나아렌트의 진보적인 생각은 조선인박해와 반공전쟁을 경험한 한국인들이 읽기에 굉장히 끌리는 부분이 많았었다. 왜 국내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이 그다지 많이 읽히고 있지 않은지 의아해질 정도였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뭔가를 깨닫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노동하기만 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며, 작업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였다.

그녀는 평생 사유하는 삶을 살았고, 그 사유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에 때로는 인기를 얻고 때로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시류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계속 근본적인 것을 사유해 나갈 뿐이었다.

평생을 '진정'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삶은 굉장히 인상적인 삶이었다.

그녀가 했던 사유는 지금의 현실정치에도 반영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언제 제대로 그녀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될지 알수 없어 인상적인 구절들을 좀 길게 옭겨 놓아 본다.

그녀에게 하이데거가 숭배하는 천재였다면, 야스퍼스는 존경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이성으로 향하도록'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수십 년 후에 고백하듯이 야스퍼스였다. (p. 64)

그녀는 대부분 자신이 몰두하고 싶고 대결하고 싶은 특정 이념들에 끌려다녔다. (p. 70)

 

유대인 증오는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이지, 개인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나 역시 정치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p. 85)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유대인 주거지는 아랍 이웃들과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더불어 살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국가적 계획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 그녀가 염두에 둔 것은 일종의 지중해 연방 혹은 그보다 훨씬 큰 유럽 민족의 연방으로서, 여기서 팔레스타인은 제자리를 찾고 더 이상 다수와 소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각기 다른 민족적, 정치적 요소들이 같은 권리를 갖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p. 114)

 

집단 책임 혹은 결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임이란 한 개인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쓴다. 누군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나치가 악마적인 계획에 이용할 수 있었던 특정 유형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유형은 광신자나 사디스트 혹은 치정 살인자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가장, 다시말해 자신의 사생활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정을 충실하게 돌보는 가장' 이다. (p. 123)

 

민주주의란 폭력적인 방법으로 수립할 수 있는 어떤 완결된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논거였다. 민주주의란 '살아 있는 것' 이며, 의견의 일치만큼이나 대립도 필요하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이 생명력을 배앗길때 파괴된다. (p. 147)

 

전제정치에서의 삶은 공포와 불신으로 규정되며, 공화정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신념이 지배적이고, 따라서 '혼자가 아님'이 기쁨인 반면, 전체주의적 지배의 중심 경험은 고립이다. (p. 159)

 

전통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노동의 피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장으로 알고 있는 곳에서, 마르크스는 여가와 한가로움밖에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이러한 여가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의 법칙에 종속된다. 노동과 소비의 이러한 순환 속에서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되던져지며, 한나 아렌트가 근대 세계의 특징으로 보는 '고립'이 생겨나는 것이다. (p. 166)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적인 영역' 과 '공적인 영역' 이 두 영역이 서로 겹치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각 영역은 자기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고유의 행위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되거나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된다면 '큰 불행'이 발생한다. .... 그녀에게 사랑이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며, '비정치적'인 것이다. 반면 유대인들의 운명은 두드러진 정치적인 문제이다. (p. 190)

 

그녀에게는 세번째의 영역, 즉 '사회'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단체, 협회, 공동체들이 형성된다. 한마디로 말해 차이가 생겨나는데, 이는 전혀 정당하며 법적인 조치를 통해 평준화될 수도 없고 또 평준화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에서 중요한 평등-나쁜 의미에서 정말로 획일화된 대중사회를 원하지 않는 한-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오직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녀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차별을 근절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차별이 정당한 사회라는 영역에서 어떻게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러한 차별이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여 황폐와시키지 못하게 할 수 있느냐' 이다. (p. 191)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왜 전체주의에 관한 저서에서 했듯이 '근본악' 이라 말하지 않고, '평범한 악'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옳다고 여겼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사실 악은 언제나 극단적일 뿐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은 깊이가 없으며 또한 마성도 없습니다. 악이 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버섯처럼 표피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선이며, 언제나 선만이 근본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보았다. (p. 234)

 

그녀는 그런 비난들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그녀의 책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왜곡된 '이미지'가 문제인, '정치적 캠페인' 혹은 '사냥' 이 행해지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고, 그것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고 설명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p. 235)

 

"나는 언제나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게 죽음은 언제나 유쾌한 동반자였습니다. 서글픔 같은 것은 없습니다."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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