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뉴욕의 초보 검사입니다 - 정의의 빈틈, 인간의 과제를 묻다
이민규 지음 / 생각정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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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빈틈, 인간의 과제를 묻다

'세상의 중심', '탐욕의 최전선' 뉴욕에서 일하는 한국인 검사의 정의 분투기

"오늘도 괴물이 되지 않으려 싸우는 중입니다"

 

저자는 이제 서른이 된  청년이자 뉴욕에서 검사생활 1년차인 군필 한국인이다.

아직은 얼떨떨한 사회초년생이자 팔팔한 에너지의 인생초년생인 젊은이는 겸손하면서도 심지굳고 경청하면서 고민하는 '사회정의부' 소속 검사였다. 미국의 번영의 상징인 도시 뉴욕이 있는 뉴욕주의 검찰청 소속 검사.

 


 

슈퍼히어로들은 한결같이 뉴욕에서 활약한다. 배트맨의 무대인 고담시도, 슈퍼맨의 무대인 메트로폴리스도 뉴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시들이다. 몇몇 히어로들은 아예 대놓고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아이언맨은 미드타운, 스파이더맨은 퀸스, 데어데블은 헬스 키친,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사는 식이다. 슈퍼히어로들이 몇 십 년째 뉴욕을 본거지로 삼아온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만큼 멋진 그림과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뉴욕은 꿈과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다. (p. 8)

그렇다보니 뉴욕은 늘 화려한 성공과 대박을 노리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망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기형적으로 변해간다. 이런 욕망의 격전지에서 욕망이 탐욕으로 변질되는 건 한순간이다. (p. 9,10)

뉴욕의 초보 검사로 지낸 지난 1년간 '슈퍼히어로'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줄 아는 '슈퍼히어러'는 되자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게 검사로서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p. 12,13)


프롤로그를 여는 그의 솔직함과 재치가 책을 시작하는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이 젊은이 마음에 든다. ㅎㅎ


저자의 글을 읽으며 미국은 한국과 법환경이 무척 많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무소불위의 철퇴를 내리치는 검사와 달리 미국에서는 검사고유의 권한인 기소권조차 검사의 고유의 권한이 아니다. 기소권은 대배심제도에 의해 시민들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검찰청도 한국처럼 수직적인 위계질서하의 '검사동일체원칙' 기반이 아니라 연방검찰청, 주검찰청,지역검찰청 으로 힘이 분산되어 있다.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부정부패를 줄이고자 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하지만 법시스템이 좋아도 권력보다 돈이 최상위를 독점하고 있는 미국사회에서는 시스템도 별 소용이 없어보인다. 법시스템이 분산되어 있으면 뭐하나 기업가들의 돈폭탄 로비에 법도 정치도 다 소용없어지는데...

 


 

드라마 <비밀의 숲> 에서 가슴에 콱 박히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검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작중에 검찰총장은 후배 평검사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검사나 의사나 같은 '사'자를 쓰는 줄 아는데 의사는 '스승 사'자를 쓰고 변호사는 '선비 사'자를 쓰는데 유독 검사만 '일 사'자를 쓴단 말이야. 그래서 검사는 사람이 아닌가 했는데 깃발을 높이 든 모양이라고 하더군. 원래 일 사 자가. 우린 그래야 돼.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 선봉에서 기준이 되어주는 사람. 그게 우리의 본모습이라는 걸 국민들에게 보여줘" (p. 65)

<비밀의 숲> 드라마는 나도 정말 좋게 본 드라마였는데... 이렇게 좋은 대사가 있었던가;;; 그동안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검사들이 워낙 권력에 붙어 악의 축처럼 비춰진게 많다보니 변호사는 정의로와도 검사는 오히려 정의롭지 못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본래는 검사 가 하는 일은 몹시 정의롭다. 나쁜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엄벌을 내려주는 사람이 검사 아니던가.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악덕기업주에게 부당해고를 당한 사람, 불법체류자로 성매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재산싸움을 벌이는 가정,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성폭력까지 당한 사람, 다단계 판매에 이용당한 사람, 부당대출에 허리가 휘는 사람... 미국의 부자도시 뉴욕에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가난하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그 사람들은 검사를 찾아와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저자는 검사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일을 한다. 가해자들에게 비싼 변호사가 붙어있어도 월급쟁이 검사로서 최선을 다해 파고든다. 검사가 하는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동안 너무 뉴스에서 정치권력문제에 등장하는 검사들의 모습만 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물론 꿈을 꾸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꿈꾸는 것만으로 인생이 바뀔 정도로 우리가 처한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간절하게 바라면 모든 게 잘 해결된다는 명쾌하고도 단정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건 환자의 성별, 나이, 신체 및 정신 건강 상태 등은 고려하지 않고 비타민C만 잘 챙겨 먹으면 병에 안 걸린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태도다. 경우에 따라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힐링'이 아니라 '킬링'에 가까운 셈이다. 병은 사람을 못 죽여도 잘못 처방된약은 사람을죽이는 법이라고 했다. (p. 123)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이주해온 젊은 부부가 열심히 읽었던 자기계발서들이 말한 처방들은 다 부질없었다. 자기계발서의 허황됨에 대해 명쾌하게 반박하는 저자의 글이 시원스러웠다. 통쾌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도 자기계발서가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는가? 베스트셀러에는 또 얼마나 자주 오르는가? 어찌나 자수성가하고 믿으면 이루어진 꿈들이 많은지 기가 막힌다. 하지만 믿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다. 믿음보다 더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쉽게 이룬 꿈을 믿고 싶지 어렵게 이룬 성공을 실천할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위에 밝힌 '키티 제노비스 사건' 역시 <뉴욕타임스> 의 보도와 실제 상황에서는 많이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그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했고, 그것조차 새벽에 비명소리를 듣고 깬 것이라 범행 과정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중 두 명은 경찰에 분명히 신고를 했고, 심지어 한 명은 거리로 직접 뛰쳐나가 앰뷸런스가 올때까지 피해자를  보호했다고 한다. 결국 <뉴욕타임스>는 2016년 오보를 인정하는 사과 기사를 냈다. (p. 159)


'제노비스 신드롬' 혹은 '방관자 효과' 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새벽 퇴근길 한 여성이 노상강도에게 처참하게 살해되는 동안 이웃주민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기사로 충격을 주어 인간의 책임회피성 대한 증거로 많이 언급되는 사건이다. 심리서들에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오보였다는 말은 없다. 자신이 알고 싶은 부분만 알고 모르고 싶은 부분은 무시하는 정보이용의 왜곡이 책임회피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한 사건의 소송은 제도적 절차상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국에는 1925년 '연방 중재법' 이 생겼다고 한다. 소송까지 가기 전에 중재로 서로 좋게 해결하면 시간과 비용도 줄고 인간적 화해의 마무리로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낼 거라는 좋은 취지는 점점 왜곡되어 현재는 국민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구매약정조항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 계약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분쟁은 중재규칙에 따라 중재로 최종 해결한다' 라는 사전 중재 합의 조항이 있으면 상품에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소비자들은 집단소송을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기업들은 깨알같이 이 조항을 꼭 써넣고 있다고 한다. 근로계약서에도 써넣어서 근로자가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노조로 단결하여 집단소송을 하는 것은 법적으로 절대 불가능 하다. 미국은 이래저래 정말 기업가의 나라다.


미국은 엄벌주의 국가의 대표주자라고 한다. 흉악범들에게 사형이나 종신형, 100년형 200년형을 수시로 선고한다고 한다. 그래서 폭증하는 재소자들을 수감하고자 학교보다 교도소가 더 많이 지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흉악범들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이 나올때마다 그들의 갱신성을 믿을때마다 엄벌주의에 찬성했던 나로서는 먀약과 총기허용으로 더 필요해진 엄벌주의가 된 미국의 입장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미국에서는 흡수주의가 아닌 병과주의로 형벌을 정하기 때문에 여러건의 범죄를 저질렀을때 가장 큰 형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합산한 형벌을 준다. 그래서 자잘한 도둑질 몇번 하면 형벌이 더해지고 더해져 살인죄를 범한 흉악범보다도 더한 100년형이 나올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사형선고를 내려도 종신형처럼 교도소에 수감된채 평생을 살다가는 한국의 교도소와는 달리 미국의 교도소는 사형집행을 정말 집행 한다. 그것도 수시로. 이런식이면 억울한 사형이 없을 수가 없게 된다.


심지어 미국은 기업가들이 선거유세에서 정치적 편향된 의견을 물질적 공세로 퍼부을 수 있는 권리가 법으로 인정된 나라다. 소수의 자유가 다수의 자유를 위협하고 소수의 권리가 다수의 권리를 막을 수 있음에도 그러한 소수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평등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부정부패가 있다고 해도 미국거대제약기업에 의해 마약성 진통제 허용으로 온국민을 마약에 노출시켜 해마다 마약중독율과 사망율이 급증하고 있는 미국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민간에게 넘길 것이 있고 넘겨선 안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민간에게 넘어간 미국은 결국 대기업들에게만 유리한 민주주의 아닌 자본의 나라가 되었다.


저자가 로스쿨로 진학을 결심하게 된건 뜻밖에도 한국에서 군대생활을 할때 함께 있던 선배의 우연한 충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대에선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더니 사회에 나와선 그렇게 재미가 없단다. ㅎㅎ 여튼 그렇게 로스쿨로 진학해서야 우연히 전태일 평전을 읽고 조영래 변호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는 보지 못했거나 볼수 없었던 것들에 조금씩 관심이 가기 시작하여 노동법, 인권법, 형사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형태로 여전히 인간 최소한의 요구 마저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아직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아직은 그분들처럼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함을 고백하고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가슴에 품고 그들의 삶에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보내고 있는 저자의 마음 십분 이해한다. 우리는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누구나 품을 수 있다. 정의의 가치를.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살았고, 또 형태가 없는 물처럼 살아봤으니, 법을 배우고 난 뒤엔 나도 한 번쯤은 거칠게 몰아치는 물처럼 세상을 뒤흔들어보자고. 이 다짐 하나만큼은 꼭 이루어보고 싶어 '사회'를 다루는 노동법, '사람'을 다루는 인권법, 그리고 '정의'를 다루는 형사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모든 걸 골고루 다룰 수 있는 '사회정의부' 소속검사를 지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검사실에 들어와 바라본 법전 너머의 현실 세상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했다. 거칠게 몰아치는 건 내가 아니라 요동치는 세상이었고,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 그렇다보니 본격적으로 법을 공부하기에 앞서 세웠던, 세상을 뒤흔들어보자는 그 다짐은 이제 많이 희미해졌다. 사실 이제는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크고 굵직힌 사건들에 연연하기보단 작고 사소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생이 걸릴 만큼 커다란 일들을 살피고 공감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꿈의 크기가 줄었다고도 볼 수 있고,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이 싫지 않을 걸 보니, 한편으론 '진짜' 검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 240~241)


저자의 글은 한줄한줄 솔직담백하게 와 닿았다. <두 얼굴의 법원> 책을 읽으며 느꼈던 사법농단의 심각성도, <법에도 심장이 있다면> 책을 읽으며 느낀 개인적인 공명심도, <나는 뉴욕의 초보검사입니다> 책을 읽으며 다 떨쳐버릴 수 있었다. 법에 대한 생각을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초심의 검사가 전해주는 남의나라 법현실이 사그라들었던 내가 속해있는 법현실에 대한 희망을 다시 살려주었다. 가볍고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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