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자리의 미래 -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엘렌 러펠 쉘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왜 중산층의 직업이 사라지는가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 - 갈수록 벌어지는 격차에 대비하라
일자리 초격차 시대가 온다 - 경제성장과 소득에 관한 새로운 통찰과 전망
결국 문제는 고용의 질이다! 일자리 정책에서 '낙수효과'라는 해법은 없다!
일자리 지킬 것인가? 얻을 것인가?
기본소득은 정말로 게으른 국민을 만드는가?
전통적인 제조업은 다시 부흥할 수 없는가?
자유시장에서 노동조합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가?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직업훈련을 시켜야 하는가?
띠지에 있는 질문들에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찾은 답들은
NO NO NO NO NO 였다.
일자리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은 유의미하며, 전통적인 제조업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노동조합은 새로운 형태로 늘 필요하며,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였다.
AI 시대가 되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로봇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직종의 직업들이 아래에서부터 먼저 사라질것 같지만, 천만에! 지금 안정적으로 보이는 중산층의 직업이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되고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오히려 단순노동직종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AI 시대건 로봇시대건 다가올 근접한 미래는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더 늘어날 것이다. 왜? 자본주의적 생.산.성 때문에. 기계설비투자비용 과 인간의 노동력에 지불하는 비용을 계산했을 때 기계값보다 더 싼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직종은 당분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기계설비값이 싸질때까진. 하지만 기계값보다 비싼 인간의 노동력이 있다면? 기계로 AI로 대체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산층의 직업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선망해마지않는 바로 그 직업들. 대학에서 인기높은 바로 그 직업들.
THE JOB 이라는 제목으로 2018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자리의 미래' 라는 제목으로 바로 한국어판이 나왔다.
미국사회에서의 JOB 이라는 것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한국사회에서 거의 동일하게 적용시켜도 되겠다 싶을 만큼 유사함이 많았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축소된미국사회라고 할 만큼 경제지도가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었다.
세계 경제의 흐름 속에서 대부분의 일자리에는 특정한 '고향'이 없다. 기업들은 어떤 곳이건 터전을 잡을 수 있으며, 원가 계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일자리를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국가인데도 억지로 그 일자리가 그곳에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은 먹혀들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이익이 최우선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산업화 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일자리(job)'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일(work)' 까지 포함하게 됐고, '일' 이라는 단어는 '일자리' 의 부분집합으로 전락했다. ... 아무리 '좋은 일자리' 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좋은 일' 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일자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 그 한계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책은 '좋은 일' 이 가져다주는 인간적 '존업성' 과 인류에 관한 '더 깊은 이해'라는, 오로지 '좋은 일'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일' 과 '일자리' 의 구분은 영어단어로의 구분을 보고서야 아~! 싶었다. 우리는 일자리 에 급급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 그 자체에 더 집중해야 할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생각의 전환은 이 책의 핵심이자 미래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우리 모두가 직업적인 경력에 대해 개인적으로 철저히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비참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만약 공공정책까지 이런 헛된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정책은 역효과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곳을 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리고 책의 초반부터 일자리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반론을 준비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일자리에 지원했다가 퇴짜를 맞으면 사회 시스템을 탓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원자들이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다. 구직자의 태도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점은 상당히 상이한 고용정책을 펴는 두 나라의 고용전략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직장에 지원한 사람들의 기술과 성과에 초점을 맞춘 매우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우선 한 번 걸러지게 된다. '스펙게임'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통해 지원자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능력을 시험받기도 하는데, 이때 나이와 같이 업무와는 굳이 연관성이 없는 요인 때문에 탈락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지원자들은 분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 갉아먹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공정하기도 한 시스템의 잘못이며, 이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케미스트리게임'이라고 이름붙인 시스템과 싸워야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그 일자리 자체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해서도 몰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를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거나 그 일자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묘사해야 하며, 동시에 그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의욕을 과시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케미스트리 게임'을 하는 동안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자긍심이 위축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종류의 잘못이 발생되면 그들은 회사나 사회시스템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뭔가 익숙한 내용같지 않은가? 한국사회에는 어떨까?
현대 인류는 자신의 무제한적인 욕구와 충분하지 않은 충족수단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노예화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알아서 야근하고 초과근무하고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자리에 좋은 것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 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저자는 단호히 이야기한다.
다수의 고용주들이 요즘 '좋은 직원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하곤 하는데, 좋은 노동자들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좋은 노동자들이 보수가 형편없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자신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경제원리가 보여주는 바는 노동력 공급 부족이 아니라 과다 공급이 고용주로 하여금 기준 이하의 고용 조건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건만 개선된다면 지원이 폭주하기 깨문에 '노동력 부족'이라는 투덜거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좋은 일자리' 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좋은 구직자' 가 넘쳐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일자리' 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한 '좋은 구직자'들은 점점 더 형편없는 처우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하면 노동자들의 스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용주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스킬만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에 오려는 노동자들을 충분히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입장과 취업할 곳이 없다는 입장에 대해 언제까지 대치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안달하기 전에 '좋은일자리'에 대해 제대로 심사숙고해봐야 할 때가 된게 아닐까?
최근까지도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동화가 인간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영구히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인간은 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기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대체돼왔긴 하지만 '비교우위'라는 경제 원리에 따라 인간은 기계가 열위에 있는 분야로 옮겨가면서 계속 우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을 대체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다 덜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이리에 집중하도록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줬던 것이라고 믿어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낮으면서 반복적으로 단순한 작업을 하는 일자리들만이 자동화에 취약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믿음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예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들은 버거를 만들 때 자동으로 패티를 뒤집는 기계들을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도 도입을 별로 서두르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패티를 뒤집는 일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며, 강력한 노조가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이런 일에서 고임금을 받아야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비용을 감수하고 기계를 들여놓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심장수술을 한다든지, 변호사로서 이혼소송을 담당한다든지, 금융전문가로서 재정적인 충고를 한다든지, 건축을 설계한다든지,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이나 다른 복잡한 일을 하며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의 경우 그들의 높은 임금을 상쇄시킬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비용은 금세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걷고 뛰며 자유롭게 움직이며 초코칩머핀과 강아지를 단번에 구분하지만 수학문제에 머리를 싸맨다. 로봇은 아직 계단을 자유롭게 오르내리지 못하고 AI 는 초코칩머핀과 강아지얼굴을 구분하기 위해 수백만 데이터를 학습해야 하지만 고정된 상태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수억단위 계산문제를 푸는데 1초도 안걸린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 같은가? AI 가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 같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좋은 일자리' 에 적합한 존재가 인간일까 아닐까? 앞으로 인간에게 적합하면서도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타트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많아진다는 논리는 또 어떤가? 스타트업 기업은 작은 규모이고 창업자가 곧 직원으로 시작하며 다른 직족에 있다가 합류하는 직원이 있거나, 창업자가 직원인 그 상태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단 하나의 일자리 창출이 과연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순 일자리'의 개념이다. 이는 만들어진 일자리 숫자에서 없어진 일자리 숫자를 뺀 수치이다. 이런 계산법이 적용된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스타트업 기업이 지속적인 일자리를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고개 끄덕여진다. 게다가 스타트업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통상적으로 기존 회사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보다 생산성도 낮고 보수도 낮으며 훨씬 안정적이지 못하다. 스타트업은 상황의 변화일뿐 일자리해결방법은 아닌걸로 보인다.
우리는 중앙집권적인 기능이 훨씬 덜한 일터에서 일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도전에 당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독립적인 상인이나 농부, 장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로 다시 되돌아간 셈이다. 우리가 하는 일의 정체성이 어떤 특정한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사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도 반복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업과 개별수공업 형태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대규모 형태로 바뀌었던 경제가 다시 소규모 개별형태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기념비적인 연설에서 "안주하지 말라" 고 했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에게 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가 아닌 우리에게는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만약 여러분이 엄청난 열정으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에 따른 월급봉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엇의 전조가 될까? 물론 나는 스티브 잡스가 불량한 의도로 되지 않는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이블처럼 되는데 있다. 이 경구는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이 조언은 마치 우리가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그 관습적인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열정만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열정이 미래의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는 매우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열정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속이 좀 시원했다고나 할까?! 몇년전 개봉했던 영화제목이 떠오른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앞에서도 계속 말했고 앞으로도 계속 말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더 희귀해진다. 그런데 일자리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자리가 의미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해서는 여러 이유로 힘들고 고달프다. 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일이든 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일을 하고 그 일자리에 몸담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이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사회적, 국가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지금 당면한 명확한 도전 과제는 새롭고 좋은 21세기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울러 20세기 계산법에 기초해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확실히 점검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또다시 답습하지 않고, 일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정서적,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과제는 아니지만 기운을 북돋아주는 시도가 될 것이다. 내 눈에는 이 과제를 시작할 지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다름아닌 '학교'다.
대학은 갈수록 점점 더 직업훈련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유용한 방향일까?
고등교육의 시장 가치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희소한 상황에서 가장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1위인 한국을 제외하고 전세계 어떤 나라의 시민들보다도 많은 숫자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이런 특권을 위해서 지불하고 있는 비용도 대단히 높다.
희소성이 일반화가 되면 다시 새로운 희소성을 찾아가는 것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반복한다면 끝을 모르는 삶의 피폐함으로 더 다가가지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것을 바꿔야 한다.
평균소득을 왜곡시키는 빌 게이츠 효과 라는게 있다고 한다. 빌 게이츠 효과란 평균을 결정할 때 이상값이 포함돼 계산에 작용함으로써 결과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의미한다. 즉, 엄청난 부자가 포함된 집단의 높은평균소득을 보고 그 집단이 모두 고소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엘리트들이 평균을 크게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들은 일반인들의 재산이나 소득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향상시켜주지도 않는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실업인구 가운데 50퍼센트 이상이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교육 프리미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학 졸업자들의 평균 평생소득은 최근들어 고등학교 졸업자의 소득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 는 책속의 인용구는 미국보다 더 심각한 한국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만 같다. 소득불균형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요인들 중 '교육적인 요인' 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올바른 요인이 아니다. 더이상은
특정 산업에서 어떤 수준의 보수를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한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공적인 자원을 특정 직업군에 대한 '적시' 훈련에 모두 집어넣는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도박 이상의 것은 아니다. 어떤 대학도 일자리 시장의 수요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해 '적시교육'을 제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학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란 원래 단어를 정의할 때 의미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며,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수정 구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유교양 교육이 곧 해방 교육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졸업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지식들이 그들이 어떤 것들을 추구하든 간에 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자가 만난 어느 대학 총장의 말은 곧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앞 쪽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른다.
사실 미국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기 위해 도박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유럽은 학생들에게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지만, 미국의 학생들은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일론머스크와 같은 기업가들을 떠받들도록 교육받는다. 산업계에서 영웅은 일반적으로 '혁신가'를 의미한다. 그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개인적 측면에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무엇을 준비해줄 수 있는지 상환없이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어떤 혁신' 인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혁신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일' 과 '일자리' 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풀어놓고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앞에서부터 내내 다양한 문제점들을 조금은 지루하다싶게 분석해놓다가( 솔직히 가독성은 좀 떨어지는 책이었다. 자꾸 문제점만 지적하다 보니 읽으면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그래서 뭐라고 마무리 할 건지 궁금해서 오기로 끝까지 읽은 맘이 없지 않다 ) 뒤에 가서 약간의 해결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는 일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믿고 있다.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핵심 사안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모든 시민의 욕구와 능력과 재능에 맞게 기회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으면 기업은 계약에 대한 절충과 소송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고, 정부는 이념 논쟁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높을 때는 기업과 정부 모두 더욱 민첩하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사회적 신뢰' 다.
저자는 사회적 신뢰도가 높고 정부가 책임을 지며 개인들과 소통이 잘 되는 체제가 미래지향적이라고 제시한다. 개인에게 실업의 책임을 돌리는 사회는 발전가능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시스템이 바로 설때 개인은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정말 개인이 져야할 책임만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개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지금
저자는 정부와 사회에 요구하는 시스템과 별도로 개인이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생제도들도 제시하고 있다. 협동조합 이나 프리랜서들 같은 비정규직의 노동조합과 연대, 종업원 지주제, 맞춤형 생산방식 등 노동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고 저자는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국가적인 일자리 대란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희소해지고 있는 '기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언제나 충분한 정도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기술은 인간이 적절히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 삶을 개선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국가 차원의 일자리 대란은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낳을 수 있는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변화에 대해 준비하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 그것으로부터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굳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좋은 일자를 지원하고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실행력 있는 방법은 공공 정책의 핵심 어젠다가 되도록 정부와 기업과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계화된 디지털 경제에서 우리는 민간 분야의 장기적인 고용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 고용을 통해 시민들이 소득을 올리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온 전략은 과거의 유물이 됐다. 안타깝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미래는 디지털 경제의 창조가 아니라 집단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기술은 죄가 없다. AI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주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기술은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동반자다. '나쁜 일자리' 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 법칙의 소산이 아니라 '치료해야 하는 사회 구조의 결함' 때문이다. 일과 일자리가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제로섬 게임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민주주의에서 일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것이다. 교육과 전문성은 여전히 긍정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스킬 우선' 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을 기계보다 한 걸음 앞서도록 교육하는 일은 헛되다. 그보다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역설계해서 우수한 기술을 십분 활용해 사람들이 일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도출해내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고용주들이 우리에게 '선물' 이나 '의미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하는 그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생산품이라는 사실에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일자리에 가서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 '좋은 일자리' 가 창출된다는 것,
개인이 져야 하는 책임보다 사회와 정부가 져야 하는 책임이 제대로 인식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스템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일자리의 미래가 곧 일의 미래는 아니라는 것은 천천히 읽어지는 이 책이 주는 소중한 교훈이었다.
힘들기만 한 work 는 의미있는 job 으로 바꿀 수 있다.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