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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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

푸가가 뭐지?

검색을 해보았다.


푸가는 하나의 주제(때로는 2개 혹은 3개의 주제. 이 경우에는 2중푸가 혹은 3중푸가라고 한다)가 각 성부 혹은 각 악기에 장기적이며 규율적인 모방반복을 행하면서 특정된 조적(調) 법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는 악곡이다.


역시 백과사전은 어렵다;;;

...무슨 소리인지;;;

검색해보았다.


다성음악에 의한 대위법적 모방의 한 기법으로, 하나의 선율을 한 성부가 연주한 뒤 이를 따라 다른 성부가 다른 음역에서 모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쉽게 설명하면 기악적 돌림노래라고도 할 수 있다.


아~! 돌림노래!!

이별의 돌림노래...


이 책은 이별에 대한 감상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별에 대한 생각들을 반복적으로 풀어내고 있으므로 이별의 돌림노래가 맞다.

그런데 읽으면서 초반에 든 생각은

내용상 20대후반이나 30대초반 남성이 여성과 이별하자마자 적은 일기같아서 내용에 나오는 그사람이 정말 사람을 지칭하는 건지 아닌지 헤깔렸다. 왜냐하면 나는 저자가 나이지긋하신 철학자 남성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기 때문에...


많은 책들이 책 앞이나 뒤에 저자의 약력이나 소개나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같은, 저자나 혹은 책에 대한 안내나 설명을 담고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전혀 그런것이 없었다. 저자가 누구인지 언제 썼는지 이 책은 어떤 책인지, 표지에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일기 라고 써 있는데 정말 개인적 일기라는 건지 일기처럼 쓴 글이라는 건지, 저자의 직접적인 이별경험을 담은 일기라는 건지 철학적 사고를 담은 글이라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책 내용 자체만으로 느끼라고 사전정보를 뺀 것일수도 있지만, 나이지긋하신 철학교수가 쓴 이별일기를 읽는데 서투른 어린남성의 첫사랑 이별일기 같은 느낌을 자꾸 받다보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또 검색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철학과 고전을 강의해온 철학자로 작년 66세의 나이로 작고하셨다. 이 책은 2017년에 현대시학 에 발표되오던 글과 사후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유고집이다. 기사에 따르면, 저자는 다만 글쓰는 사람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는 소설가를 꿈꿨고, 철학을 공부한 것도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 끊임없이 글을 썼고, 그의 컴퓨터에는 발표하지 않은 수많은 글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도


소설... 내게 이 책은 소설로 정리되었다.

소설가 한강의 책 중에 [흰] 이라는 책이 있다.

시집사이즈의 작고 얇은 책인데 시 같기도 하고 일기같기도 한 그 책은 '흰' 것들에 대한 상념들을 쓴 그 책은 소.설. 로 세상에 나왔고, 소설로 분류되고 소설로 읽히고 있다. 읽고 나서도 이 책이 소설인지 아닌지 헤깔렸었는데... [흰] 을 읽은 경험은 내게

[이별의 푸가] 를 소설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마중물이 되었다. 글을 쓰며 철학을 하며 소설가를 꿈꾸었다는 저자가 남긴 이별에 대한 단상들은 내게 소설로 읽혀지고 나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책속에 책이 있는 책이다.

바르트와 베냐민과 프루스트의 글은 수차례 인용되고 재해석된다.

다른 작가들의 글들은 저자에게 이별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 이별의 장면속에 저자는 본인이 직접 뛰어들어 상상하는 듯 했다. 그렇게 직접 느낀 이별의 장면과 이별의 마음과 이별의 감상을 일기인양 소설인양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한 문장만으로도 한편의 작품을 완성한 저자의 글이 느껴지고, 한 장면만으로도 한편의 영화를 완성한 저자의 그림이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저자의 이별의 시간들은 저자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다.


이제야 나는 저자가 누구와 이별한건지 궁금해지지 않았다. 어린 제자와 불륜의 감정을 품었었나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젊은 시절 헤어진 첫사랑에 대한 상념인가 하며 알수없는 저자의 과거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언제 쓴 글이건 상관없어졌다. 왜냐하면 내게 이 책은 소설이니까.

아무리 현실감 높은 소설도, 작가의 자전적 실화인것 같은 소설도, 소설이라고 한 이상 허구가 된다. 이 책속의 이별은 실재에 대한 허구이자 허구에 대한 실재이다. 이제 나는 이 책이 다시 보인다. 저자의 이별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부재는 다르다. 부재는 있음과 떨어질 수 없도록 매여 있는 없음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 속에서 있다' 그리하여 내가 너무 아파하면서도 이별을 끝내지 못하는 건 당신의 없음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당신의 '부재' 때문이다. 부재 속에 당신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의 없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저자에게 부재는 단 한사람의 부재가 아니다. 자신만의 누군가를 지칭한 그 한사람의 부재가 아니다. 저자가 읽는 책속에 나오는 부재는 저자에게 이별로 해석되어진다.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번의 우리와 매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이별은 항상 존재한다. 사는동안 내내.


순간은 시간이면서 시간이 아닌 시간이다. 불꽃이다. 타오르는 순간 '이미' 소멸해버리는 시간. 존재하는 순간 '벌써' 부재하는 시간. 현재이면서 이미, 벌써 과거인 시간, 리무진을 타자 이미 내리는 시간. 만남이자 벌써 이별인 시간.


이별은 순간순간 일어난다. 시간이 가는 동안 매시매분매초 내내.


그리하여 부재는 공간이 아니라 악보가 된다. 그 악보 위에는 이별의 음표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별과 부재의 악보를 연주한다. 그러면 그 음악은 더 이상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 그건 천사의 날갯짓이다...... 베냐민은 독서는 쓰여 있지 않은 걸 읽는 일이다, 라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말한다 '연주는 그려져 있지 않은 음표들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노래한다.  저자가 부재했던 이별에 대한 푸가를.


프루스트는 언제나 '미지의 여인'을 찾는다. 그 여인은 아름다운 여인도, 현명한 여인도, 우아한 여인도 아니다. 그 여자는 그도 누구인지 모르는 여인이다.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 그런 여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이 '미지의 여인'을 찾아가는 긴 대하소설, 모험소설이며 여행소설이다.


저자는 프르스트 처럼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적 없지만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 과 늘 이별하고, 그 이별을 기록하며 푸가를 노래한다. 스스로 이 악기도 되었다가 저 악기도 되었다가 하면서 늘 누군가 있다가 가버린 듯한 남겨진 부재를 기록한다. 그 이별을 읽고 나는 저자의 부재를 느낀다. 물어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저자의 이별에 대해 저자의 부재로 답을 찾는다. 이별의 푸가 는 내게 소설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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