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센서스
제시 볼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5월
평점 :
1998년 저자의 형이 세상을 떠났다 스물네살이었고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형은 저자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저자보다 작았고, 저자는 형의 병원 침대맡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닥치기 전, 둘이 함께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저자의 형이 아직 걷고 뛰어놀 수 있던 시절에도 어린 마음에 언젠가는 저자가 형을 돌봐야 한다는 걸 이미 알았다. 저자가 형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저자와 형이 함께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무거운 의무를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으로 떠안고 저자의 일부로 품었다. 저자는 사람들이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전혀 이해 못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써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린 시절에 머릿속으로 그려본 어른이 된 형과 저자의 관계는 부자관계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다 큰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18년에 나온 책이 CENSUS이고 그 센서스를 2019년에 내가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런데 어떤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껏 접하지 못한 장르이고 어느 장르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는 소설이었다.
책의 제목은 센서스, 인구조사 이다.
화자는 의사였지만 아내가 죽은 후 얼마안되 시한부 판정을 받고나자 의사를 그만두고 인구조사원이 되어 아들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주체가 불분명한 인구조사는 인구조사원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질문을 하고 답을 기록하고 인구조사에 응했다는 표식으로 갈비뼈 근처에 문신을 새긴다. 센서스에 응했다는 문신을 여럿 가진 사람도 있고 처음 문신을 새기는 사람도 있으며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A도시에서 시작한 조사는 Z도시 까지로 이어지며 풍경은 농촌에서 공장지대에서 황무지에서 인적이 드문 기차역으로 이어진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자신마저도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다운증후군 아들과 함께 떠난 여정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천천히 자신의 무덤으로 가는 여행같았다. 남겨질 아들과 이별하는 방법치고는 독특한 분위기랄까... 슬프다거나 애틋하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다운증후군 아들을 둔 아빠의 독백으로 서술되는 소설은 읽는 내내 뿌연 안개속을 헤메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들은 성장한다. 아빠 옆에만 있다가 인구조사를 직접해보기도 하고 운전을 조금 해보기도 하고 방문할 집을 선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일을 맡을 준비를 도와준 건 아들이었다. 아들은 말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해 내게 한 가지를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를 가지고 타고나서 매 순간 서로를 잰다는 사실을. 그 애는 태어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인구조사를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내 아들의 인구조사가 우리의 작업을, 우리의 여행을 북쪽으로 이끌었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어릴적 자신의 사진을 보고 그 아이가 자기자신인 것을 모른다. 그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꿈속에서 엄마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문을 두드렸다며 깨어나 엄마는 어디 있는지 대답하지 않는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아빠가 많이 아프고 곧 없어질 것이라는 말에 함께 기차를 타고 집에 가자고 한다.
다운증후군 아들은 태어난 이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었고 인구조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그 연속선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빠의 자 는 세상을 쟀지만 아들의 자 는 사람을 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여행 내내 무터의 책을 읽는다. 무터는 이름난 시장이자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자식과 세 명의 남편을 두고 당대의 극작가로 칭송받은 여자이지만 가마우지에 집착하고 연구하고 책을 펴낸 사람이었다. 그 가마우지 관련 책을 여행 내내 읽는다.
아빠가 처음 가마우지와 맞닥뜨린 것은 어릴 때 읽었던 밀턴의 실낙원 이라는 책속에서 였다. 실낙원에서는 사탄이 가마우지로 분장한다.
무터의 책을 읽으며 아빠는 가마우지 생각을 많이 한다. 사탄은 원래 천사가 아니었던가? 라고도 생각하면서.
표지를 다시 봤다. 무심코 봤을때는 손바닥을 양쪽으로 벌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빨간색 부리가 있었다.
새였다.
검은색 새.
가마우지!
손으로 그림자 놀이를 할때 엄지손가락을 서로 걸고 양쪽으로 손을 벌려 새를 표현하곤 한다.
그렇게 날개를 펼친 모양의 그림자는 천사같기도 하다.
표지 속 검은새 뒤에 있는 회색의 형상은 그림자일까 다른 가마우지 일까
화자에게 가마우지는 사탄의 형상이었을 까 천사의 형상이었을까
아내는 광대였다. 그녀의 광대놀음은 흔히 생각하는 광대 짓과는 크게 달랐다. 그녀는 광대라 해도 아주 이상한 광대였다. 연기를 하면서도 연기는 없다고 느껴지게 하는, 보는이로 하여금 삶 그 자체를 어쩌다가 목도하게 된 느낌을 주는 연기자였다.
(여기 나오는 광대공연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라는 단편을 생각나게 했다. 관람객이 없거나 거의 없는 연극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연극 그런데 보다보면 뭔지 알것만 같은 무언의 침묵. 연기를 하지 않는 것이 연기인 연극, 삶을 반추하는 연극 ...)
아들을 낳고 그녀는 영영 무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을 예전보다 덜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들을 위해 공연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아들을 낳고 키운 덕분에 나는 훨씬 좋은 의사가 되었다. 기본적인 입장을 확고히 다졌기 때문이다. 누구한테도 특별히 기대를 품지 않고 누구라도 얕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자기평가에서 나오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만만하게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겸손을 갖게 되었다. 알다시피 나는 그런 입장에서 인구조사 일을 맡게 되었다.
아들, 그리고 나와 함께 전국을 여행하는 게 아내의 바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굳어져 거스를 수 없는 명력이 되었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단순한 여행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여행에서는 선택을 내린다는 게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다. 이상하지만 인구조사는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아내와 아들, 내가 있었다면, 이제는 나, 아들, 인구조사라는 전혀 다른 삼각조가 있다. 공통의 목표로 연대한 우리는 굳이 경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느낄 수만 있으면 되었다.
인구조사의 모습은 점차 변해 간다.
인구조사원 교육을 받으면서 배웠던 데로 조사하다가
조사항목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여러집을 방문하다가 몇몇 집만 방문하게 되며
이마저도 심장발작으로 점점 어렵게 되어 뒤의 도시들은 패스하고 기차역을 향해 가는 길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인구조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친절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빠도 위급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아빠와 아들의 그런 여행에서의 경험은 기차역에서 아들 혼자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믿음이 된다.
엄마 아빠 아들 셋 이었지만 아빠 아들 인구조사 셋 이 되었다가 아들 인구조사 사람들 셋 이 되는 게 아닐까
아들은 사는 내내 인구조사를 하는 걸로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만의 자 로 사람들을 세상을 재면서
인구조사라는 낯선 직업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질 세상에 혼자 남겨질 다운증후군 아들을 위한 세상맞이인 셈인것 같다.
아빠의 불안과 아들의 천진함은 인구조사 여행을 통해 사람들로 채워지고 개인으로서 독립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면서 스스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빠도 아들도
그리 두꺼운 편이 아닌 소설이었음에도 한장한장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시한부삶 아빠의 독백은 내가 놓치고 넘긴 부분은 없는 건지 신중하게 책장을 넘기게 했다.
그 생각의 흐름은 추억을 회상하고 기억을 소환하고 예상을 추측하며 현실인듯 현실같지 않은 인구조사와 도시들을 배경으로 세우고 담담히 죽음을 수용한다.
저자의 다운증후군 형에 대한 추억은 소설속에 스며들어 책뒷편에 실린 사진들의 소년은 소설속 아들인듯 저자의 형인듯 둘다인듯 여기게 한다.
화자는 아빠이지만 저자의 독백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하는 사진들이다.
다운증후군 당사자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을지 알수 없다. 아빠도 저자도.
그래서 더욱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헤깔리기도 한다. 소설이지만 소설같지않고 그렇다고 현실이랄 수는 없는데 판타지도 아닌...왜 다운증후군 형의 죽음이 아닌 다운증후군 아들의 죽음이 아닌 보호자인 부모의 죽음을 그렸을까
저자가 다운증후군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쓴 이 작품은 왜 아빠의 죽음인지 왜 가마우지인지 온전히 이해될때 그 바람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소설이었다. 연극을 보는데 연극을 하지 않는 연극배우를 보듯이. 연기를 보고있을 뿐인데 삶을 보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