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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제발 얼른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꿈꾸었던 시절이 있다. 지금 이 시간이 싫고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싫었고 엄마의 잔소리와 선생님들의 간섭이 미웠다. 나만 빼고 다 잘나고 멋진 것 같고, 내 인생만 꼬이는 듯했다. 만약 윤아처럼, 윤아 엄마같은 사람과 함께 살라고 했다면 못견디고 뛰쳐 나갔을 것이다. 소중한 시간이 휴지조각처럼 느껴졌고 하루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했다. 한마디로 시간이 소중하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십 분의 시간을 사고 싶어했던 윤아의 생활을 들여다 본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을 듯하다. 엄마의 지휘 아래 하루종일 기계 돌아가듯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윤아만의 고충은 아닐 것이다. 지금을 사는 아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시간이 있고,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두근거리는 설레임도 될 수 있고, 평온을 주는 쉼터일 수도 있고, 무섭고 어리둥절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징조일 수도 있다.
내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순간을 상상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이 뭐지? 평소 좋아하던 이성친구의 집을 몰래 들어가서 엿보기, 은행에 들어가서 갖고 싶은 만큼 돈을 가방에 넣어 평생 놀고 먹고 실컷 쓰기, 백화점에 가서 평소 눈독 들여놓았던 옷을 싹쓸이 하기... 투명인간이 되게 해주는 망또를 입고 세상을 활개치는 순간을 꿈꾸며 살았다. 그래서 윤아가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십 분'이 부러웠다. 내가 원할 때 나타나서 나를 구해줄 든든한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했다.
나는 앨범을 넘겨 보았다. 병원 침대에서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좀 전에 보았던 사진도 그랬지만 자세한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아빠랑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이 모습들도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보면 볼수록 아빠, 엄마 모습이 낯설었다. 누군가가 지우개로 내 이야기를 지운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143쪽)
'나 만의 십 분'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나의 행복한 기억을 빼앗아 간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는데, 행복한 순간을 다 잃어버린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상상조차 하기 싫어진다.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 친구 다현이와의 소중한 약속들, 아빠와의 소중한 시간들, 모두 하나씩 잃어갔다. 그건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를 쳐다보며 웃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꺄우뚱 거릴 수밖에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쓸쓸해질까.
윤아가 더이상 안되겠다고 깨닫고 시간을 팔고 행복한 기억을 되찾아 올 때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일은 또 꼬인다. 한번 망가진 매듭은 다시는 풀리지 않는 법. 남의 행복한 기억들이 찾아오면서 더욱 힘들어지는 듯하다.
그래서 시간을 샀다. 과거의 행복한 기억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전교 1등을 했다. 그런데 시간을 살수록 외딴섬에 갇힌 것처럼 무서웠다. 생각해 보니 과거의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행복한 기억을 찾기 위해 시간을 팔았다. 행복한 기억이 많아졌다. 그 기억 속에서 인증 시험 만점을 받은 영어 수재도 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일 뿐 내 행복이 아니었다(187쪽)
여전히 나만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오롯한 시간을 꿈꾸지만 더이상 바라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 잊지 않고 그리워하던 이들과의 시간을 잃어버린다면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진정 바라는 건 뭐예요. 언젠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나요. 비록 지금 고생스럽고 답답하고 힘들지만 꼭 찾아올 행복을 위해 지금의 '나'를 포기하고 살 건가요. 윤아의 두려움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꿈은 꿈일 뿐,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