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 도둑놀이
퍼 페터슨 지음, 손화수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9월
평점 :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이인 동시에 영원한 경쟁자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닮아가는 아들, 아들에게서 자극을 받으며 조금씩 어른이 되는 아버지. 둘은 죽는 날까지 질투하며 사랑하고, 기억한다. 트론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같은 여인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되고 그것에 아파하고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주면서 깊이 사랑하는 사이. 또는 영원한 숙제를 남겨주고 떠난 아버지를 미친듯이 그리워하는 존재, 혹은 미워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었을까.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사건이 없는데, 이 소설은 재미있다. 살면서 겪게되는 일들을 외면한 채 자극과 흥분을 유발하는 소설과는 격이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때로는 지루하고 너무나 평범하다. 왜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두근거리는 사랑도 증오도 투닥임도, 실제 생활에서는 그런 일들이 매우 조용하고 무미건조하게 일어난다. 무거움과 지루함을 잘 견디면서 하루 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소설이다.

열다섯 살의 트론, 예순 일곱 살의 트론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1940년대, 전쟁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시대와 그 후로 50여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가 그리 다르지 않다. 오두막 생활, 자연과 벗삼아 외롭게 사는 삶,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에 고픈 사람들의 이야기.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본성은 이어져 나간다.
말 도둑놀이를 가르쳐주었던 친구 욘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 욘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 아버지의 알 수 없는 행동과 생각,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다. 통나무를 패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빵을 뜯어먹고, 개와 친구삼아 지내는 노년의 삶 역시 빛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인생을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기억에 첫 신호를 보내준 이는 라스다. 라스가 살아온 인생을 짐작해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그가 열 살에 저지른 실수가 평생 어떤 모습으로 그에게 , 그의 가족에게 영향을 주었을지, 정말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당당하다.
이야기속에 철학이 녹아있다. 사람들에 대한 생각, 자기만의 통찰, 그리고 냉소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충격과 비틀어짐을 간직하고 있지만, 소설은 잔잔하다. 사람의 향이 잘 간직되어 있다. 무섭게 흐르고 있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행위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