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용서해주오. 용서해줘. 난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살려둘 수 없을 만치 사랑하는 거야."

(<벌레> 중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보통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보통 기괴(奇怪)나 음울(陰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기이하고, 괴상하고, 음침하며, 우울하죠. 물론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이 본격 추리소설과 변격소설(환상, 괴이)로 나뉘기는 하지만(굳이 나누자면), 사실 본격 추리소설도 대부분 기괴하고 음울했던 것 같아요. 물론 위의 표현은 조금 고급스럽다면 고급스러워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사이코나 변태의 기운이 느껴지는 소설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사실 누구나 다 변태이고, 사이코이지 않을까요.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마음속에는 음침하고 기이하며 미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속으로 몇 십 년을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을 무시합니다. 친구 녀석은 그런 그녀와 자랑스럽게 희희덕거리며 즐깁니다. 그녀의 유혹에 순간 넘어가고 무시를 당합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일부러 그런 "척"을 했던 거죠. 놀리기 위해서 말이죠. 수치심과 굴욕감. 그래서 "허허"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그녀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생체가 아닌 사체로라도 말이죠.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기면 문제가 있겠지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에도가와 란포는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변태적인 감성을 교묘하게 건드리고,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외면할수록 더욱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듯한 느낌. '나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미친놈처럼 낄낄 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즐기고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이미 동서문화사에서 <음울한 짐승>과 <외딴섬 악마>가 출간되었죠(저작권 계약 없이 말이죠). 이번에 출간된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기괴환상>은 <음울한 짐승>에 포함된 '인간의자', '빨강 방(붉은 방)', '거울지옥', '배추벌레(두드림에서는 '고구마벌레'라는 제목으로 표기)' 4편의 단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4편 모두 에도가와 란포의 대표작이죠.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고요. 그렇다면 이번 작품에 실린 나머지 작품들은?(참고로 22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확실히 (앞서 언급한) 대표작을 뛰어넘는 작품은 조금 부족합니다. 그러나 의외의 발견인 작품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그의 대표작 말고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작품들도 있거든요. 반면 아쉬운 작품들도 있고요. 몇 작품만 간략하게 소개할게요. 정말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공기사나이>와 <악령>이라는 작품은 미완성작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습니다. <붉은 방>이나 <악령>과도 조금 통하는 면이 있는데, 바로 사는 게 지겨운 인간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돈 많은 인간들은 사는 게 심심하죠. <공기사나이>는 그런 돈 많은 두 인간이 지겹지 않은 일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내용인데, 추리소설 평론가나 독자들에 대한 비판도 살짝 엿보입니다. 이름을 서로 바꾸어서 작품을 발표하고, 아이디어도 서로 공유를 하거든요(그러니 독자나 평론가는 괜한 삽질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 돈 많은 두 젊은이의 일탈을 그린 소설인 줄 알았는데, 글쎄 친구 한 명이 건망증인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건망증에 걸린 또 다른 친구의 집에 유령이 나타납니다. 죽은 아내의 유령(아내 죽음의 원인은 남편의 외도입니다. 그러니 유령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끔찍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진짜 유령일까요?). 암튼 이야기가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끝나버리더군요. 개인적으로 에도가와 란포도 이 이야기의 끝을 맺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악령>에도 조금 할 일 없어 보이는 심령학회 인간들이 나옵니다. 밀실살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범인이 떨어뜨린 암호 메시지(휠체어를 연상시키는 그림), 살인예고(영매가 다음 살인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이 안에 있다'는 고전적인 미스터리까지 암튼 흥미 있는 요소가 무척 많은데 역시나 미완성입니다. 편지 형식인데, 세 번째 편지가 없더군요. 에도가와 란포의 악취미. 이런 편지나 거짓말(<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형식의 소설이 많다는 점. 빠져나갈 구멍을 교묘하게 마련해 놓는 것 같아요. 능글맞다고 할까요? 오히려 이런 성격이 에도가와 란포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요. 암튼 재미있는 작가에요.

<독풀>, <손가락>, <화성의 운하>, <백일몽>은 초단편입니다. <화성의 운하>와 <백일몽>은 묘사 중심의 소설이고(그다지 가슴에 확 와 닿지는 않더군요), <독풀>과 <손가락>은 마지막 반전(?)이 의미심장한 소설입니다. 사실 <독풀>과 <손가락>은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촌스러운 작품이지 않나 생각해요. 낙태에 좋은 독풀 뜯어먹는 임신한 여자들이나 잘려나간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설정은 이제는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나와서 확실히 식상한 면이 있죠. 그 당시에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초단편 소설들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번 작품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알아보면, 우선 기발한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는 (보통은 반전이라고 하죠)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방공호>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를 읽었을 때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내용이 비슷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악취미라고 할까요? 두 거장의 작품 분위기도 몹시 비슷하고, 암튼 김기영 감독과 에도가와 란포 정말 비슷합니다(잡설을 잠깐 지껄였습니다). <방공호>는 결말이 끔찍하더군요. 역시나 이 소설도 에도가와 란포의 악취미가 살짝 엿보이더군요. B29의 공습 현장에서 벌어지는 섹스의 향연. 폭탄 불꽃놀이. 낭만적인 것일까요?

"천지는 광란하고 있었네. 나라가 멸망하려는 중이었지. 아마 우리 두 사람도 미치고 있었던 걸세. 우리는 몸에 거린 모든 것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인간처럼 몸부림치고, 광란하고, 울고, 신음했네. 애욕의 극치의 취해 몸을 떨었어."

(<방공호> 중에서)

<붉은 방>, <인간의자>, <고구마벌레>, <거울지옥>에 대한 느낌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들이죠.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사실 이번 작품의 부제는 '기괴환상'입니다. 따라서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환상, 공포, 기괴, 음울, 변태(?) 암튼 요런 감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입니다. (이거 또 개인적인 취향이 나오는데) 변태적인 취향의 작품 중에서 재미있는 작품으로는 <오세이의 등장>, <메라 박사>, <사람이 아닌 슬픔>, <벌레>라는 작품이 괜찮습니다. <누름 꽃과 여행하는 남자> 이 작품도 괜찮기는 한데(완성도 면에서는) 변태적인 느낌이 별로 없어서 개인적 취향은 살짝 아니더군요.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할까요? 뭐 암튼 그렇습니다.

<오세이의 등장>은 악녀가 등장하는 폐쇄공포를 다룬 소설입니다. 장난이 현실이 되고, 끔찍한 악몽이 되는 상황 변화에 대한 묘사가 정말 실감나게 그려졌더군요. 장난으로라도 궤짝에는 들어가면 안 되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의 두려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이런 기회를 결코 놓쳐버리지 않는 아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자.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완전범죄죠. 스스로 원해서 궤짝에 들어갔으니까요. 일석사조죠. 남편은 죽고, 내연의 남자와의 관계도 계속 가질 수 있고, 유산도 물려받고, 게다가 완전범죄. 굉장히 아이러니하더군요. 재미있으면서 곰곰이 되씹으면 무척 소름 돋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아이러니함 무척 좋아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메라 박사>는 연쇄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본격 추리소설과 기괴소설 중간쯤에 위치하는 소설입니다. 우선 빌딩의 5층 방에서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이유를 밝혀야 하고, 그 밝혀지는 이유는 역시나 기괴합니다. 에도가와 란포 하면 떠오르는 딱 그런 이미지의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메라 박사의 사악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사람이 아닌 슬픔>은 소재 자체가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사랑하는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새신랑의 기이하면서도 슬픈 로맨스입니다. 그러나, 변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로맨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레>.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단편소설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구마벌레>라는 작품에서의 벌레가 인간벌레인 반면 <벌레>라는 작품에서는 미생물 벌레입니다. 죽은 시체를 빨리 썩게 하는 미생물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사랑하는 여자를 납치해서 죽이고, 영원히 사랑을 나누기 위한 시체의 부식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미친 짓을 서슴없이 하는 인간혐오증에 걸린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마사키 아이조오는 그렇게 벌어진 후요우의 배 안에 얼굴을 박고 엎드린 상태로 죽어 있었는데, 처참하게도 그의 추악하게 일그러진 단말마의 손끝이 썩어버린 연인의 뱃속을 깊고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벌레> 중에서)

죽으면서까지 손가락을 죽은 (연인의) 뱃속에 깊고 집요하게 집어넣는 세심한 배려, 악취미 이러한 디테일한 묘사가 에도가와 란포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한 여자에게 미쳐버린 한 인간의 집요한 광기가 확 느껴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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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히로(그)의 생각: 가능할까? 오늘 밤 안으로 그녀가 자기 입으로 그 남자를 죽였다는 자백을 하게 하는 일이.

아키(그녀)의 생각: 나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맞이했다.


다음 날이면 헤어질 빈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남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지 이들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됩니다만 사실은 속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들의 취미는 여행입니다. 1년 전 여행에서 산악 가이드 남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그녀가 산악 가이드 남자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그가 산악 가이드 남자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실수로 자살을 했다고도 생각을 하고요. 왜 남녀는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1년 전 죽은 그 산악 가이드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결정적으로 왜 이들은 헤어져야 했을까요? 온다 리쿠 여사의 떡밥 신공은 여전합니다. 사실 진실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가려진 진실이 밝혀졌을 때의 그 허무감.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현실에서의 인생살이 자체가 뭐 그렇잖아요. 갑자기 헤어지자는 남자 친구의 전화.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을까? 내가 갑자기 싫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왜 그럴까? 전혀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는데. 사실 이유는 단순할 수가 있겠죠. 그냥 갑자기 싫어진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일 수도 있고, 그 여자의 어떤 모습을 보고 갑자기 싫어질 수도 있고, 암튼 진실은 사실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않죠.


기억과 진실, 그 사이로의 하루 밤의 여행

온다 리쿠의 소설은 대부분 (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 기억과 진실을 탐구하는 여행소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여기서의 여행은 물리적인 여행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억(과거) 속으로의 여행이 많죠. 히로(그)와 아키(그녀)의 어린 시절 공유했던 기억은 일치하는 듯하면서 어긋납니다.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불연속적이며 단편적입니다. 기억이나 진실이나 불확실한 면은 있죠. 과연 그 기억이 맞는 기억일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정말 진실일까? 좀 더 깊게 파고들면 진실 자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히로와 아키는 (내일이면 떠날) 빈 집에서 그 유년 시절(또는 1년 전 사고) 기억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 여행을 떠납니다. 서로의 마음을 숨기고, 때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말이죠. 온다 리쿠의 소설은 반전이 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물론 반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사실 반전 자체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후에 밝혀지는 진실(반전)은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후에 밝혀지는 진실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에서는 히로와 아키가 서로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의심하면서 과거 속의 기억을 불러내는 그 긴장감 넘치는 탐색 과정, 바로 그 과정이 온다 리쿠 소설의 매력이자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매력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까 기억 속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자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시시한 사람에게는 이 소설 역시 지루하고 아무 것도 없는 시덥잖은 내용으로 페이지만 채운 것에 불과하겠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온다 리쿠 소설에 불만을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인 '아무 것도 없는' 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전의 반전이 계속 이어지고는 있습니다. 진실이 드러났다 싶으면 아니고, 또 다른 진실이 목을 쓰윽 내밉니다. 그런데 그 반전의 강도가 여타의 충격적인 미스터리소설에 비해서는 약합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은 반전을 위한 소설은 아닙니다. 반전은 기억과 진실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일 뿐,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아름답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물고기가 물 위를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이겠지?"


이 소설의 느낌은 바로 위의 물고기가 물 위를 올려다본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장소는 빈 집, 등장인물은 두 명, 300페이지의 분량. 사실 소설의 재료가 상당히 부족합니다. 남녀의 생각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뭔가 숨겼다가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는 상당히 힘들텐데, 온다 리쿠 답게 잘 이끌어 나가네요. 물론 결말의 진실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없습니다. 물론 그 진실에서 자신의 옛 기억을 끄집어낼 수도 있고요. 이 소설도 역시 온다리쿠 표 소설입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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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터드 카본 1 밀리언셀러 클럽 88
리처드 K. 모건 지음, 유소영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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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멍청이들, 자기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신념 체계를 통째로 삼켜 버린 저런 멍청이들도 언제나 있을 거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프로그램대로 착착 돈을 벌어들이는 가와하라나 뱅크로프트 같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 게임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지, 규칙을 너무 자주 깨뜨리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당신 같은 사람도 언제나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깨뜨리고 싶을 때, 메트족들은 트렙이나 나 같은 사람을 보내서 대신 시킬거야. 그게 진실이야, 크리스틴. 내가 150년 전에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역사책에서 읽은 내용을 보면 과거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어. 이런 진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

* 메트족: 가와하라, 뱅크로프트 모두 메트족입니다. 메트족은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으로 몸을 계속 갈아입으며 불로불사를 누리는 소수의 지배자를 뜻합니다.

 

* 트렙(이나 주인공 '나) : 살인청부업자나 메트족에 명령(또는 돈,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윤리나 도덕, 책임의식은 없습니다. 돈을 받고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일 뿐.

마지막 코바치(소설 속 주인공, 특파부대 요원 출신)의 이 마지막 말은 굉장히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SF소설인데,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나라(또는 다른 나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소수의 지배자와 그에 빌붙은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죽지도 않으면서(끈질기게 대를 이으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죠) 계속 되풀이되죠. 그래서 코바치의 마지막 대사 "이런 진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는 무척 슬프게 들립니다. 진실을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더군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역사책에도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죠. 코바치는 특파부대 요원입니다. 잔인한 인간이고, 무수하게 많은 인간들을 죽였습니다. 전쟁이라는 허울뿐인 명분 앞에서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코바치가 메트족을 처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닙니다(개인적인 이유로 아무런 해도 없는 인간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스스로 각성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보입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좋은 일도 하고요("뭔가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암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소설은 꽤나 통쾌한 소설입니다. 공고한 기득권 세력(메트족)이 한 사이코패스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어질 때의 그 쾌감, 꽤나 짜릿합니다. 반체제, 혁명 소설치고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꽤나 정치적입니다. 역시 SF소설은 이런 주제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얼터드 카본>이 혁명 소설이라고? 물론 고리타분한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인상 깊었던 내용이 그런 내용일 뿐, 이 소설은 SF, 고어, 하드보일드, 느와르, 미스터리, 사이버펑크 등 다양한 장르의 잡종 교배입니다. 탐정은 아니지만 (탐정의 임무를 부여 받은) 까칠한 코바치가 메트족 뱅크로프트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것이 기본적인 스토리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흡혈귀 같은 뱅크로프트가 자살을? 말이 안 되죠. 암튼 그 자살 원인을 밝히는 도중 의문의 존재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죠. 그런데 사건을 추리하는 도중에 겪게 되는 상황들은 SF적입니다. 코바치라는 인간 자체가 그렇거든요. 의식만 코바치일 뿐 몸뚱이는 악질경찰(?)이자 파트너인 여자경찰 오르테가의 남자 친구입니다. 그리고 300년이나 산 할머니는 20대 초반 여성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고문들과 섹스들. 암튼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봤음직한 익숙한 설정들도 보이지만 좀 더 변태적이고 자극적입니다(이건 뭐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데몰리션맨>에서도 육체가 아닌 의식으로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금 얌전하죠).

과연 뱅크로프트는 스스로 자살을 한 것일까요? 만약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엄청난 것이겠죠? 그들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기득권자의 사고방식과 비슷한 것 같아요. 돈으로 육체를 사고, 인간들을 장난감 다루듯이 가지고 놀다 필요 없으면 그냥 버리죠. 암튼 나중에 밝혀지는 진실은 몹시 씁쓸합니다. 그나저나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브이 포 벤데타>)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브이 포 벤데타>를 재미있게 봐서 영화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 쉽게 상상이 안 되어서 영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지 않을까 싶네요. 그나저나 메트족 부럽기는 부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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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코스모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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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다 리쿠의 소설은 이상하게 바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가 않아요. 또한 이상하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게 되는 것 같고요. 사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을 정도로 평범해요. 온다 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 역시 천재와 노력형 두 여배우의 엄청난 연극의 주연을 따내기 위한 오디션 경쟁이 기본 줄기입니다(<유리가면>의 오마주라는데 <유리가면>이 뭔지는 잘 모르겠네요. 검색을 해 봤더니 만화이고, 스토리도 조금은 비슷하더군요). 연극 사실 좋아하지도 않고, 여배우들의 오디션 경쟁이라는 소재도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온다 리쿠의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읽게 되는 힘(온다 리쿠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내용 보다는 그 내용 속에 흐르는 어떤 분위기), 중독성이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은 연극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온다 리쿠의 전작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과 조금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은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비해서는 좀 더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네요. 사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제게는) 조금 난해했습니다. 미스터리한 느낌은 강하게 풍겼지만 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니 어찌 보면 조금 불친절한 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초콜릿 코스모스>는 우선 쉽습니다. 두 번의 오디션을 놓고 (물론 아즈마 교코라는 배우는 직접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여배우의 치열한 경쟁이 무척 알기 쉽게 묘사되어 있어서 연극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더군요. 사실은 오디션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연극 <열린 창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더 흥미롭더군요. 특히나 <열린 창문>의 마지막 반전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블랜치라는 늙은 알코올 중독자 여자의 독백은 정말 소름이 돋더군요.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열린 창문>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사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워낙 유명한 영화라 제목이 많이 들어봤지만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거든요), 실제 연극이 보고 싶을 정도로 소설 속에서 정말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평범한 오디션은 아닙니다. 사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 평범하지 않은 오디션을 천재 여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아역 스타 출신의 노력형 천재 배우 '아즈마 교코', 연기 초보자이지만 엄청난 연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래키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재 배우 '사사키 아스카' 오디션을 놓고 벌어지는 이 두 명의 여배우들의 치열한 경쟁은 정말 긴장됩니다. 오디션과 천재 여배우, 그리고 소설 속 두 편의 연극. 온다 리쿠의 전작들에 비해 미스터리한 요소는 없지만, 긴장감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읽었네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소설 속에 연극(희곡)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설과 희곡은 조금 다르다고 배웠고(국어 시간에 얼핏 배운 것 같은데), 또한 소설 속에 희곡을 집어넣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닐 것 같은데,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이어 또 이런 작업을 했네요. 사실 소설을 읽었는지, 연극을 본 건지 헷갈리네요. 연극을 감상하면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심리까지 소설로 읽으니 느낌이 묘합니다. 연극의 똑같은 장면을 다양한 여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장면(배우들 나름대로의 해석과 심리 상태)에서의 긴장감은 정말 최고더군요. 연극을 본 적은 없지만, 정말 저렇다면 정말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하는 모습이 정말 생생했습니다. 물론 온다 리쿠만의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요. 여배우들만의 오디션 장면만으로 이런 색다른 재미와 긴장감을 줄 수 있다니, '역시 온다 리쿠의 명성이 허황된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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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신경립 옮김 / 창해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는 이제 국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게 재미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전작주의도 물론 좋지만 결국은 소개되지 않을 작품도 소개됨으로써 국내 일본 추리소설 시장에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단도직입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급생>은 조금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작가의 <방과 후>와 비교를 하자면 <방과 후>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그럼에도 온라인서점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의 별 다섯 개(만점)는 사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별 다섯 개를 줄 소설은 아니거든요. 물론 저 혼자만 이 소설을 재미없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요. 요즘 소개되는 일본 추리소설(신간)과 비교해도 트릭이나 동기가 무척 약합니다. 학교나 교사의 비리나 부정부패라는 소재가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지만, 가슴에 확 와 닿는 그런 분노(교육제도에 대한)는 생기지가 않네요. 물론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회문제(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도 주인공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무게와 동등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그 부분이 제게는 조금 동기가 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고 읽었을 때 트릭 자체가 나쁘지 않습니다. 학교 내의 물건들을 활용한 트릭도 나름대로 신선했고요. 그리고 살인사건의 범인 및 동기도 나름대로 독자들의 허를 찌르고 있고요. 사실 모두가 경찰에게 진실을 이야기했으면 사건의 비밀은 바로 밝혀졌을 텐데, 사춘기 학생들이 주인공인 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감추고 싶은 비밀로 인해서 범행 동기나 범인을 찾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 이런 부분은 무척 좋더군요. 사실 진실은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작은 진실 때문에 점점 더 복잡하게 전개된다는 것. 이 부분의 트릭은 나름대로 높게 평가해 주고 싶네요. 그러나 초기작이라서 그런지 범행의 동기나 트릭이 조금 약한 느낌은 들더군요. 따라서 감동도 충격도 별로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브랜드를 버리고서라도 조금 아쉬움이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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